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위스 루체른 역의 외관과 꼭 닮은 문화역 서울 284

1995년 8월 15일. 광복 반세기를 맞이한 대한민국 국민의 28%는 TV에서 방영하는 폭파 ‘쇼’를 시청했다. 옛 조선총독부 건물의 옥색 첨탑이 참수당하는 순간 아나운서는 흥분된 목소리로 ‘식민 역사 잔재 청산’을 자축했다. 광화문 앞에 모인 5만여 명의 시민은 환호를 질렀다. 브라운관 밖에서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잘린 첨탑은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져 전시됐다. 유적의 부스러기들은 김포 매립지에 묻혔다.

옛 서울역사 앞에서 이 야만적인 ‘문화재 해체쇼’를 떠올린다. 네거티브 헤리티지(Negative Heritage)가 애물단지로 간주되는 도시에서 조선을 치밀하게 장악하고자 한 일제의 야욕이 고스란히 투영된 오늘의 옛 서울역사는 기적에 가까운 공간이다. 식민지 건축양식의 전형을 띠는 이 건축물은 도쿄대 교수이자 건축가 스카모토 야스시의 작품. 스위스 루체른 역,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역, 도쿄 역사, 헬싱키 중앙 역사, 오사카 중앙공회당을 참조해 설계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도시의 지형적 중심에 존재한다.

2 최초의 양식당 ‘서울역 그릴’의 고풍스러운 문 3 1,2등 대합실, 귀빈실, 2층으로 연결되는 복도 4 앤티크한 조명과 벽지, 커튼이 돋보이는 귀빈 예비실 5 80여 년 전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중앙홀의 스테인드글라스

2004년 KTX 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옛 서울역사는 폐기 처분의 위기를 맞았다. 몇 년간 노숙자의 숙소, 쓰레기 쌓인 폐허로 처절하게 방치돼왔다. 관리 주체인 철도청이 한국철도공사로 바뀌고 소유권이 문화재청으로 이관되는 과정에서 ‘주인 없는 집’으로 전락한 탓이다. 2009년, 보존과 활용을 주장하는 각계의 목소리가 모여 복원 공사가 착수된다. 2011년, 기능을 상실한 기차역 대신 ‘문화역 서울 284’의 시대가 열렸다. 문화역 서울 284는 문화재 보존 정책에 의해 ‘원형 보존’의 규제가 강력히 적용된 공간이다. 1925년 준공 당시 사진 자료에 기초해 중앙홀, 대합실, 계단, 대식당 등의 주요 장소를 100%에 가깝게 살렸다.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 파편까지 그대로 두었다. 과거는 오늘날의 서울역사에 들어서는 순간 곧장 확인된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중앙홀은 매표소와 만남의 장이 있던 공간. 지붕을 떠받치는 12개의 석재 기둥, 햇빛이 비스듬히 드는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 모두 80년 전과 같은 풍경이다. 중앙홀에서 오른쪽으로 난 문은 3등 대합실로 연결된다. ‘조선인’ 전용 대합실이다. 1925년, 서울역 광장으로 직결된 문이 폐쇄된 것만 빼면 역시 옛 모습이 잘 간직돼 있다. 반대편 복도엔 1, 2등 대합실이 위치했다. 일본인을 위한 대기장이었다. 숫자에 걸맞게 청동 기둥과 크리스털 조명, 자카드 벽지 등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건축재로 꾸며놓았다. 1, 2등 대합실을 지나면 ‘기차역’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이 나타난다. 귀빈 예비실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방은 대통령과 총리 등을 수행하는 이들이 머무르거나 귀빈을 위한 식당이었다. 역장실 옆, 가장 깊숙한 안쪽엔 귀빈실이 위치해 있다.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등이 지방 출장 시 기차를 타기 전에 이곳에 머물렀다. 복원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는 이발실과 우리나라 최초의 양식당 ‘서울역 그릴’까지 문화역 서울 284에선 ‘공간’이 그 어떤 전시의 예술 작품보다 흥미로운 볼거리다.

6 조선인들이 머물렀던 3동 대합실 풍경

지금 문화역 서울 284는 대안적이고 실험적인 전시와 공연 등이 열리는 복합문화공간의 역할에 충실하다. 올 10월엔 ‘국제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가 열린다. ‘도시와 타이포그래피’라는 주제로 도시 고유의 언어와 관습,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타이포그래피의 세계를 탐색한다.

건축가 정기용은 옛 서울역사의 가치에 대해 생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옛 서울역사의 이미지를 새 역사 옆에 덧붙여 신축하면서 바뀌어 세대 간에 기억의 단절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렇게 언제까지 서 있을지 모르는 옛 서울역사는 그래도 격동기를 살아온 많은 사람들에게 ‘서울의 관문’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며 한 집단의 기억 속에 보존될 것이다. 그것은 일제의 잔재라는 오명보다 근대 유산이라는 또 다른 가치를 부여받고 서울에 흔치 않은 영혼의 한 조각으로 소임을 다할 것이다.”

옛 서울역사의 의미는 수치로 나타나는 보존율, 활용도에 있지 않다. 박제, 해체를 피한 근대의 유물은 오늘 서울 사람들의 공간과 시간, 기억을 충실히 연결한다.

A 1, Tongil-ro, Jung-gu, Seoul

T 02-3407-3500

W www.seoul284.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