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
궁궐의 중심부엔 ‘편전’이 있다. 왕의 작업실쯤 된다. 조선의 국왕은 이곳에서 나랏일을 보거나 공부를 했다. 왕이 당대의 석학들과 유학의 경서를 학습하고, 국가 정책을 토론하는 자리를 ‘경연’이라고 한다. 조선사에서 가장 많은 경연을 실시한 왕은 영조(1694~1776)다. 재위 기간이 52년이나 되기 때문이다. 약 3500회 열었다고 전해진다. 실질적 ‘공부왕’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1397~1450)이다. 모든 책을 약 100~200번 반복해서 읽었을 정도로 학구파였다.

내정전
왕이 ‘공’적인 일을 치르는 공간이 편전이라면 왕의 사생활이 이뤄지는 공간은 내전이다. 그중 내정전은 왕과 왕비가 사는 침전을 뜻한다. 사생활 공간으로 명명되긴 했지만 조선 왕에게 사실상 사생활은 없었다. 가장 은밀해야 할 성생활과 배설마저 보호와 간섭 아래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왕비 혹은 궁녀와의 잠자리조차 숙직 상궁의 관찰과 조언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쾌락이 절정에 달해도 상궁이 옥체 보존을 위해 ‘그만’을 외치면 멈춰야 했다는 뜻이다.

다섯 끼니
조선 왕은 하루에 다섯 끼니를 먹었다. 아침 두 번, 점심 한 번, 저녁 두 번에 달하는 식사 횟수다. 독상으로 받는 왕의 밥상을 ‘수라’라고 한다. 상 위엔 영양 구조가 완벽한 열두 가지 반찬이 올랐다. 왕의 음식을 준비하는 부엌은 ‘소주방’이라 일컬었다. 2015년 5월, 경복궁은 100년 만에 소주방의 본래 모습을 복원했다. 당시의 식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왕의 침소인 강녕전 옆에 위치했다.

루
왕의 놀이터. 왕가의 휴식과 놀이, 국가의 큰 연회가 이뤄지는 공간으로 2층 규모로 지어졌다. 서울의 궁에서 건축미가 가장 뛰어난 ‘루’는 경복궁 경회루다. 원래는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었던 영역이었는데 지난해 4월부터 10월 사이에 관람객을 위해 빗장을 열었다. 경복궁을 왕의 시선으로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뷰 포인트.

문장
중세 유럽의 영주와 왕가는 고유의 문장이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용포에 수놓은 봉황과 용 말고, 왕가의 문양이 있다. 오얏꽃이다. 자두꽃의 순우리말로 대한제국을 상징한다. 왕을 상징하는 5개의 꽃잎, 성스러운 숫자인 3개의 술이 놓인 형태라 왕가의 꽃으로 채택됐다. 덕수궁 석조전, 정관헌 바깥 기둥 머리, 덕홍전 내부 기둥 등에서 활짝 핀 오얏꽃 문양을 볼 수 있다.

별궁
궁 밖에도 궁이 있다. 별궁과 행궁이다. 별궁은 궁 밖에서 살다가 왕위에 오른 후 입궁하는 왕들의 처소다. 왕 또는 왕세자가 비를 맞이할 때 머무는 궁이기도 하다. 행궁은 왕의 별장 격. 부모와 선조의 왕릉에 다녀오거나 온천에 행차할 때 경유했던 집이다. 참고로 오늘날 온천 휴양지로 유명한 온양은 왕가의 온천 별장, 온궁이었다.

사직단
조선 시대 왕은 하늘이 선택한 신성한 존재다. 신과 인간의 매개자로서 제사장 역할을 했다. 조선의 제례는 세 가지로 나뉜다. 원구단에서는 하늘의 신, 개국 시조에게 제사를 올린다. 종묘에서는 조상에 대한 제사가 행해졌다. 왕조 국가에서 임금의 조상은 곧 백성의 조상이었기 때문에 종묘제례는 가장 격식 있고 중요한 행사였다. 사직단은 땅과 곡식의 신에게 올린 제례가 열리던 곳. 가뭄, 전쟁, 날씨 등 국가의 안위를 결정하는 요소에 대해 정성스럽게 기원을 올렸다.

