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송홧가루 어지러운 봄에, 김병종

바람 따라 춤추는 송홧가루가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봄. 그의 화폭에는 꽃이, 당나귀가, 발가벗은 어린 소년이 송홧가루 어지러운 노란 풍경 속을 노닌다. ‘생명의 노래’ 연작을 통해 잘 알려진 김병종 화백. 올봄 그는 또 다른 노래를 전한다. 객기 충만한 소년도 홀연히 만났다.

2019.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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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분분, 2017, 혼합 재료에 먹과 채색, 160.3×119.5cm

 

 

화업 40년. 이 봄은 그에게 어떤 의미련가. ‘바보 예수’, ‘생명의 노래’ 연작을 통해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그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했고, 내로라하는 세계 다수의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는 등 화가로서 괄목한 만한 이력도 남겼다. 그뿐인가. 최연소 서울대 미대 교수, 40대 최연소 서울대 미대 학장 등 누가 봐도 ‘성공’과 가까운 삶을 살아온 그다. 김병종 화백, 그가 6년여 만에 개인전을 연다. 당연히 그의 대표작이자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품인 ‘생명의 노래’ 시리즈의 연장선일 테지? 하지만 섣부른 예상은 정확히 빗나갔다. 그의 화폭은 노란 송홧가루가 어지러이 흩날리고 있었다.  
“소나무는 인간적, 인문적, 한국적인 의미를 품고 있어요. 어린 시절 유년의 공간 속에 등장하는 친숙한 존재이기도 하죠.” 이번 개인전을 꽉 채운 신작 ‘송화분분(松花紛紛)’. 소나무의 꽃가루, 즉 송홧가루가 바람에 어지럽게 흩날리는 풍경을 담았다. “가운데 꽃은 꽃들의 심장, 눈동자라 할 수 있어요. 그것은 마치 심장이 뛰는 듯하죠. 이번에 선보인 ‘송화분분’의 화폭을 들여다보면 수평도, 원근도 맞지 않지만 사방에서 몰려와 움직이는 노란 송홧가루가 생동하듯 화폭을 채워요.” 전작 ‘생명의 노래’가 다양한 생명체가 차별 없이 뒤엉켜 있는 원초적인 생명의 에너지를 담았다면, ‘송화분분’은 그 생명의 ‘이동’에 집중한다. ‘생명의 노래’ 연작이 꽃, 나무, 물고기, 말 등 소소한 생명이 화폭을 지배했다면, ‘송화분분’은 몽환적인 송홧가루가 화폭을 지배한다. 그 덕에 추상에 한 발 더 다가선 느낌이다. 한데 왜 송홧가루냐는 물음에, 그는 홀연히 어린 소년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송화분분, 12세의 자화상, 2018, 혼합 재료, 180×150cm

 

숲에서, In a Forest, 2009~2017, Mixed Media, 162×260cm

 

자연이 키운 아이  
남원의 작은 마을. 주변의 반대에도 끝끝내 화가의 길을 고집한 객기 어린 소년 김병종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극장 포스터를 따라 그려보기도 하고, 어디든 쭈그려 앉아 데생도 했죠. 우리 때만 해도 남자가 직업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모두 반대했죠.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반대하면 불이 붙듯이 더 사랑하게 됐어요.” 미술관, 도서관 하나 없는 시골 마을. 그곳에 풍부한 것이 딱 한 가지 있었으니 바로 소나무를 필두로 한 자연, 그것이었다. “소나무 밑에서 설핏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면 소나무 위에 부엉이가 보이기도 하고, 밤이면 별이 쏟아지고. 그런 환경에서 자연의 일부로 자란 거죠. 화폭 속 발가벗은 아이가 누워 있는데, 옷을 벗어버리고 땅 냄새, 바람의 향기를 맡고 있죠. 말 그대로 자연이 키운 아이예요.” 소나무 아래 누우면 엄마 손길처럼 배를 쓸어주는 바람이, 맑은 지혜의 소리가, 우주의 영혼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노라고 그는 회상한다. “마치 구름이 일어나듯이 송홧가루가 바람을 타고 이동하는 모습, 그런 것들이 몽롱하고 환상적으로 각인된 거죠.” 어린 시절의 기억, 송홧가루는 그렇게 숙명처럼 그의 화폭 속으로 들어왔다. “적묵법을 썼어요. 색을 쌓듯이 그리는 기법으로, 노란색을 쌓아 올렸죠.” 모두 노란색처럼 보이지만 각기 다른 노란색을 지닌 송홧가루. 그는 바람결에 사방으로 흩어지는 송홧가루를 켜켜이 화폭에 쌓아 올렸다. 하나 그 겹침은 둔탁함과는 거리가 멀다. 몽환적인 신비에 가깝다. 유년의 기억 창고에 저장된 색채와 자연의 기억. ‘송화분분’은 그 시절 산천에 축포 터지듯 생명 차오르는 어느 봄날의 이야기이자, 꿈꾸듯 몽환적인 미지의 세계일 것이다. 


