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TV를 통해 국민 앞에 불현듯 나타났다. 5·16군사정변 당시 육군사관학교 생도를 규합하여 지지 행진을 벌이면서 정치 군인으로서 첫걸음을 내디뎠고, 이미 군부 내에서는 실세로 통하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존재감을 알린 것은 1979년 10월 27일 바로 ‘그날’의 일이었다. 육군 소장 전두환. 그는 그렇게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본부장 자격으로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굳은 표정으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하는 전두환의 모습을 TV로 지켜보며, 적잖은 국민은 박정희의 자리에 그가 앉을 것임을 예감하고 전율했다.

정권을 잡은 전두환, 그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진압한 원죄를 짊어지고 있었다. 정식으로 대통령 선거를 거치지 않았다는 절차적 하자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대한민국은 대통령 직선제를 다시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해 12월 치러진 대선은 야권의 분열로 인해 전두환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인 노태우의 당선으로 이어졌으나, 두 개의 야당은 총선에서 각개 약진해 의석 수에서 여당을 압도하는 결과를 얻어냈다.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 이로써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졌다. 이른바 ‘5공 청문회’가 열린 것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및 ‘제5공화국 비리조사 특별위원회’, 일명 ‘5공 청문회’가 열린 것은 1988년 11월. TV는 또 한 사람의 정치인을 스타로 만들었다. 통일민주당 총수 김영삼이 발탁한 초선 의원 노무현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의 말투는 거칠고 투박했지만 말 속에 담긴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력으로 진압한 전두환과 측근들의 논리적 허점을 찌르고, 5공 세력의 윤리적 파탄을 거침없이 폭로했다.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어쨌든 그 책임자를 국회에 불러놓고 청문회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를 TV로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증인으로 소환된 전두환이 야당 의원들의 질문에 시종일관 묵비권을 행사하다 퇴장했는데, 그가 청문회장을 나간 후 노무현은 자신의 명패를 바닥에 내던지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것이 바로‘청문회 스타’ 노무현을 낳은 결정적 장면이었다.

세월이 흘러 1997년, 김대중과 그의 참모들은 네 번째 대선 도전을 앞두고 있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TV 광고를 활용했다. 힙합 그룹 DJ DOC의 노래 ‘DOC와 춤을’을 개사해 선거 송(song)을 만들었다. “김대중과 함께라면 든든해요, 경제 통일 책임질 수 있어요.” 선거 전날 밤 방송된 이 노래는 그 자체로 문화 충격이었다. 김대중은 선거에서 승리하고 우리나라 정치 역사상 최초로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루어냈다.

1979년 10월, 1988년 11월에 이어 1997년 12월은 그렇게 TV와 정치가 관계 맺는 방식을 새롭게 정의했다. 전두환에게 TV란 밀실에서 얻은 권력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도구였다. 노무현은 TV를 통해 생중계되는 청문회의 힘으로 자신의 남다른 카리스마와 명철함 그리고 대중 흡인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반면 오랜 세월 ‘빨갱이’로 몰리던 김대중에게 TV란 대중에게 각인되었던 자신의 이미지를 재정의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였다. 이전까지 그는 대규모 군중 집회에서 탁월한 연설 능력을 뽐내는 ‘광장의 정치인’이었지만, 정치라는 게임의 룰이 달라졌음을 누구보다 빨리 파악하고 적응했다. 신나는 대중가요에 맞춰 어깨춤을 추며 웃는 모습을 안방극장에 보여줌으로써 결국 대선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때부터 말하자면 ‘TV 적합성’이 굉장히 중요한 정치적 능력으로 자리매김했다.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 당내 경선을 뚫고 대선 후보가 되는 이변을 연출했는데, 그 과정이 TV를 통해 생중계되며 다시 한 번 한 편의 정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그는 기타를 치며 애창곡 ‘상록수’를 부르는 대선 광고를 TV에 내보내 또 다른 차원의 감성 정치를 선보였다.

사람들은 TV 화면을 눈으로 보지만 동시에 ‘촉각적’으로 느낀다. 정치인들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노무현이 기타를 쳤고 선거에서 이겼다. 그렇다면 이후의 대선 광고는 어찌해야 하는가? 유명 광고인과 에이전시가 정치권의 주요 플레이어로 개입하면서 ‘감각의 정치’는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갔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밥 먹는 광고’로 화제를 모았고,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는 대학가를 돌아다니며 청춘 콘서트로 인기몰이를 한 후 토크 예능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하며 일약 대선 주자급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광고에는 그의 얼굴에 남은 흉터가 등장했다. 유권자들에게 사밀(私密)하게 다가가는 것, 그것이 미디어 정치의 기본을 이루는 것이다. 심지어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도 정치는 언제나 지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인 이유로 움직여왔다. 전서구와 파발이 가장 빠른 통신수단이던 르네상스 시대, 대중의 마음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고 마키아벨리는 경고했다. 그러니 TV가 정치를 감성적으로 바꾸어놓았다는 비난은 초점이 잘못된 것이다. 문제는 정치 그 자체가, TV라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품위를 유지하며 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느냐이기 때문이다.

2016년 벽두, 테러방지법 처리를 지연시키기 위한 야당 국회의원들의 무제한 토론, 이른바 ‘필리버스터’가 열리면서, 한국 정치는 다시 한 번 오래도록 TV 앞에 섰다. 스마트폰의 출현으로 사람들이 어디에서나 TV를 볼 수 있게 된 가운데, 192시간 27분 동안 한 가지 법안의 문제점에 대해 긴 토론을 나누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건이다. ‘감성 매개체로서의 TV’라는 공식에 반례를 던진 것이니 말이다. 앞으로 정치는 과연 어떻게 전개될까? 정치와 TV를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에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TV만으로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여전히 답은 TV 속에 있을 것이다. TV는 정치를 싣고, 오늘도 생방송이다.

about 노정태는 자유기고가다. 격월간 국제정치 전문지 <포린 폴리시>의 한국어판 편집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논객시대>가 있다.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예술, 기술, 전쟁>
by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 윤원화 역
<광학적 미디어>는 르네상스의 투시도법 패널화에서 출발해 사진, 영화, TV 기술, 컴퓨터 그래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미디어를 예술적 미디어, 아날로그 미디어, 디지털 미디어 세 가지로 나눠 소개한다.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책으로, 미디어·테크놀로지·전쟁을 중심으로 다양한 현대 문화를 비평해온 그의 저서 중 독자들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이다. 현실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