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렉서블한 공간을 통해 자유롭고 합리적인 삶을 추구하는 건축가 샘. 그는 현대사회에서 건축은 어때야 하는지를 자신의 생활을 통해 찾는다. 그 답으로 제안한 ‘트라이앵귤러 베드(Triangular Bed)’는 지난해 한 건축 전시를 통해 높은 호응을 얻었다. 핵가족 또는 싱글 가정을 위해 디자인한 것으로 2명이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침실의 레이아웃을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는 것이 특징.

1 침대 머리맡에 있는 그림과 오브제는 모두 샘의 작업에 영감을 주는 것들이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 누군가로부터 넘겨받은 것 등 출처는 각양각색. 이 중 나름 귀하게 간직하는 것은 선반 안에 진열한 요제프 알버스(Josef Albers) ‘Homage to the Square’라는 그래픽 프린트로 이는 그의 할아버지 책갈피에 끼워져 있었던 것이라고. 2 루프톱에는 그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탄생한 사우나가 있다. 투명한 플렉시 글라스 큐브 안에 가스 스토브를 설치했는데, 샘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애용한다. 3, 4 바닥의 높낮이를 달리 만든 덕분에 공간이 자연스럽게 나뉘는 효과를 얻었다. 낮은 쪽 공간은 샘이 이곳에 살면서 궁리 끝에 마련한 일종의 다이닝&키친이다. 개방형 공간의 매력을 살려주는 투명한 다이닝 테이블은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덴마크 아티스트 투에 그린포트(Tue Greenfort) 작품. 테이블 가운데 설치된 조명은 옛날 가로등으로 쓰인 가스등이다. 실제 테이블 아래 가스통이 설치되어 있다. 빨간색 스틸 튜브 프레임 의자는 빈티지 숍에서 구입했다. 식탁 뒤로 보이는 주방은 소박한 라이프를 지향하는 샘이 구상한 “프리 스탠딩 키친” 모듈 시스템이다.

일본에서 6년간 실무를 쌓고, 2010년 베를린으로 거주지를 옮겨 자신의 건축 사무소를 운영하는 34세의 남자, 샘 체르마예프(Sam Chermayeff). 그의 집은 베를린에서도 젊은 디자이너와 예술가가 모여 산다는 미테 지역의 신축 건물에 자리한다. 그와 인터뷰하기 전, 프로필로 미루어 그의 디자인 스타일을 짐작해보았다. 분명 그의 공간은 트렌디함 자체를 표현하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런데 그의 집에 들어선 순간, 내 확신과 기대는 예측 불허라는 명제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무덤덤하게 생긴 옛 동독의 오래된 건물 사이, 폴리카보네이트로 마감한 외관이 심상찮게 느껴지는 5층짜리 빌딩. 그의 집이 있다는 건물 앞에 당도했을 때만 해도 기대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런데 실내에 들어선 순간 눈앞에 펼쳐진 카오스 같은 풍경은 이내 나를 혼란에 빠뜨리고 말았다. 문도 벽도 없는 텅 빈 콘크리트 큐브 안에는 그만그만한 높이로 쌓인 책 기둥이 우후죽순 솟아 있고, 만들다 만 것인지 혹은 고장난 것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브제는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통창 앞에 옹기종기 모여 천진난만하게 빛을 발했다. ‘이곳이 진짜 집일까? 혹시 이삿짐을 다 정리하지 못한 것일까?’ 행여 불안한 눈빛을 들키면 어쩌나, 마음을 가다듬는 찰나 집주인 샘이 말을 건넨다.

이 집에 놓인 것은 그저 필요에 따라 그 자리에 놓였을 뿐 장식하기 위함이 아니다. 크레인 장난감에 전구를 고정시켜 플로어 스탠드로 활용한 재치가 위트 있다, 그의 친구이자 건물주인 아르노의 여자친구가 썼던 콘크리트 테이블은 아르노가 건물을 지을 때 콘크리트 큐브에서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제작한 가구 중 하나다.

1, 4 주방 가구는 왜 꼭 벽면에 고정되어야만 할까? 플렉서블한 공간을 지향하는 샘이 만든 프리 스탠딩 시스템 키친. 2 아래층에 자리한 친구 아르노의 집에 있는 욕실. 이 미래 지향적이고 독특한 디자인의 세면대와 변기는 놀랍게도 1975년 도기 전문 기업 빌레로이&보흐에서 제작한 것으로 디자이너 루이지 콜라니(Luigi Colani)의 작품이다. 3 실험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샘의 공간. 비범해 보이는 가구와 오브제는 모두 그의 건축 사무소에서 추진하는 프로젝트의 프로토타입이거나 지인인 아티스트의 작품인 경우가 많다. 오픈 스페이스의 장점을 살리기 위한 가구 중 플렉시 글라스로 제작한 벤치 역시 샘의 실험작이다.

