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자 6의 서점 긴자 쓰타야 북스는 마치 갤러리처럼 꾸며놓은 곳에서 책을 읽을 수 있다. 

아트북 서점에서도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귀한 책으로 가득한 공간. 

CODE 1. 
COMMUNICATE : 서점의 시대
나는 일종의 출판업계 종사자로서 어느 때부터인지 종이책은 생명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책은 역시 종이를 넘겨야 맛이지!’ 같은 소리는 아날로그를 찬미하는 이들에게도 더 이상 공감을 사지 못할뿐더러 결코 책의 밝은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고백하건대, 매달 종이 잡지를 만드는 잡지쟁이조차 이제는 디지털로 잡지의 콘텐츠를 소비한다. 
내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 사건은 두 달 전, 도쿄 긴자에 갔을 때 일어났다. 그날은 마침 긴자에 가장 큰 복합 쇼핑몰 ‘긴자 6’가 문을 여는 날이었다. 한때 영화를 누린 백화점 대신 다양한 형태의 복합 쇼핑몰이 도시의 흐름을 이끄는 건 전 세계적 추세다. 긴자 6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별다른 환상이나 기대를 하지 않은 이유다. 건물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을 설계한 건축의 대가 다니구치 요시오가, 로고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하라 켄야가 제작했으며, 역시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구사마 야요이가 건물 중앙에 대규모 설치 작품을 내걸었다. 손목시계의 에르메스라 불리는 프랭크 뮬러의 라이프 스토어를 비롯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명품 브랜드는 총집합했다. 이런 화려한 포트폴리오 안에서 사람들의 관심이 밀도 높게 응축된 곳은 6층에 자리한 서점 긴자 쓰타야 북스였다. 높이 6m의 책장, 그리고 책 6만 권. 이곳은 서점이라기보다 책이라는 작품을 정성껏 큐레이팅한 하나의 거대한 갤러리 같았다. ‘Touch Art, Feel Art’라는 기치 아래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없는 예술 서적을 마치 전시의 한 페이지를 구성하듯 보기 좋게 배열했고, 다른 한편에는 실제로 예술 작품을 볼 수 있는 아트 갤러리와 커피나 술을 홀짝이며 책을 보거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스타벅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다양한 소통이 이뤄지는 첨예하고 트렌디한 현장의 중심에는, 곧 생명을 다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던 ‘종이책’이 있었다. 다분히 개인적 행위인 독서가 뜨거운 소통의 장에서 비로소 알을 깨고 나와 한 차원 진화하는 단계를 맞은 걸까. 
서점은 이제 더 이상 책을 파는 공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문화를 팔고 소비하며 소통하고 경험하는 공간으로서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긴자 쓰타야 북스에 앞서 서점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 서점이 긴자에 또 하나 있다. 한 달에 오직 책 한 권만 파는 ‘모리오카 서점’이다. 중고 서점을 운영하던 모리오카 서점 대표 모리오카 요시유키는 신간 기념 이벤트를 개최할 때마다 폭발적으로 몰려드는 독자를 보면서 요상한 콘셉트의 책방을 착안했다. 이벤트 한 번으로 파생하는 커뮤니티와 네트워크, 정보량을 감안하면 책 한 권이 내는 파워는 그보다 더 대단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대체로 비관적이거나 우려 섞인 주변의 시선 속에서 탄생한 모리오카 서점은 결국 보기 좋게 대박이 났다. “산술적으로 서점의 수가 줄고 있는 건 확실해요. 하지만 젊은이들이 새로운 감각을 발휘해 이전에 없던 개성 있는 서점을 꾸준히 만들어가는 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죠. 그것은 비단 대도시뿐 아니라 작은 시골 마을에서도 나타나는 움직임이에요. 그래서 오히려 과거에 없던 서점이 새롭게 각광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다양한 언론이 이런 현상을 집중 조명하고 있고요. 서점은 단지 책을 파는 공간을 넘어 소통의 수단으로도 뛰어난 기능을 하고 있어요. 그런 관점으로 보면 서점은 유효한 틀로서 앞으로 더 탄탄히 자리매김하리라 믿어요.” 모리오카 요시유키는 종이책의 미래에 대해 “조금도 비관적이지 않다”고 단언했다. 
이런 흐름은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서울의 서점과 출판사, 독립 서적 발행인 등 인터뷰를 다룬 아야메 요시노부의 최근 저서 <책의 미래를 찾는 여행: 서울>에 따르면 “서울에는 일주일에 하나꼴로 새로운 책방이 생긴다”고 한다. 고양이 책만 파는 서점, 독서 토론을 전문으로 하는 북카페,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바 같은 형태는 일본에서도 쉽사리 볼 수 없는 것이라고. 책방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양태의 서점은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기보다 오히려 공생 관계로 이해한다. 서로를 갉아먹는 소모전에서 하나둘 도태되어 자취를 감춘 한때의 시절과 확연히 다른 양상이다. 책을 둘러싼 서울의 최전선의 인물을 두루 인터뷰한 아야메 요시노부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급속도로 성장하는 서울의 서점 신에서 책의 미래를 그린다.”

머무는 동안 필연적으로, 때로는 우연처럼 책과 만날 수 있는 공간 지지향. 

책 속에 파묻혀 잠들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 북앤베드.  

태국 코사무이에 위치한 ‘더 라이브러리’라는 이름의 호텔. 

