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잠들지 않는 낭만주의자

시를, 시인을 칭송할 생각은 없다. 비록 여기저기서 읽히는 시가 아닐지언정, 그들은 여전히 지우고 또 쓴다. 모호한 행간에 마음을 숨긴 채, 삶을 노래하는 진정한 이 시대의 낭만주의자들을 소환했다. 가을의 이름을 부르는 6권의 시집 속에.

2018.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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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문학동네시인선 100호를 기념한 티저 시집이다. 티저 포스터는 익숙하지만 티저 시집은 낯설다. 앞으로 문학동네시인선을 통해 선보일 시인을 미리 보여주겠다는 취지다. 영화의 예고편처럼. 장석주, 이병률, 김언, 문태준, 구현우, 박세미 등 시인 50명이 각각 시 두 편을 선보인다. 40년이 훌쩍 넘는 구력의 시인과 첫 시집을 펴낼 시인이 한자리에 모이니 이런 만찬이 따로 없다.  문학동네 펴냄.

 

가을 나무_이병률  
뭔가를 정하고 싶을 때나 
뭔가를 정할 수 없을 때 
나뭇잎의 방향을 보라 
(중략) 
새가 열매를 물고 날아가는 그쪽 방향을 보라 
나뭇가지에 열매를 매다는 것에도 할 말이 있으니 
가을 한 철의 그리움들은 힘을 놓고 
끊어진 힘들은 다시 어느 한곳에 모여 
나무로 자랄 것이니 
(중략) 
그러니 기차가 떠나버렸거나 
기다리는 사람이 오지 않을 때에는 
겨울 할아버지 앞으로 몰려가 수북이 질문을 하는 
나뭇잎의 흩어지는 방향을 보라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윤동주 외
백석, 정지용, 라이너 마리아 릴케, 프랑시스 잠, 이즈미 시키부 등 내로라할 시인 16명의 작품을 한곳에 모은 시화집이다. 시와 앙상블을 이룬 그림은 인상주의의 창시자로 불리는 카미유 피사로. 빛과 색으로 물든 그의 화폭과 가을바람을 닮은 16인의 시가 풍경처럼 흐른다. 시집의 사이즈도 작고 얇아 휴대하기도 편하다. 미니 백에 쏙 넣어두었다가 공원 벤치의 바람과 함께 슬쩍 꺼내도 좋겠다. 카미유의 그림 속에도 완연한 가을이 찾아왔으니. 저녁달 펴냄. 

 

이것은 인간의 위대한 일들이니_프랑시스 잠
이것은 인간의 위대한 일들이니 
나무병에 우유를 담는 일, 
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 밀 이삭들을 따는 일, 
신선한 오리나무 옆에서 암소들을 지키는 일, 
숲의 자작나무들을 베는 일 
(중략) 
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만드는 일, 
정원에 양배추와 마늘을 심는 일, 
그리고 따뜻한 달걀을 거두어들이는 일. 

 

 

 

산다고 애쓰는 사람에게  김재진
그의 말마따나 시는 노래다. 노래는 결코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느끼고 공유할 뿐. 그간 써내려온 김재진의 시와 산문집은 ‘위로’라는 말로 귀결된다. 이 시집은 시인이 어머니를 떠나보낸 뒤 슬픔과 고요 속에 써내려간 시로, 슬픔에 다친 그와, 우리 모두를 위로한다.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힌다. 일상을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사람이라면. 수오서재 펴냄.   

 

단순한 삶_김재진
단순하게 살기로 한 이튿날 
단순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단순한 삶은 어려운가. 
불화(不和)를 끌어당겨 웅덩이 파는 
도도한 삽날이 어디 있어서 
단순한 날짜 앞에 매복하는가.
저 비 그치고 나면 산을 눕힐 
엄동의 기운이 낮은 포복하고 
강 위를 떠다니는 젖은 안개가 
미등도 켜지 않은 삶의 후미를 
차가운 손 뻗어 가려놓는다.
단순한 삶은 가려진 삶이 아니다. 
단순한 삶은 매복하는 삶이 아니다. 
삽날에 찍힌 채 속살을 드러낸
단순한 삶은 붉은 흙 같은 삶이다.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유희경 
그는 영영 모를 테지만 <오늘 아침 단어> 때부터 그의 팬이었다. 가을 문턱에 출간된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은 그 이후 유희경이 쓰고 고친 시 66편을 담았다. 평론가 김나영은 유희경의 시집을 읽는 
방법 하나를 건넸는데, 제목을 오래 바라보고 그것을 이루는 단어의 의미와 그 의미가 연달아 놓임 으로써 새롭게 만들어내는 의미를 오래 곱씹고 마치지 않은 말의 다음을 상상하라는 것. 문학과지성사 펴냄.