“식물학자 정헌관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어요. 송홧가루가 우리 눈에는 마치 미세먼지처럼 보이지만 굉장한 신비를 품고 있다는 거죠. 여느 꽃은 벌이나 나비 같은 매개체를 통해 번식하지만, 송홧가루는 오직 바람의 이동을 통해 번식해요. 이상적인 DNA를 찾아서 어떤 것은 수십 킬로미터를 여행한다죠. 그 엄청난 생명체들이 이동하다 떨어지기도 하고 제대로 결합한 극소수가 노송이나 낙락장송이 되는 거예요.” 송홧가루의 여행. 그는 그 틈에서 새로운 시작을 품은 ‘씨앗’의 근원을 보았고, 명을 다해 바람을 따라 세상을 떠도는 넋도 보았노라고 말한다. 생명의 시작과 끝. 그 겸허한 삶의 노래가 바람을 타고 흐른다. 

 

추산, 2018, 혼합에 먹과 채색, 259×162cm

 

화홍산수, Red Flower Landscape, 2017, Mixed Media, 193×259cm

 

그에게 아직 전성기는 오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인문, 종교, 역사 할 것 없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읽어댔어요.” 다독가이자 글쓰기를 좋아했던 소년. 그의 글쓰기는 취미에 그치지 않았다. 언론사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장가로 인정받은 것은 물론, 6권의 <화첩기행>은 당대 베스트셀러로 꼽힐 만큼 몇십만 부가 팔렸다. “어린 시절 좁은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늘 먼 곳,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어요. 역마살 낀 사람처럼 세계를 떠돌며 스케치하고 글을 쓰고. 그러면서 ‘화첩기행’이라는 장르를 일군 거죠.” 유년 시절의 풍부한 미적 체험, 독서 체험은 그에게 문장가이자 화가라는 재능의 밑거름을 안겨주었다. “그림 그리는 일이 감성의 표출이라면, 글을 쓰는 일은 지적인 탐험 같아요.” 지금 읽어봐도 난해한 시를 일찍이 중학교 시절에 썼고, 남원역 다방에서 현역 작가와 함께 2인전을 연 배짱 좋은 중2 소년. 밤에 찬밥을 비벼 먹고 화가가 되겠다고 서울행 완행열차에 오른 당찬 소년은 이제 60대 중반의 노련한 거장이 되었다. 그에게 이번 개인전은 남다른 의미일지 모른다. 작년 서울대 미대 교수직을 정년퇴임하고 전업 작가로서 여는 첫 개인전이자, 무엇보다 개인적인 아픔을(아내이자 소설가인 정미경을 갑작스럽게 떠나보내고 그는 한동안 깊은 상실감에 빠졌는데, 그 곁에 그림이 있었다) 딛고 새로운 시작을 여는 또 다른 삶의 챕터라 해도 좋을 것이니. 그 챕터 위에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도 함께한다. “4년 가까이 기차로 남원을 오르내리며 굉장히 신경을 썼어요. ‘바보 예수’부터 ‘생명의 노래’ 시리즈별로 400여 점을 무상으로 기증했고요.” 그의 오랜 숙고와 결단 끝에, 작년 3월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이 개관했다. “어릴 적 보고 배울 만한 도서관, 갤러리 하나 없던 게 가슴에 맺혀서 마음의 결정을 했어요. 이 지역에서 피카소 같은 존재가 나올 수도 있지요(웃음).” 뿌리와 같은 버팀목이 되어준 땅, 그는 그 자연 앞에 환원하듯 미술관이라는 족적 하나를 남겼다. 

 

작년 3월 김병종 화백의 고향인 남원에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이 오픈했다. 400여 점에 달하는 그의 그림은 물론 평생 모은 문학, 역사, 종교, 예술 고서 등 3500권도 함께 만날 수 있다.

 

“전시 오프닝 후 책 작업에 들어갔는데, 도시에 관한 책이에요. 왜 도시는 사랑과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지상에 남은 명품 도시들에 관한 내용으로, 도시 인문학 혹은 도시 명상 기행 시리즈라 할 수 있어요.” 책상 8개를 두고, 각기 장소를 달리하며 그림 그리듯이 글을 쓴다는 그. 색채가 느껴지는 회화적 문장, 수채화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그의 심지는 정확히 손을 거쳐 하얀 백지 위에 채워진다(그는 컴맹으로 아직도 손으로 글을 쓴다고). 그림으로, 글로, 자신의 예술적 분비물을 끝없이 분출 중인 김병종. “전성기가 곧 오겠구나. 이런 예감이 들죠(웃음).” 40년의 굳건한 화력에도 이제 곧 전성기가 올 거라며 쉼 없이 열정을 다지는 김병종. 그의 화폭에 핀 ‘생명력’을 바로 지척에서 목도한 듯도 하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연극판에서 연극도 했던 지난날. 그는 다재다능한 것이 아니라, 그저 시골 사람 특유의 뒷심이 강한 것뿐이라며 자신을 낮춘다. 4월 7일까지 가나아트센터에서 펼쳐질 <송화분분> 전. 바람을 타고 흐르는 노란 송홧가루의 몽환적이고 시적인 풍경 속에서 그의 ‘뒷심’을 또다시 발견하게 될 터. 

김제원 Cooperation 가나아트센터

 

 

 

더네이버, 인터뷰, 김병종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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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 설미현PHOTO : 김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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