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추상회화에 스민 한국적 색채

1960년대 새로운 조형 언어를 추구한 미술 단체 ‘오리진’과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의 창립 멤버로 활약한 서승원 작가의 작품 세계를 되짚어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그의 작품 속 한국적 색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국내 추상미술의 발전을 견인해온 거장들의 작품 중 우리 색채가 묻어나는 작품을 살폈다.

202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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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h Seung-Won, ‘Simultaneity 88-08’, 1998, Silkscreen, 15×30cm, A.P.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Suh Seung-Won, 'Simultaneity 73-17', 1973, Oil on canvas, 116×116cm,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지난 9월 8일 한국 추상회화 역사에서 중요한 방점을 찍은 서승원 작가의 개인전 <서승원: 동시성-무한계>가 개막했다. 이번 전시는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동시성’을 주제로 형태, 색채, 공간이 하나의 평면 위에 어우러지는 작업을 전개해온 그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망라했다. 그동안 개인전에서는 선보인 적 없는 드로잉과 판화까지 전시해 작가의 예술 세계를 보다 심도 있게 탐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한국 기하 추상의 선구자, 그리고 단색조 회화의 초석을 세운 것으로 평가되는 그의 작품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이번 만남에서는 그 무엇보다 작품 속 색채에 집중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한평생 한국 추상회화를 담아낸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우리의 정서가 여실히 느껴지는 지점이 바로 색채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Suh Seung-Won, 'Wood-C', 1968, Woodcut, 36×28cm, Ed. 2/10,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삶에서 화폭으로 옮겨간 색채

 “참 예쁜 한옥이 많은 동네인데 저기를 다 재개발하고 있네.” 삼청동 PKM갤러리의 별관, 촬영을 위한 조명 세팅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서승원 작가는 유리창 너머를 가만히 바라보다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린 시절을 한옥에서 보낸 터라 그 광경이 더욱 안타까웠으리라. 그는 대학을 마칠 때까지 한옥에서 살았는데 그때의 기억은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승원 작가가 한국 화단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알리기 시작한 건 스물두 살인 1963년, 오리진 그룹을 결성하면서다. “우리의 정신과 얼이 담긴 작품을 선보이고자 같은 생각을 지닌 이들과 함께 ‘오리진’ 그룹을 창단했어요.” 당대 국내 화단에 팽배했던 앵포르멜 사조에서 벗어나 한국적이면서도 이지적인 추상회화를 구현하고자 한 이들은 기하학 패턴을 화폭에 올리기 시작한다. 주축 멤버였던 그 역시 엄격한 기하학 구조와 오방색을 이용한 작품들을 완성한다. “대학 시절 사찰에서 단청 그리는 일을 잠깐 했어요. 그때의 경험이 초기작에서 색으로 발현된 거죠.”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변곡의 시기를 맞이한다. 1970년대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반듯한 기하학 패턴은 여전했지만 오방색이 아닌 원색을 한 번 ‘걸러낸’ 중성색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 “한옥 문살에 바른 창호지에 걸러진 빛의 색을 보고 자랐어요. 그게 작품에 녹아든 거죠. 여기서 색이 걸러졌다는 표현이 꽤 중요한데, 그 과정에서 한국적 정서가 깃들기 때문이에요. 한지도 닥나무의 하얀 내피만 걸러내서 만들고, 다듬이질한 흰옷 역시 다듬이질 과정을 통해 한 차례 걸러진 색이잖아요. 백자의 흰색도 그냥 흰색이 아니죠.” 

 

 

Suh Seung-Won, ‘Simultaneity 19-952’, 2019, Acrylic on canvas, 162×130.3cm,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농익어가는 감성의 세계

2000년대에 접어들며 서승원 작가의 화풍은 또다시 변모한다. 오랜 세월 유지해온 기하학적 구조가 해체된 것. 손가락으로 문지른 듯 경계가 불분명한 색채만이 오직 화폭에 남았다. “형태의 해체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스스로를 성찰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생긴 변화예요. 기하학 형태의 논리적인 세계에서 감성의 세계로 넘어간 거죠.” 작가는 최근 작품을 설명할 때 장에 빗대 감성이 익었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그의 근작을 찬찬히 살피니 늘 널찍하게 차지했던 여백이 현저히 줄어든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자리에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스며든 색채는 잘 발효된 음식에서 느껴지는 톡 쏘는 맛처럼 한층 청아하고 맑아졌다. 
인터뷰 말미, 기하학 형태를 해체시킨 인과관계를 더욱 세밀하게 분석하려 하자 작가는 말했다. “기술이 아닌 예술에 대해 말할 땐 발전이란 단어를 쓰지 않잖아요. 변화했다고 하지. 제 작품 세계의 변곡 과정 역시 한국의 얼과 혼을 평생 동안 좇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뤄진 거예요.” 장이 익는 건 자연의 힘으로 맛을 내는 과정이다. 서승원 화백이 ‘익는다’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듯했다. 

