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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힘

작고 연약한 연필 하나로 완성한 세계. 친숙하지만 낯선 이 세계는 그 어떤 화려한 유화보다 강렬하고 깊은 여운을 남긴다. 연필의 강약, 농도, 밀도 속에 깃든 말간 아름다움. 쨍한 여름, 작은 연필이 건네는 담백하고 맑은 여유를 만났다.

2018.07.13

문성식, 별과 소쩍새 그리고 내 할머니, Stars, a Scope Owl and My Grandmother, 2007, Pencil on Paper, 48.5×106cm, Courtesy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삶 을  그 리 는  연 필
문성식
그의 드로잉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따뜻함으로 다가온다. 문성식, 그는 자신의 기억의 경험, 주변의 풍경을 사실적이고 섬세한 필치로 묘사한다. 무심코 지나치는 평범한 일상사. 작고 연약한 연필은 소소한 일상을 가장 간결하게 기술할 수 있는 최적의 재료가 아니었을까. 대표작 ‘별과 소쩍새 그리고 내 할머니’는 어느 여름날 병으로 돌아가신 할머니의 초상을, 고향집인 김천에서 치른 작가의 경험을 담고 있다. 그날의 슬픔과 그리움, 초상집의 분주함, 그리고 작가에게 다가온 하루의 심경이 시처럼 펼쳐진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들의 살림살이와 몸부림에 대한 처연함과 가련함. 그는 드로잉을 통해 진창 같은 세상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결을 찾아낸다. 연필은 그 결을 찾아가는 가장 진솔한 도구일 터다. 그의 고민만큼 짧아진 몽당연필도 작품과 함께 슬쩍 불러들였다. 

 

 

김은주, 가만히 꽃을 그려보다, 2017, 종이에 연필, 103.5×83.5cm, 이미지 제공 갤러리 룩스

 

검 은  바 람 과  꽃 을  타 고
김은주

김은주의 곁에는 늘 연필이 있었다. 자그마치 30여 년이다. 연필이라는 소박한 재료 하나만으로 경이로운 화면을 만들어온 김은주. 흰 바탕에 성실히 쌓아 올린 수천, 수만 개의 연필 선은 인간 군상, 파도, 바람, 꽃 등의 검은 형상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것은 소재에 따라 강한 에너지를, 때로는 섬세한 감정을 품어낸다. 이 검은 형상은 마냥 검기만 한 것은 아니다. 조명의 밝기와 각도, 그리고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서 검은 빛깔은 율동감을 갖는다. 어느 날엔 바람이 불고, 또 어느 날엔 섬세한 꽃이 피어난다. 6월 26일부터 7월 29일까지 갤러리 룩스에서 펼쳐질 <김은주 개인전_그려보다> 전에서 검은 바람을, 꽃을 바라보기를.

 

 

박서보, Ecriture(描法) No. 89-79-82-83, 1983, Pencil and Oil on Hemp cloth., 194.5× 300cm, Courtesy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박서보, Ecriture(描法) No. 235-85, 1985, Pencil and Oil on Hemp cloth., 65.1×90.9cm, Courtesy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단  하 나 의  묘 법
박서보
그의 이름 앞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60여 년 그의 발자취는 수없이 다양한 실험과 변화의 연속이었다. 박서보, 그의 실험에도 연필이 등장한다. 1970년대 이후 등장한 ‘묘법(描法)’ 연작이다. 그가 스스로 지칭하듯 ‘손의 여행’으로 일컬어지는 묘법은 그의 회화에 정점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으며 국제적인 명성을 불러왔다. 불어의 ‘에크리튀르(Ecriture, 쓰기)’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진 이 그림들은 캔버스에 밝은 회색이나 미색의 물감을 바르고 연필을 이용하여 그 위에 마르기 전에 반복적으로 끊기지 않게 그은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기, 지우기, 반복하기, 의미하기, 의미를 다시 삭제하기 등. 박서보는 가장 간결한 형태의 긋는 행위를 통해 동양 수묵화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드로잉의 본질을 강조하고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그의 긋기는  무엇을 그리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과 하나 되는 명상에 가깝다.