CODE 2.
STAY : 책과 하룻밤
책은 훌륭한 라면 받침이 되기도, 그럴싸한 베개가 되기도 한다. 조금 우습지만 책을 베고 잠드는 보편적 경험은 종이책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바로 ‘북스테이’라는 신개념 숙박 형태다. 
“책을 읽다 어느덧 새벽 2시가 되어 눈꺼풀이 무거워진 경험을 한 적이 있지 않나요? 이곳에는 푹신한 매트리스나 가볍고 따뜻한 깃털 이불은 없지만, 책을 보다 잠드는 기분 좋은 하룻밤이 있습니다.” 2년 전쯤, ‘책과 함께 머물다’는 콘셉트의 게스트하우스 북앤베드 도쿄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도쿄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책으로 빼곡한 서재와 책장 속에 레고 조각을 끼워 넣은 듯 자리한 침대는 한눈에 봐도 편해 보이지 않는다. 한데 도쿄의 힙스터를 포함해 이 도시를 찾는 전 세계 여행자는 이곳에서의 불편한 하룻밤을 예약하기 위해 여러 밤을 기다려야 했다. 아무도 책을 읽지 않고, 사지 않는 이 시대에 도대체 왜? 여전히 속 시원한 해답은 찾지 못했지만, 분명한 건 책과 머무는 북스테이는 일종의 문화 코드가 되었다는 점이다. 북앤베드는 그 후 강력한 인기에 힘입어 최근 교토와 후쿠오카로 영역을 넓혔다. 
파주출판단지에는 북앤베드보다 한발 앞서 북스테이를 테마로 한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종이 예술의 고향’이라는 의미를 담은 ‘지지향’이 그 주인공. 지지향의 객실에 들어서면 ‘TV 없는 방’이라는 푯말과 함께 수준 높은 양서를 발견할 수 있다. TV로 머리를 비우는 대신 책 읽기를 통해 진정한 사유와 묵상의 시간을 허락한다. 특히 박완서, 고은 등 국내 작가의 전집 및 소장품으로 꾸민 ‘작가의 방’은 한 작가의 작품 세계와 생애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공간으로 인기 높다. 이 밖에도 통영에 자리한 펜션 봄날의 집, 경주의  게스트하우스, 양평의 북스테이와 산책하는 고래 등 ‘북스테이’를 콘셉트로 한 공간은 하나의 장르로 입지를 굳히며 날이 갈수록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태국 코사무이에는 호텔 이름을 ‘더 라이브러리’로 짓고 호텔 전체를 책으로 인테리어한 부티크 호텔도 등장했다. 책으로 빼곡한 공간 속에서 눈이 벌게질 때까지 밤새워 책을 보든, 종이의 향을 음미하며 까무룩 잠이 들든, 책을 베개 삼아 뒹굴든 그것은 투숙객의 자유다. 북스테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책의 전 공정을 수작업으로 제작하는 타라북스의 워크숍 현장. 

파리에서 활동하는 그래픽 아티스트 한지우의 아트북 작업. 찢거나 물에 젖어야 진가가 나오는 파격적인 책이다. 

한지우의 <Melani: Art Collection>. 미술품을 찍은 사진을 필름 자체로 스캔해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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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 : 갖고 싶은 책
동시대의 책은 ‘읽는 것’ 이상의 가치를 함의한다. 그 자체로 근사한 전시 작품이 되거나 훌륭한 인테리어 소재가 되기도 하며, 수집품으로서의 가치도 지닌다. 그런 맥락에서 종이책은 전자책과 사뭇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전자가 두고두고 갖고 싶은 예쁜 에코백이라면, 후자는 한번 쓰고 버리는 비닐봉지 정도 될까. 
홍대 앞 그림책 방 ‘베로니카 이펙트’의 대표 김혜미는 종이책의 미래를 제시하는 좋은 예로 인도의 한 출판사 ‘타라북스’를 들었다. “타라북스는 책이 만들어지는 모든 공정을 수작업해요. 각 책을 300권씩 만드는데, 그중 100권은 당장 팔지 않고 자신들이 소유하죠. 책의 희소성이 종국에 책의 가치를 높이게 돼요. 앞으로 종이책은 이렇게 ‘소유’의 가치를 지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종이책과 예술은 말마따나 ‘종이 한 장’ 차이다. 작년 말, 책을 사랑하고, 일찌감치 출판을 하나의 작업으로 삼은 장식미술가 포르나세티의 개인전에서 선보인 수공예 아티스트 북의 100가지 에디션 전시 섹션은 어느 때보다 관객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종이책을 작업의 연장으로 삼는 경향은 요즘 패션계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조너선 앤더슨을 필두로 매 시즌 로에베가 발행하는 출판물이 대표적이고,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컬렉션을 만드는 일주일을 기록한 책은 ‘리미티드 에디션’이라는 매혹적 딱지를 달고 패션 피플의 지갑을 활짝 열었다. 종이책이 단지 패션을 설명하는 부수적인 뭔가가 아닌, 브랜드의 가치를 담는 도구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파리에서 활동하는 북 아티스트 한지우는 이런 맥락에서 아트북 작업을 시작했다. “대량 생산하는 책 더미 속에서 아티스트의 작업이 돋보일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었어요. 소장 가치 있는 아티스트 북, 그리고 그 책이 작가 작품의 일부로 보이기를 바랐죠. 그래서 지금까지 만든 책은 모두 수작업했어요. 대부분 갤러리나 뮤지엄에서 작품을 전시하고 전시 부속품으로 카탈로그를 만들잖아요. 저는 거꾸로 생각해보기로 했죠. 아트북이라는 작품을 전시 공간에 어떻게 변형시켜놓을 수 있는지를 풀어볼 생각이에요.” 그가 작업한, 찢으면서 보는 책 <-18>, 물에 젖지 않는 책 <On Fire>는 책을 꼭 종이로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표를 던지는 동시에, 수집 대상으로서 책의 미래를 조명한다.  

더네이버, 종이책, 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