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가보지 않은 곳,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상대적 욕망을 품은 채 살아간다. 일찍이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슈트를 갈망한 여성 심리나 반대로 남자가 치마를 입고 싶어 하는 욕망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어쩌면 남자들이 으레 말하는 자신의 이상형이 ‘원피스 입은 긴 생머리의 가녀린 여자’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일 테다.

올겨울 런웨이에 불어온 유니섹스 바람 또한 전혀 낯설지 않다. 여성 컬렉션에는 남자 모델이 심심찮게 등장한다(하물며 구찌, 지방시의 캣워크를 걷는 모델의 성비는 거의 비슷하기까지). 플로럴 자수를 수놓은 셔츠나 엠브로이더리 코트를 입은 구찌 컬렉션의 남자 모델을 보고 있노라면 ‘이 룩이 정말 남성복이 맞는 건가?’라는 착각마저 들 정도다. 심지어 더 예뻐 보이기도.

발렌시아가는 허리가 잘록한 프린세스 라인과 다트를 접목한 재킷(아무리 봐도 롱&린 실루엣을 갈망하는 여성용 재킷으로 보인다)을 남성 모델에게 입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뿐만 아니라 스텔라 매카트니와 르메르의 오버사이즈 실루엣(어깨가 과장된) 코트와 로에베, 포츠 1961의 팬츠 슈트를 보면 성의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매니시하다.

그렇다면 맨즈 컬렉션은 어떨까? 가장 많이 회자된 스타일은 바로 ‘치마 입은 남자’. 특히 이번 시즌에는 생물학적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지울 신선한 룩이 맨즈 컬렉션에 대거 등장했다. 치마에 대한 애착을 런웨이에서 가감 없이 보여준 언더커버와 요지 야마모토, 꼼데가르송 그리고 톰 브라운이 특히 그랬다. 이 브랜드들은 나름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대놓고 바지 위에 치마를 레이어드했다는 점. 단, 아우터와 같은 컬러와 패턴을 십분 활용해 치마를 세련되게 믹스 매치한 점이 돋보인다. 반대로 ‘치마 같지 않은 치마(?)’를 자연스럽게 레이어드한 브랜드도 있다. 알렉산더 매퀸의 사라 버튼은 마치 블랭킷처럼 보이는 브라운 체크 패턴 롱 코트를 허리에 묶어 마치 바지 위에 맥시 스커트를 입은 것처럼 보이는 세련된 스타일링 기지를 발휘했다. 또 베트멍이 보여준 스커트 레이어드 룩도 마찬가지. 다양한 컬러와 소재의 천 조각을 이어 붙인 치마를 티셔츠 아래 겹쳐 입어 캐주얼한 스타일 연출에 성공했다. 디자이너들이 치마는 더이상 여성에게 국한된 옷이 아니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맨다리(?)에 치마를 입은 남자를 보고 있노라면 국내 정서나 사회 풍조상 아직 약간의 거부감이 남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시즌 남성 치마 룩은 패션업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은근히 남자가 입는 치마에 회의적이었던 에디터의 보수적인 생각마저 단번에 지워버렸다. 평소 패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남성이라면 누구나 거부감 없이 입을 수 있는 ‘치마 룩’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번 시즌 맨즈 컬렉션은 젠더리스를 제대로 표방한다. 다른 성에 대한 갈망은 인간 본연에 내재한 심리로 일찍이 패션사에서 숱하게 언급된 주제다. 그렇다면 패션에서 성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점은 언제일까? 남녀 불평등이 심했던 20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가보자. 페미닌한 드레스가 사교계를 점령한 시절, 코코 샤넬은 본인이 직접 모델이 되어 스리피스 슈트에 보울러 모자를 착용하고, 테일러링을 더한 남성용 승마복을 입는 과감함을 선보였다. 그뿐이 아니다. 남성 노동자의 의복에나 사용하던 패치 포켓을 여성 의복에 도입하기도 했다. 또 퀼팅 기법을 백 디자인에 적용한 점은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가히 혁명과도 같았다.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그동안 오롯이 남성의 의복이자 전유물로만 여겨진 팬츠슈트를 여성이 입기 시작한 건 패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아는 사실. 특히 ‘르 스모킹(Le Smoking)’을 발표해 여성 또한 슈트를 자유자재로 입게끔 해준 이브생 로랑(현재는 생로랑으로 명명한다)은 당시 시대의 총아였다. 스모킹 슈트란 사교모임에서 남성들이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나눌 때 입은 옷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용어. 여성을 위한 옷으로 변모시켜 발표한 르 스모킹은 말 그대로 여성의 해방이라는 의미를 단번에 소환한다.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여성용 턱시도를 ‘이브’라고 부르며 그의 선구적 시도를 기억한다.

반대로 남성이 치마를 입기 시작한 건 이보다 훨씬 더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베르사유와 트리아농 궁에 전시된 고대 그리스의 유물 중 ‘토가티(토가를 입은 남자)’라는 대리석 조각상은 기원전 치마를 입은 남성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예다. 어쩌면 ‘유니섹스’나 ‘젠더리스’라는 용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절부터 트렌드로 이어져온 것일지도 모른다.

무려 한 세기를 넘어 돌고 돌아 진화한 유니섹스 룩은 2019년 지금, 가장 세련된 패션하우스와 디자이너의 손길을 덧입어 다시 트렌드의 정점에 올랐다. 지난해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한 여성 운동의 흐름이나 성 소수자를 배려해 나타난 사회적 풍조일지도 모른다. 물론 패션 브랜드가 내놓은 명민한 마케팅의 일환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중요한 건 늘 트렌드를 앞서가는 패션업계에서 올겨울 유니섹스에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대중에게는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창의적인 작업의 기본이죠.” 버버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리카르도 티시도 말했듯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유니섹스’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영민한 자세가 아닐는지. 알렉산더 매퀸의 맨즈 컬렉션 스커트와 스텔라 매카트니 팬츠 슈트에 날렵한 스틸레토 힐을 신어도 좋고, 요지 야마모토의 올 블랙 스커트 룩으로 캐주얼한 유니섹스 룩을 연출해도 무방하다. 여성과 남성 컬렉션의 간극이 없다라는 게 이번 시즌 트렌드 중 하나니까. 어떻게 스타일링하면 좋다라는 규정 또한 없다. 각자의 방법으로 격변하는 패션계의 흐름을 자기화해 개성넘치는 스타일링의 일환으로 즐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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