“잠시만 둘러보고 계세요. 오늘 아침에 마크가 깨워달라고 했거든요. 금방 돌아올게요.” 샘이 말하는 친구 마크는 독일의 저명한 건축 비평가다. 같은 분야에 있으니 친분이 있으리라 짐작은 가건만 얼마나 가까이 살길래 그를 깨우러 간다는 걸까? 이 어리둥절한 상황에 대해 미처 파악하기도 전, 샘이 마크와 함께 아래층에서 유유히 걸어 올라왔다.
“이 집은 일종의 셰어 하우스예요. 저희 집은 이 건물의 주인인 건축가 아르노 브란틀후버(Arno Brandlhuber)의 건축 사무실 층의 일부분이고, 아래층은 아르노의 집이죠.” 전날 아르노의 사무실에서 밤샘 작업을 했다는 마크는 아르노의 사무실로 출근하는 길이었고, 그가 아르노의 사무실을 가려면 이렇듯 샘의 집을 거쳐간다. 지난 2007년에 착공해 2010년 완공한 5층짜리 건물은 건축가 아르노 브란틀후버가 아틀리에와 주거 공간이 공존하는 형태로 설계한 곳. 자신의 오피스와 집은 물론 갤러리와 샘 같은 세입자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건축 사무실은 집과 가까운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에 있습니다. 집에 있는 모든 가구와 소품은 제 업무와 유관한 것이 많아 이곳을 사무실 내지는 스튜디오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죠. 저는 이렇게 모든 것을 노출한 채 사는 방식이 무척 편하고 효율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집에 입주한 것이 저에겐 행운입니다.”
샘이 이 집에 들어온 계기는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 일본의 세계적 건축 사무소 사나(SANAA)에서 근무한 그는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 참가했고, 당시 친구인 독일의 세계적 조각가이자 사진작가 토마스 데만트(Thomas Demand)의 소개로 아르노를 만났다. “토마스는 독일의 컨템퍼러리 아트 분야에서 꽤 중요한 인물이죠. 그와 친분이 두터운 아르노는 도시 건축에 일가견이 있는 건축가로, 특히 베를린 주거 건축 문제에 현실적이고 획기적인 솔루션을 제안하며 주목받고 있습니다.” 건축가로서 도시 주거 문제에 관심이 높았던 샘은 아르노와 금세 친해졌고, 2013년 가을, 두 남자는 각자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된다.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제가 아르노의 여자친구가 쓰던 공간에 입주하게 되었죠.” 샘이 사용하는 공간은 48㎡ 면적으로 그리 넓은 편은 아니지만, 그의 라이프스타일에 비추어본다면 굉장히 넉넉한 편이다. 슬라이딩 도어가 있는 붙박이장 안에 옷을 정리해두고 침대와 식탁을 놓으니 집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가구는 갖춰진 셈. 책은 언제든 꺼내 보기 편하게 군데군데 쌓아 올려놓았고, 플로어 스탠드 조명은 크레인 모형 장난감을 활용해 만들었다. “크레인은 무엇이든 들어 올려 옮기는 기계잖아요. 그 본분에 맞게 크레인이 전구를 들어 올리도록 해서 플로어 램프를 만들었죠.”

베를린 미테 지역 브룬넨스트라세에 자리한 샘의 콘크리트 하우스.

현재 샘은 건축가로서 도시 주거 생활 공간에 대한 현실적 솔루션을 제안하는 작업에 몰두 중이다. 샘이 사는 방식이 그가 생각하는 도시 주거 솔루션의 한 예라 해도 무방하다. “꼭 필요한 살림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했죠. 저는 생활 속에서 일과 관련한 영감을 얻는 편인데,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펼쳐놓은 게 지금의 집과 같은 모습이에요.” 그래서일까, 샘의 집에는 어느 것 하나 의미 없이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삼각형으로 생긴 침대는 그의 건축 스튜디오에서 프로젝트를 위해 만든 것인데, 좁은 방에 침대를 놓아도 충분히 공간을 넓게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가구다. “침대에 누웠을 때 하부 양쪽 모서리는 죽은 공간이라 해도 무방해요. 저는 그 모서리를 생략해 그만큼 공간을 확보한 거죠.” 개방형 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이 침대는 넓은 공간에서 한층 빛을 발한다. “사각형 침대를 이렇게 둔다면 동선이 엉망이었겠지만 지금 이 침대는 전혀 거슬리지 않아요.” 침대 커버를 삼각형으로 제작하는 게 번거로울 뿐이라는 그는 이 집에 살면서 불편했던 점 한 가지도 이와 같은 원리로 해결했다. “보시다시피 이 층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심지어 욕실도 없는데, 아래층에 있는 아르노 집에 있는 걸 함께 써요. 욕실을 하루 종일 쓰는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주방은 꼭 갖고 싶었죠. 다만 완벽할 필요는 없었고요.” 이에 대한 해결점은 그가 좋아하는 토스터에서 비롯했다. “캐주얼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는데, 이를 좀 더 편리하게 쓰고 돋보이게 놓을 방법을 찾다가 토스터에 맞는 철제 받침 선반을 만들었죠. 그리고 가스오븐레인지와 이동식 수납장, 미니 냉장고 등과 같은 높이로 선반을 만들어 일렬로 놓으니 자연스럽게 모듈형 주방이 완성된 것. “이에 확신을 갖고 급수 시설을 더해 싱크 볼 하나를 설치하는 것으로 나름 완벽한 주방을 만들었습니다.”
샘의 지극히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생활 방식은 머지않아 베를린의 주거 문화에 변화를 일으킬 예정이다. 베를린 중심에 짓는 아파트가 그 주인공으로, 타워 6개로 구성된 아파트는 벽을 슬라이딩 월로 만들어 커튼처럼 이동할 수 있게 해 공간을 유동적으로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이 아파트에 살게 된다면, 당신의 집 중 게스트룸은 옆집과 공유할 수 있게 지어질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늘 그 방을 쓸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 이건 이웃과 함께 쓰는 게 효과적이죠. 제 생각에는 늘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는다면 주방도 이렇게 공유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거예요.” 실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현실적으로도 충분히 실현 가능한 건축일 터. 건축가 샘 체르마예프가 짓는 집에 대해 기대를 하는 건 무모한 도전이 아닐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