PEOPLE 시간을 달리는 건축가, 오영욱

그는 ‘선’을 넘는 것을 좋아한다. 건축가와 작가의 선을 넘고, 여행자의 몸으로 국경을 넘던 그가 이번엔 기차로 아홉 나라의 선을 넘었다. 프랑스를 출발해 폴란드, 러시아, 몽골, 북한을 지나 서울역까지. 기차는 달렸고 글 쓰는 건축가 오영욱의 시간도 함께 달렸다.

2018.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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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전성기에 관한 것이다. 어느덧 끝나버린 전성기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 확실히 우리는 예전에 더 잘나갔다. (중략) 시선이 예리했고 눈치가 빨랐다. 지금보다 공기가 맑았고 인정이 넘쳤다. 무엇보다 더 여유로웠고 훨씬 많이 웃었다. 이제는 그렇지 못하다.” 묘한 동질감의 프롤로그를 목도한 순간, 지체 없이 인터뷰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필명 ‘오기사’로 더 유명한 오영욱. 그는 잘나가는 건축가이자 글을 쓰는 작가이자 삽화가다(사족 하나를 덧붙이자면, 그는 배우 엄지원의 남편이기도 하다). 감성 넘치는 글과 일러스트가 가미된, 색깔 있는 여행서로 인기를 끈 그가 오랜만에 여행 에세이를 선보였다. <파리발 서울행 특급열차>. 제목처럼 이 책은 프랑스, 독일, 폴란드, 벨라루스, 러시아, 몽골, 중국, 북한을 지나 대한민국 서울역에 도착하기까지 아홉 개 나라의 국경을, 그것도 열차를 타고 넘는 특별한 여정을 담았다. 한데 왜 철도였을까. 끝나버린 전성기 틈에서 철 지난 사춘기를 앓고 있는 40대의 한 남자와 한 시대를 풍미한 철도. 이들의 만남엔 묘한 애틋함이 있다. 남북정상회담, 화해, 통일이라는 낯선 단어들 속에서 경인선, 동해선 재건이라는 더욱 낯선 이야기가 꾸물꾸물 피어나던 그 무렵, 오영욱은 기차에 올랐다. 
“이 책은 파리로 가서 15일 동안 열차를 통해 돌아오는 이야기예요. 원래 시베리아 횡단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가,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관한 이야기가 들릴 무렵 결정했죠. 제가 한창 어른의 사춘기를 겪으며 헤매고 있던 때이기도 했고요.” 무서울 것 없던 30대를 지나 어느덧 아저씨 대열에 선 오영욱은 때늦은 사춘기를 겪고 있노라고 고백했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2시간 내에 기차 예약을 마쳤다. “보통 우연성에 집중하는 편인데, 이번 여행은 제게도 낯선 방식이었죠. 처음부터 분초 단위로 계획을 세웠으니까요.”  아홉 개 나라의 횡단 열차를 예약하고 나라별 비자 신청을 하고, 기차 여행을 위한 사전 조사가 촘촘하게 이루어졌다. “책을 펼치면 기차역 주변의 일러스트가 담겨 있는데, 사실 저는 기차 안에 있으니 그 풍경을 볼 수 없었죠. 때문에 이것 역시 루트를 따라, 미리 다 그려뒀어요. 두 달 동안 계획해둔 모든 것에, 기차를 탄 이야기만 덧붙인 셈이죠.”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로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 연결이 우선 추진된다는 속보 기사를 읽었던 폴란드 포즈나뉴 그로니역, 바이칼 호수가 펼쳐지는 러시아 슬류단카역 등. 정차한 역의 풍경과 서정이 한눈에 읽히듯, 오영욱 특유의 정감 넘치는 일러스트가 책장을 채우고 있다.        
“일단 샤워는 못하는 거고요. 세수만 한다 쳐도 기차 물탱크가 얼마나 더럽겠어요. 그냥 물티슈로 대충 씻었죠. 가장 길게는 4박 5일 동안 못 씻었는데, 그렇다고 씻는 게 절실할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아요.” 열차를 갈아타기 위해 정차하는 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숙소를 정하고, 잠시 몸을 누이고 씻는 게 그에게 부여된 가장 쾌적한 휴식이었다. “제일 힘들었던 거요?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웃음). 너무 재미있었죠. 외로울 틈도 없었어요. 하루 세 끼 먹어야지 간식도 먹어야지, 정차할 때마다 담배도 피워야지, 책도 읽어야지, 풍경도 봐야지. 진짜 바빴어요.” 지나가는 풍경을 만끽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을 것 같지만 기차 여행은 실로 바쁜 나날이었다. 또 한 가지 어긋난 사실은 흔들리는 객차 안에서 잠을 자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깨고 잠과 너무 친해졌다는 것. “흔들리는 기차에 있으면 요람처럼 잠이 와요(웃음).” 그 와중에도 아름다운 풍경은 최고의 기쁨일 터. “아름다운 풍경의 바이칼 호수, 몽골 초원도 물론이지만, 더 감동적인 건 시베리아 노선일 거예요. 매일 자고 일어나도 며칠 동안 같은 풍경이 쭉 펼쳐지죠. 그 순간이 너무 좋았어요.” 한반도 남쪽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끝없는 스케일. 그는 가장 멋진 풍경으로 주저 없이 그곳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옛날 기차들은 다 예뻐요. (책을 펼쳐 보이며)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모든 기차가 이 디자인이에요. 저 기차는 정확히 어느 나라 기차인지 저도 몰라요. 제가 탄 기차를 찍은 게 아니거든요. 핸드폰 파노라마 기능으로 달리는 맞은편 기차를 촬영한 거죠. 플랫폼에 내려 걸어가면서 찍은 것도 있고요.” 색바랜 듯 오랜 세월을 묵묵히 달려온 각양각색의 열차 사진. 그것은 마치 화려한 전성기 뒤로 드리워진 아련한 훈장 같기도 하다. 끝나버린 전성기를 위로하듯 기차에 오른 그. “기차 역시 전성기가 지나갔고, 보고 있자면 가슴 한구석이 뭉클하고 아련해지는 무언가가 있어요.” 철 지난 기차와 함께 느린 시간을 보내는 여행. 그의 얼굴 위로 열차가 오버랩된 것은 그 순간이었다.  
“맛보기로 가볍게 열차 여행을 떠난다면 가까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아름다운 바이칼 호수까지가 좋을 것 같아요.” 거대한 바이칼 호수, 그것은 중간에 자리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지 같은 느낌이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기후와 풍경이 시시각각 변하는, 낯선 몽골 초원의 애잔한 풍경은 또 어떻단 말인가. 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 여행의 종착지는 중국 단둥역. 실제는 인천항에서 페리를 통해 서울에 당도하지만, 경의선의 열망을 담듯 그는 신의주, 개성, 평양을 지나 서울역에 당도하는 특별한 가상의 철도 코스를 담았다. “중요한 3개 역을 지나는 경의선 루트는 구글 등을 통해 찾아보거나, 상상하듯 쓰고 그린 내용이에요. 건축가로 나름 20년을 일했으니, 그 구간을 가상으로 연결하는 작업은 그리 어렵지 않죠(웃음).” 하여, 이 책은 그의 말마따나 여행기이기도 하지만, 소설이기도 하다. 