안내판
지금 서울 5개 궁의 이정표, 궁의 이름과 역사, 정보 등을 표기한 안내판은 치밀한 계획과 전략에 의해 기획된 안내판이다. 문화재청의 주관 아래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 안상수, 건축가 조성룡·승효상, 문화유산 지킴이 NPO ‘아름지기’ 등이 약 4년에 걸쳐 시행했다. 전통 문화재와의 조화 면에서 위계가 분명하며 가감이 필요 없는 간결한 설명, 도시의 미관과 문화재의 미관을 해치지 않는 등의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키는 안내판이다. 서울 5대 궁궐에서 지도 없이도 수월히 산책했다면 이 안내판의 지능적인 배치와 구조 덕.

정원
조선의 왕이 살던 궁엔 독특한 정원이 있다. ‘화계’라는 이름의 ‘계단 정원’이다. 이 꽃 계단은 왕비의 침전, 후궁의 별당 독채 뒤의 언덕에 돌을 쌓아 만들었다. 각 계단에는 사계절의 변화에 맞춘 갖가지 꽃나무를 심었다. 경사지가 많은 창덕궁엔 자연스럽게 꾸며진 화계가 있어 특히 아름답다. 원형을 간직한 창덕궁 대조전 화계가 백미.

창문
궁궐 건축의 아름다움을 관찰하고 싶다면 창문을 눈여겨볼 것. 더위와 추위를 대비한 마루, 온돌 구조 덕에 창문 모양이 독특하고 다양하다. 바깥 출입문의 두껍고 묵직한 판문, 정전의 정교한 창살 등 다채로운 구조미를 만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원형이 잘 남아 있는 곳은 창경궁의 통명전과 숭문당이다. 격자 창살과 수직, 수평 살이 교차한 창살 등 정교한 짜임을 발견할 수 있다.

카페
서울의 궁 안엔 왕의 카페가 있다. 덕수궁의 정관헌은 1900년,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로마네스크 양식과 한식 건축법을 절충해 설계한 근대의 ‘루’다. 미식가로 유명한 고종(1852~1919)이 외빈을 초청해 연회를 열거나 커피와 다과를 곁들여 음악을 감상하던 휴식처였다. 내부 출입이 불가능한 궁궐 내 다른 건축물과 달리 신을 벗고 안에 들어갈 수 있다.

태극정
‘자연을 곁에 둔 삶’은 현대인의 화두다. 잘 살고 있는 삶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조선 왕가는 집 바로 앞에 야생의 자연을 두고 살았다. 한국의 궁궐엔 가장 깊숙한 곳에 세워진 왕가의 침전 바로 앞에 늘 후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중 창덕궁 후원은 산세와 경치가 으뜸으로 꼽힌다. 왕실 가족은 정자를 짓고 자연과 가까이 지냈다. 태극정은 후원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옥류천을 조망하는 정자다. 건축미가 빼어나고 역사적 의미가 깊다.

풍정연
조선 왕가는 술과 음악과 음식이 넘치는 ‘파티’를 사랑했다. ‘풍정연’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이를 축하하기 위해 신하들이 왕에게 물건을 바치던 연회다. 경사가 있을 때마다 조선 왕실은 대왕대비전, 왕대비전에서 풍정연을, 근정전에선 회례연을 열어 축하를 했다. 풍정연은 호화와 사치의 상징이었다. 숙종 13년, 흉년으로 나라의 가세가 기울었을 때 영의정 김수항이 ‘풍정연’을 금하고 명칭을 바꿔 낭비를 줄이도록 청한 역사가 기록돼 있다.

흥청
왕의 색욕은 세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깃거리다. 진시황은 아방궁에 후궁 1만 명을, 당나라 현종은 후궁 4만 명을 두었다. 조선에도 이에 못지않은 정력을 자랑하는 왕이 있다. 연산군이다. 폭군으로 이름 높았던 연산군은 궁궐 안에 기생을 1만 명가량 들였다. ‘흥청’을 만들어 궐 안팎에서 흥청망청 여색을 즐겼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기생 1만 명과 흥청 1만여 곳의 야욕은 비록 ‘흥청’ 만들기에서 실패에 그쳤으나 연산의 정력과 탐색은 세계 어느 왕 못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