 

 

원석연, 개미, 79×36cm, 1976, 이미지 제공 아트사이드갤러리

 

 

음 과  색,  맥 박 과  울 림
원석연

“연필선에는 음(音)이 있다. 저음이 있고 고음이 울리며 슬픔이 있고 즐거움이 있다. 연필선에는 색(色)이 있다. 색이 있는 곳에는 따스함과 슬픔, 기쁨, 고독이 함께 한다. 연필선에는 리듬이 있고 마무리가 있고 살아 있는 생명 속에서 흐르는 미세한 맥박과 울림을 포착할 수 있다. 연필선에는 시(詩)가 있고 철학이 있다.” 60여 년 동안 오로지 연필 그림만 그린 고 원석연. 연필선의 강약, 농도, 밀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하여 대상의 윤곽, 질감, 양감과 동정(動靜)까지도 표현해낸 그였다.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작품은 ‘개미’ 연작으로, 실물 크기로 정밀하게 그린 수백, 수천 마리의 개미가 떼를 지어 움직이는 모습은 사람들의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발버둥치며 전진하는 개미들의 모습은 엄혹한 현실을 헤쳐 나가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수없는 자기 성찰과 관조를 통해 얻은 맑은 침묵의 화면. 연필이 전하는 울림은 실로 강력하다.

 

 

Salavat Fidai, White Wolf, 2017

 

Salavat Fidai, Famous Landmarks, 2014-2018

 

 

미 니 어 처 의  예 술
살라바트 피다이

러시아 출신의 미니어처 예술가 살라바트 피다이. 원래 법대를 졸업하고 무역 회사에서 20년 이상 근무하던 그는 ‘나는 누구인가, 내 운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자문과 함께 예술가의 길로 들어섰다. 나무, 분필, 식물의 씨앗(호박씨, 해바라기씨, 쌀 등)에서 시작된 조각은 2015년 흑연과 조우한다. ”흑연은 매우 깨지기 쉬운 물질이다. 작업 시 종종 부서지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은 내게 명상의 시간이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짧게는 6시간 길게는 이틀. 작고 연약한 연필심에 조각을 하는 것은 분명 그에게 도전이지만, 작업이 복잡할수록 더 흥분된다고. 만화 영웅, 영화 캐릭터 및 상징, 유명 건물, 기념물 등 다양한 주제가 연필심 위에서 피어난다. 그는 오늘도 가족이 잠든 밤, 남플로리다의 집에서 명상하듯 연필심에 조각을 하고 있을 터. www.salavatfidai.com

 

 

조덕현, 1935, Graphite on Oriental Paper, 582×391cm, 2017, Courtesy of the Artist and PKM Gallery

 

 

시 간 과  공 간 의  서 사
조덕현

연필, 흑연, 콩테만을 사용한 사실적 회화. 조덕현은 근현대 시간 속 개인의 실존과 운명을 조명하고, 지금은 사라져버린 삶, 가족, 역사의 기억을 예리하고도 섬세하게 복원한다. 대표작인 ‘1935’는 1914년에 태어나 20세기 근현대사를 겪다 고독사한 가상 인물 ‘조덕현’의 다양한 삶의 국면을 들추어 시각화한 서사 프로젝트 ‘에픽 상하이’의 일부다. 화면에는 실제 인물과 ‘조덕현’을 포함한 가상 인물, 상하이의 과거와 현재, 영화 세트의 풍경이 뒤섞여 있다.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의 레이어. 그 틈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공존한다. 이 수많은 서사가 오직 연필 하나로 이어지고 묶인다. 그것은 마치 실제와 허구가 뒤엉킨 기묘한 세트장 같다. 

 

 

한진, Innig #1, Pencil on Cotton Paper, 76×57cm, 2016, 이미지 제공 아트사이드 갤러리 

 

 

기 억 의  풍 경
한진

한진 작가의 연필화를 보면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작가는 현실과 마주하며 소재를 발견하고, 공감각적인 기억을 표현함으로써 긴 호흡과 끈기로 마침내 작품을 완성한다. 시각적 재현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풍경과 청각적·시각적 기억으로부터 발현된 풍경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의 풍경에는 장소에 대한 시각적 기록과 함께 그곳에서의 경험, 기억되는 소리와 움직임이 있다. 작가의 연필화에서 소리가 읽힌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청각적, 시각적 기억의 흔적들. 작가는 그 응집된 흔적을 캔버스 위로 밀도 있게 담아낸다. 성실함으로 무장한 붓질과 즉흥적이면서 반복적인 표현, 물성이 주는 우연한 효과. 얼핏 단순한 풍경 같지만 삶과 기억이 농축된 가장 풍만한 연필화인 것이다. 

 

 

 

 

더네이버, 미술작품, 연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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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S 연필의 힘,연필화,미술 작품,그림

CREDIT Editor 설미현 Photo 김도윤 출처 THE NEIGHB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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