 

 

한국적 색채의 미학

앵포르멜 시기를 거치며 국내 추상회화 작가들은 우리의 정신이 깃든 독자적인 작품을 선보이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여러 가지 방법론을 통해 한국적 추상회화를 구현한 거장의 작품 중 한민족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색채로 물든 작품을 모았다.  

 

Park Seo-bo, ‘Ecriture (描法) No. 060910-08’, 2006,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162×195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박서보 스튜디오

Park Seo-bo, ‘Ecriture (描法) No. 120715, 2012,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131×200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박서보 스튜디오

 

박서보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에 반하는 자연의 색

아흔을 넘긴 나이에도 지치지 않고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박서보 작가의 작품 세계는 수십 년을 지속해온 ‘묘법’ 연작으로 대표된다. 비워냄을 몸소 실천한 1970년대의 초기(연필) 묘법을 시작으로 닥종이의 물성을 극대화한 1980년대의 중기(지그재그) 묘법, 그리고 2000년대부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후기(색채) 묘법으로 그 역사가 이어진다. 특히 박서보 작가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떠올리는 후기 묘법 연작은 흰색과 흑연의 색만 남긴 초기 묘법과 달리 풍성한 색감이 도드라진다. 공기색, 벚꽃색, 유채꽃색 등 자연의 색을 화폭에 펼쳐낸 이 연작은 ‘주체와 대상’, ‘인간과 자연’ 등을 대립항으로 보는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도전한다. 동시에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동양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그의 후기 묘법 연작은 10월 31일까지 국제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다. 

 

 

(왼쪽부터) Kwon Young-woo, ‘Untitled’, 1984, Gouache, Chinese ink on Korean paper, 259×162cm, Courtesy of the artist’s estate and Kukje Gallery, Yun Hyong-keun, ‘Burnt Umber & Ultramarine Blue’, 1990, Oil on linen, 207.7×80 cm, ⓒ Yun Seong-ryeol Courtesy of PKM Gallery

 

 

권영우

흰색에 담긴 민족의 얼

종이의 변주를 끝없이 화폭에 펼쳐낸 권영우 작가. 흰 한지를 자르고, 찢고, 뚫고, 붙이는 행위를 반복해 완성한 그의 작품은 ‘백색화’라고도 일컬어진다. 단어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작품 세계에서 하얀색은 빼놓을 수 없는데, 이는 서양의 캔버스나 도화지와는 다른 백색이다. 특유의 미색이 감도는 한지의 흰색에는 ‘백의민족’이라 부르는 한민족의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구아슈와 먹이 종이의 찢긴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면서 화면을 구성한 한지 채색 회화 ‘Untitled(1984)’에서는 한지의 섬세한 질감과 함께 한국적 흰색의 미감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지난 5월 파리 퐁피두 센터는 이 작품을 영구 소장한다고 밝혔다. 

 

윤형근

먹을 닮은 묘한 검은빛 

윤형근 작가는 생전 자신의 작품을 ‘잔소리를 싹 빼고 지른 외마디 비명’이라고 표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면포나 마포에 검은 물감을 반듯하게 내려 그은 그의 대표 연작 ‘Burnt Umber & Ultramarine Blue’의 화면 구성은 더없이 간결하다. 그럼에도 쉽사리 작품에서 시선을 뗄 수 없는데 아마 일반적인 흑색과는 다른 오묘한 검은 빛깔 때문일 것이다. 그의 전속 갤러리인 PKM갤러리는 “윤형근 작가가 30여 년 넘게 사용한 이 색은 흙의 다색과 하늘의 청색을 혼합해 만든 고유한 색채로 보는 이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고 말했다. 얼핏 보면 수묵화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실제 그는 평소 존경하던 추사 김정희의 붓글씨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COOPERATION PKM갤러리, 이미지 제공 PKM갤러리(윤형근), 국제갤러리(권영우, 박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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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 양혜연PHOTO : 임한수(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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