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나는 왜 술을 마실까?

내놓고 왁자지껄 술을 좋아하던 시대가 저물어가는 듯한 느낌은 나만의 것인가?

201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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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이틀에 한 번꼴로 마시는 술, 그게 왜 좋은지 설명을 못 하다니. 아니, 반대로 왜 좋은지 설명도 못 하면서 이틀에 한 번꼴로 마시고 있다니.

엊그제부터 청탁받은 대로‘술 예찬을 해보겠다고 맘먹고 노트북을 열었다. 근데 자꾸 머리가 겉돈다. 한 시간, 두 시간, 반나절, 그러다 날이 저물고. 어제 마신 술의 숙취가 남아서 그래. 내일 맑은 정신에, 숙취 사라지고 다시 술 고파지면 잘 써지겠지. 다음 날. 또 머리가 겉돈다. 술은 당기는데 술을 예찬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안 써지니까 더 당긴다. 마침 저녁에 술 약속이 있다. 콱 마시고, 내일 술기운으로 쓰자. 술 마시는데 친구가 그런다.“툭하면 술 끊어야지 하는 놈이 무슨 술 예찬이냐.”“내가 언제 술 끊는다 그랬냐.”“아이고, 이 친구야! 너 취했냐?”또 다음 날. 술기운이, 숙취가 잔뜩 남았다. 주량도 약해지고, 마시고 나면 빌빌대고…. 왜 쓴다고 했을까. 그랬지. 거부할 명분이 없었지. 술 좋아하는 건 사실이고, 술에 관해 책도 썼고, 한때‘애주가’라는 직함까지 썼으니…. 쓰자.

술이 왜 좋냐고? 사실, 진짜 좋은 건 이유를 모르지 않나. 맛있는 게 왜 좋을까? 예쁜 여자가 왜 좋지? 말하기 힘든 것 아닌가. 다만 가끔 싫을 때가 있을 거고. 맛있는 게 물려서 그냥 담백한 것 먹고 싶을 때가 있고, 심술이든 삐짐이든 예쁜 여자가 미울 때도 있고, 술도 지금 같으면 숙취 땜에 싫고. 하지만, 내일이면 또 좋아할 걸 알아서 싫다고 함부로 말 안 하고. 그런 거 아닌가. 아니야. 그보다 뭘 멋있게 말하려면 그 대상과 나 사이에 거리감이나 장애물이 있어야 한다. 애인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보고 싶은 마음을 멋지게 노래하는 거지, 맨날 붙어있으면 그렇게 안 된다. 그런데 술과 나 사이엔 거리감과 장애물이 없다. 집에도 술이 많고, 내가 사는 건물 1층 편의점에 술이 널렸다. 만약 금주령이 내려졌거나, 내가 병원에 누워 술을 못 먹게 됐다거나, 전쟁이나 천재지변으로 술이 매우 귀해졌거나, 그러면 술에 대한 시적 표현이 줄줄이 떠오를 텐데….

 


 

 

 

4~5년 전 술에 대한 책을 내고 인터뷰할 때, 
 “술이 뭐냐?”고 물으면 영국의 비평가 올더스 헉슬리의 이 말을 인용했다.“단지 타락해서 인간이 술을 좇는 것이 아닙니다. 알코올은 가난하고 문맹인 이들을 문학과 심포니 콘서트가 열리는 곳으로 데려갑니다.”술이 주는 고양감이 확실히 있다. 갑자기 세상이 다 용서가 되고, 꼴 보기 싫던 놈이 궁금해지고, 미추의 구분에 관대해지거나 아주 날카로워지고, 예술적 영감과 표현이 마구 떠오르는 마법 같은 순간을 술이 불러온다. 그래. 이렇게 예찬하면 되잖아. 그런데…. 전에는 그 마법 같은 순간이(속된 표현으로‘그분’이) 자주 왔는데, 언제부턴가 가뭄에 콩 나듯 온다. 그래도 한번 마시기 시작하면 정량은 채워야 해서 그분이 오든 안 오든 마신다. 결국 그분은 안 오고, 다음 날 숙취가 심하게 온다. 또 어쩌다 그분이 찾아와도 예전처럼 순정하지 않다. 평소에 안 좋아하던 이에게‘우린 친구’어쩌고 했다가 나중에 후회하고,‘이런 표현 멋있잖아’해서 적어놓고 다음 날 술 깨서 보면 건질 것 하나도 없고…. 만약 누가 내게‘나에게 술이란?’하고 묻는다면? 지금 떠오르는 건 공기, 밥, 생필품, 뭐 이런 거다.