 

 

어른의 사춘기, 철 지난 철도를 타고   
“기차 안에서는 오만 잡생각이 들어요. 그중에는 정리되는 것도 있고 사라지는 것도 있고. 분명한 건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요. 사춘기를 맞은 저에게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 속에 얘가 있었던 거죠(책을 가리키며).” 물론 그것이 열차였는지, 책을 지칭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80년대, 미국 이모가 선물해준 디오라마 기차 장난감 세트에 빠져 기차를 사랑하게 된 소년은 이제 ‘기차 덕후’라는 이름 아래 조립형 기차를 사 모으고, 기차 여행을 즐기는 아저씨로 제2의 시간을 맞고 있다. “사무실 이사를 하면서 책의 1/3을 버렸고 올해 저를 버렸죠. 과거에 얽매인 저를(웃음).” 최근 들어 그는 건축 작업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옛날에는 ‘10개 작업 중 한두 개만 잘 나오면 되지’ 생각했어요. 이제는 3년에 하나를 해도 된다는 마음이죠. 사실 5년에 하나, 10년에 하나 하고 싶었어요. 제가 70까지 산다고 하면 30여 년 남았잖아요. 3개만 만들면 얼마나 의미 있어요. 우리가 아는 수많은 작업 중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한두 개거든요.” 자신에게도 누군가에게도 의미 있는 건축 작업을 하고 싶다는 그. “시간을 확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여행’인 것 같아요.” 서두르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고 다가올 시간과 상황을 준비하는 일. 여행은 그에게 기억과 시간을 선물하는 탄탄한 재료인 셈이다. 지금 이 순간, 기차 덕후 오영욱은 아직 끝나지 않은 사춘기의 잡념을 싣고 오스트리아, 독일, 네덜란드를 지나는 유레일패스에 올라 있을 것이다. 제2의 철도 전성기는 요원할지 모르지만, 첨단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에도 옛것을 완전히 지우지 않는 철도 여행의 매력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전성기일 것이다. 굳이 전성기가 아니어도 좋고.   

Photographer 김제원 Location 삼청기차박물관 Cooperation 페이퍼스토리

 

 

 

더네이버, 인터뷰, 오영욱

CREDIT

EDITOR : 설미현PHOTO : 김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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