 

작은 일들_유희경
연못인 줄만 알았다
볕이었다 
볕이었는데
여름이었다
(중략) 
못을 이루고 이루다 말고 
녹은 제 속을 비단잉어 떼처럼 
빨갛게 하얗게 노랗게 
빙글빙글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미끄러지는 것과 같이 
나는 자리를 옮기며
남은 일 년은 어쩌나
걱정을 하기로 하였다
맨발 둘을 연못에 담가놓는 사람처럼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어떤 작정이 없다면 사람은
금방 슬퍼지고 만다
고작 덥네 더워 여름이네 여름
하면서 그렇게 부끄러운 일만 
잔뜩 떠올리면서 

 

 

 

울지도 못했다  김중식
그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혼자 ‘피식’ 웃었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고도 잘 웃지 않는 내가 말이다. 왜 웃음이 났는지 순순히 알려주고 싶지는 않다. 부디 이 시집을 읽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으니. 시인 김중식, 그는 유머를 아는 사람이다. 물론 블랙유머다. 날카롭고, 누구보다 비판적이며, 하물며 욕설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데 결코 거북하지 않다. 오히려 피식 웃음이 난다. 힘이 난다. 올가을 그의 시집을 곱씹을 참이다. 문학과지성사 펴냄. 

 

도요새에 관한 명상_김중식
먹고살기 어려운 거지만 
시베리아에서 뉴질랜드까지 
얼굴이 반쪽 되도록 태평양을 세로지르는 도요새
먹고사는 게 최고 존엄 맞지만
멀리 가봐야 노동이고
높이 날아봐야 생계이므로
어지간하면 퍼질러 앉겠구만, 
물과 뭍의 경계
드나드는 파도 틈새에서 
하품하는 먹잇감을 노리는 도요새
평화는 생사가 갈린 이후 잠시 반짝이는 적막이다. 
먼 곳에서도 다른 세상 없는데 
새 대가리 일념으로 태평양 종단하는 도요새 
산다는 건 마지막이므로 
살자, 
살아보자, 
다시 태어나지 않으리니.

 

 

 

가슴에서 사슴까지  김중일
요즘 시의 트렌드인가? 함축된 몇 줄의 시가 흔히 우리가 아는 시의 형태(?)였다면, 근래에 나온 시집은 꽤 긴 형태다. 시보다는 극히 짧은 산문을 보는 듯하달까? 3년 만에 펴낸 김중일의 신작에 등장하는 시 역시 그렇다. 산문적 감수성과 다채로운 비유, 김중일 시의 특징은 그곳에 맞닿아 있으니. 부조리한 세계의 사각지대와 비극적인 삶의 풍경이 그의 진지한 언어로 담담히 펼쳐진다. 확실한 건, 첫 날은 잘 읽히지 않았고, 며칠 후엔 너무 잘 읽혔다. 창비 펴냄. 

 

옛날에는 시라는 것이_김중일  
네가 태어나기 전 옛날 옛적엔 시라는 것이 있었어.
놀랍게도 시들을 한권에 모아놓은 시집이란 것이 있었어.
시집을 읽다가 보면 반드시 불타는 페이지 한장을 만나지.
딱 한장을 만나지. 
(중략) 
내겐 진짜 시가 쓰여진 페이지. 내가 죽어도 읽지 
못한 페이지를 지금 이 순간 하품을 틀어막으며 읽는 사람.
내가 무념무상 넘긴 페이지를 눈에 불을 켜도 읽지 못한 사람.
우리가 못 읽는 페이지가 같았다면 우린 멸종했겠지.
못 읽는 페이지가 달라서 늘 
저마다 자기가 가장 고독하고 외롭지.
(중략)
내가 못 읽은 페이지를 너에게,
나도 모르게 내 비밀을 들킨 것처럼 부끄럽고 두렵지.
그렇다고 돌아서지도 못하고 참지도 못하는 우리는
자신이 읽은 모든 페이지를 그냥 다 찢어버리듯,
아무도 모른 채 사랑에 빠져버리지.
그렇게 네가 간절히 찾던 너의 불타는 페이지는
내가 찢고, 너는 나를 찢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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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 설미현PHOTO : 김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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