내가 술을 좋아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술을 좋아하는 태도는 예전과 달라졌다. 전에는 내놓고 떠들면서 좋아했는데, 언제부턴가 안 그러고 또 안 그러려고 한다. 멋쩍고 열없다. 나뿐 아니라 시대가 그렇다. 내가 전에 술에 관해 쓴 글들을 다시 보다가 이런 표현이 눈에 띄었다.‘취중기행(醉中奇行)이 무용담이 되지 못하는 시대.’전에는 남에게 큰 피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취중기행이 곧 무용담이었다. 방에 커튼 쳐놓고 술 마시다가 깨보니 몇 날이 지나 있더라, 육교 위에서 오바이트를 참지 못하고 뿜었더니 밑에 지나가는 차들이 와이퍼를 켜더라, 술만 취하면 남자와 딥 키스를 하는 남자 소설가가 사돈 될 사람과의 상견례에서도 그랬다더라, 유신 독재 말기에 통금을 피해 아무 데나 들어가 자다가 추워서 나무 문짝을 뜯어 불을 지폈는데 그게 남대문이어서 문화재관리법 위반으로 구류를 살았다더라…. 좀 더 소소하게, 술 먹고 다친 이야기, 아스팔트가 일어선 이야기, 음주 단속에 걸리거나 피해간 이야기 같은 것도 무용담으로 여겨졌다. 자랑스럽게 떠들었고, 들은 이는 다른 이에게 옮겼다. 그때는 잔치가 치러진다는 느낌이 있었다. 공동체의 잔치. 작은 술자리도 큰 잔치의 일부인 것 같고, 그래서 서로 모르더라도 술꾼들의 문화에 막연한 유대감이 있었던 것 같다. 모두가 내놓고 떠들면서 술을 좋아하고, 술을 마셨다. 

언제부턴가 많은 것이 달라졌다. 정치 탓인지, 경제 탓인지, 문화 탓인지 아무튼 ‘큰 잔치’의 유대감이 사라진 것 같다. 취중기행은 그냥 추태로 분류되고 만다. 내놓고 왁자지껄 술을 좋아하던 시대가 저물어가는 듯한 느낌은 나만의 것인가?

나는 술을 좋아하지만 그 사실이 별로 자랑스럽지 않다. 술 마시는 재미로 살고, 술 마시려고 돈 버는 것 같은데, 그렇더라도 그런 말을 공공연히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인생이 정말 그렇게 될까 싶어서가 아니라(이미 그렇고, 앞으로도 그래도 괜찮지만), 인생에 대해 경솔한 태도가 아닐까 싶어서다. 어쩌면 굳이 그렇게 말할 필요도 없을 거다. 그렇게 될 거면 그렇게 될 테니까. 그러니까 술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설명하기 이전에, 그 많은 나쁜 점에도 불구하고 그냥 좋은 거다. 나이 들면서, 사는 데 대단한 재미를 기대해선 안 될 것 같은 생각을 한다. 심심함에 관대해져야 할 것 같다. 술도 그렇게 심심하게 마셔야 할 것 같다.


about 한겨레신문 기자를 거쳐 문화평론가로 활동하는 임범을 빼고 서울에서 술꾼을 논할 순 없다. 성석제, 홍상수, 문소리, 공지영 등 이 도시의 내로라하는 술꾼과의 인터뷰를 엮은 <내가 만난 술꾼>, 애주가의 교양서 <술꾼의 품격> 등을 썼다. 

 

 By Lim Bum

CREDIT

EDITOR : 류진PHOTO : 일러스트 이승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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