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시스루 원피스 페이우. 속옷 캘빈클라인. 구두 왓아이원트.

(왼쪽) 블랙 원피스 페이우. 팔찌 반지 모두 골든 팀버. (오른쪽) 레드 벨벳 원피스 와이앤드앤 by 양성숙. 귀고리 골든 팀버.

한 여자가 저수지로 떨어지려 했다. 남자는 잡으려 애썼다. 둘은 남매였다. 가슴은 아픈데 마음은 불편했다. 10년 전이다. <올드보이>는 10년 전을 기억하고 싶을 때만 쓰는 향수가 되었다. 윤진서는 그 이후로 15편의 영화를 찍었다. 겹치는 감독도 없다. 매번 새로웠다.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남을 수 있는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이 생각은 20대를 보내며 머릿속에 정리되었어요.”

TV나 스크린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배우가, 자신을 보여주는 방법을 찾겠다는 건 차원이 다른 도전이었다. 더 높은 수준의 연기가 필요했고 흥행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본인을 믿어야 한다. 윤진서가 윤진서를 믿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체력 훈련 중이었어요. 거창한 건 아니고, 성인이 된 후로 체력의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훈련을 해요. 그러다 심심해서 매니저한테 시나리오 들어온 거 없냐고 했더니, 재밌는 게 없다며 안 보여줬어요.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보면, 영화판에서 혹은 대중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읽혀요. 그게 궁금해서 이것저것 읽다가 <그녀가 부른다> 시나리오도 봤죠. 느낌은 ‘사이즈가 큰 영화는 아니다’ 정도였어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는데 뜬금없이 눈물이 나면서 <그녀가 부른다>가 생각났어요. 시나리오를 읽는 것만으로 마음이 치유되기도 했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었어요. 흥행은 중요하지 않아요.”
흥행이 힘들 것 같은 영화를 선택하는 배우, 흥행이 되지 않아도 상관없는 배우가 낯설었다.
“윤진서다운 행동이죠. 영화 속 진경이라는 캐릭터를 잘 표현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시작한 거예요. 진경이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컸죠. 그거 알아요? 커다란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기 때문에 관객을 속일 수가 없어요. 연기하면 안 돼요. ‘쟤 연기하네?’라는 말 나오면 끝난 거예요. 배우가 연기를 하면 안 되는 거죠. 이해되죠?”
문어체 같은 화법과 과장되지 않은 눈빛으로 영월에 사는 진경이는 내면의 상처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은 지 오래다. 누군가에겐 불편한 여자다. 윤진서만 불편하지 않았다.
“시나리오에 없던 진경의 과거를 떠올렸어요. 서울서 살면서 상처받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그래도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찾아든 곳이 영월인 여자.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이지만 영화 속 진경이의 5년 전쯤을 이해하고 연기했죠. 스타일리스트 없이 집에서 입던 옷을 입고 찍으면서 윤진서와 진경이가 접점을 이루도록 했어요. 덕분에 영화를 하면서 소모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채워졌죠. 영화를 찍으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에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20~30대 여자라면 공감할 수 있을 거예요.”
윤진서는 주로 여자 이야기를 한다. 세게 한다. 영화 <비밀애>를 찍을 때도 그랬고, 여자가 공감할 수 있는 무언가를 계속 갈망하고 있는 듯 보였다. 연이어 독립영화를 찍고 있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페미니스트…?” 대답은 조심스럽지 않았다.
“맞아요. 10대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남자에게 기대는 여자가 싫어요. 남녀가 똑같은 신뢰와 영향을 주고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나 더, 문화의 다양성을 원해요. 제가 몇 편의 독립영화를 찍으니깐 철없는, 겉멋 든 여배우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어요. 원래 남의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살지만, 그렇다고 관심을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둘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대한민국은 다양성에 대해 관대하지 못해요. 한쪽으로만 흘러요.”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 시대에서 몰개성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아트하우스를 만들고, 보지 않을 것 같은 영화를 틀고, 연기하고, 책을 쓰는 일.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스스로를 표현해야 해요. 상업영화에서는 표현할 수 없어요. 내 이상과 맞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에세이집 <비브르 사 비>도 냈어요. 글로도 표현할 수 있게 되었죠.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창구가 또 생겼어요.”
현실적인 문제만 없다면 그녀를 응원하고 싶었다. 부딪힐 수밖에 없는 현실은 그녀는 대한민국에 사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이다.
“자비에 돌란이라는 1989년생 캐나다인 감독이 있어요. 그의 영화를 보고, 얘는 뭔가 싶더라고요. 어린 나이에 감독, 각본, 배우, 미술, 의상을 혼자 다 해요. 또 그런 사람과 영화를 치켜세워주는 캐나다의 문화가 부러워요. 주류가 처음부터 주류였던 건 아니잖아요. 소수가 즐기다가, 시간이 흘러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되죠. 세상이 변화하는 시간쯤은 기꺼이 버틸 수 있어요.”

윤진서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 사람이 배우인지, 작가인지, 감독인지, 평론가인지, 혹은 운동가인지 헛갈린다. 다양한 분야를 뛰어다닌다. 작은 입에서 나오는, 한 번 들으면 절대 잊히지 않는 목소리로 자신을 마음껏 표현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괜한 의협심도 생기고 도와주고 싶고, 심지어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어진다. 윤진서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과 입술로 바로 앞에 앉은 한 사람부터 이해시켰고, 신뢰를 줬다.
“이젠, 배우가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감독을 발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대한민국에 감독이 누가 있어요?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감독님 말고 또 있어요? 없어요. 있긴 있지만…. 감독이 배우를 발굴하기보다, 배우가 음지에 있는 감독을 양지로 올려서 자신이 낼 수 있는 색깔에 다양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봐요.”
지금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은 혼자 하기엔 벅차 보였다. 물론 가슴 벅찬 일이기도 하다.
“단편소설을 쓰고 있어요. 시나리오도 쓰고요. 연기와 글 중 무엇이 저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둘 다 잘한다고 할 수는 없는데 열심히 해요. 조만간 세 편의 영화가 더 나올 텐데, 공동 프로듀서로 이름도 올렸어요.”
10년 동안 윤진서는 많은 걸 결정했다. 자연스러운 것,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녀를 볼 수 있는 곳이 멀티플렉스가 아닌 독립영화관이어도 혹은 책 속 활자여도, 블로그여도 그녀는 사람들을 어디로든 끌어올 수 있다. 왜냐하면 윤진서는 누구보다 자신을 잘 표현하며 관심을 희망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