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뉘르부르크링 24시간 레이스가 열리던 5월의 마지막 토요일 15시 30분은 유난히 기온이 높았다. 국지성 호우에 우박까지 쏟아지며 드라이버를 괴롭혔던 작년 날씨와는 대조적이었다. 패독 안에는 현대 N 브랜드 부스가 세워졌고 어디선가 반가운 한국말이 들린다. 머지않아 한국인 드라이버로만 구성한 팀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올해는 새로운 경주차, 새로운 팀과 호흡을 맞추게 됐다. 매력적인 투어링카 규정으로 주목받고 있는 TCR 경주차를 보유한 쾰른에 있는 마틸다 레이싱팀과 인연이 닿았다. 이 팀은 2017년형 골프 GTI TCR 경주차로 뉘르부르크링 내구레이스 시리즈인 VLN 시즌에 참가해 지난 두 경기 모두 클래스 우승을 차지했다. 골프 TCR은 양산형 골프 R에 들어가는 2리터 직분사 터보 가솔린 엔진을 기반으로 350마력의 최고출력을 낸다. 다만 골프 R과 다르게 앞바퀴만 굴린다. 350마력의 고압 터보 엔진과 앞바퀴굴림 조합은 솔직히 기대보다 우려가 컸다. 게다가 4명의 드라이버가 한 조로 구성된 우리 팀 드라이버 중 TCR을 처음 타는 건 나뿐이었다. 

차와 서킷 모두 단시간 내에 익숙해져야 하는 부담감을 안고 결승 이틀 전에야 처음으로 골프 TCR의 운전석에 앉았다. 단 두 랩을 돌 수 있는 연습 시간이었기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차를 읽어나갔다. 저속 코너와 재가속에서 앞바퀴가 고전할 줄 알았는데 막상 별다른 드라마가 없다. 1단에서 시속 90킬로미터까지 올라가는 긴 기어비와 끈끈한 한국타이어 C52 슬릭 콤파운드 덕분이었다. 진공 배력장치가 없는 레이싱 브레이크는 오롯이 운전자의 다리 근력으로 패드를 밀어붙여야 한다. 체력 단련 없이는 페달을 밟다가 지쳐버릴 정도다. 페달은 무겁지만 밟는 만큼 제동력이 증가하니 정교한 컨트롤이 가능하다. 풀 브레이킹 구간에서는 80~100바 정도의 압력을 캘리퍼에 전달해야 한다. 참고로 권장 타이어 공기압이 3바를 넘지 않는다. 시퀀셜 기어박스의 변속은 게임처럼 빠르고 손실이 없다. 

 

9분 23초 6으로 팀내에서 가장 빠른 랩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 경주차의 진짜 매력은 노면의 굴곡을 무심하게 타고 넘는 서스펜션이다. 독일 서스펜션 브랜드 KW사 개발진과 함께 7포스트 섀시 다이나모에 차를 올려 최적값을 찾아냈다고 한다. 고속 범프, 저속 범프, 리바운드 감쇄력을 세밀하게 따로 조절하는 서스펜션이다. 요란스러운 뉘르부르크링 노면 위에서도 차체는 평온을 유지하며 일관적인 접지력을 발휘한다. 이런 괴물 같은 댐핑 성능을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다. 랠리 드라이버 오디션 프로그램을 위해 독일에서 타본 WRC 머신의 서스펜션 감각과 무척 닮았다. 뉘르부르크링 북쪽 코스는 사실 타막 랠리 코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 바퀴로 달리는 곳도 있고 네 바퀴가 모두 점프하는 곳도 있다. 

핸들링이 쉽고 진중해서 마치 휠베이스가 긴 중형급 쿠페를 운전하는 감각이다. 강한 전방 다운포스 생성으로 앞바퀴굴림의 단점은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순식간에 두 랩이 지나갔다. 곧이어 펼쳐진 1차 야간 예선에서 우리 차의 드라이버 중 가장 빠른 예선 기록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클래스 3위. 잘 지켜내기만 한다면 포디엄 입성도 노려볼 수 있다. 데이터 로그와 온보드 영상을 여러 차례 돌려보며 랩타임 단축 가능 지점을 찾자 조금씩 자신감이 오른다. 

결승 세 시간 전, 마지막 전략 회의가 열렸다. 드라이버가 한 번의 연료 주입으로 다음 피트인까지 달리는 주행시간을 스틴트라 부른다. 우리는 한 스틴트당 9랩(약 232킬로미터)을 돌고 들어와 급유와 타이어를 교체하는 전략을 세웠다. 계획대로라면 24시간 동안 총 17회의 스틴트를 통해 약 3800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하지만 계산대로 내구레이스가 전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직접 운전대를 잡은 두 번째 스틴트에서 계기반이 꺼진 채로 달려야 했다. 엔진 소리로 변속 타이밍을 잡으면서 혼신을 다해 달린 결과, 2위 차를 추월해 1위 차 바로 뒤까지 순위를 끌어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피트인을 앞둔 마지막 구간에서 브레이크 페달을 밟던 왼발이 미끄러져 다시 2위 자리를 내주게 됐다.

 

해가 저물어가던 네 번째 스틴트부터 크고 작은 기계적 결함이 우리 팀의 발목을 잡았다. 초고속 선회 구간에서 시동이 꺼지며 운전대가 잠기는 바람에 잔디밭으로 들어간 동료가 피트로 급히 복귀했다. 앞 범퍼에서 수십 개의 자갈이 쏟아져 나왔다. 폭스바겐 모터스포츠 소속 엔지니어가 ECU를 점검했고 미캐닉들은 드라이브샤프트를 교체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피트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고 순위는 두 단계나 더 떨어졌다. 

여섯 번째 스틴트에서 다시 경주차에 올랐다. 서킷은 완전히 어둠에 잠겼고 수십만 관객의 고기 굽는 연기와 불꽃놀이로 서늘한 밤이 뿌옇게 채워져 있었다. 다행히 올해는 야간 주행 랩타임이 주간 랩타임과 큰 차이가 없었다. 지난해 경주가 도움이 된 모양이다. “앞은 잘 보이지 않지만 코너 형태는 그대로니 다행이지 않나?”라며 웃던 네덜란드 출신 선배 드라이버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자정이 지난 시간, 경주차가 또다시 말썽을 부렸다. 우리 팀은 수리하는 데 두 시간을 써버렸다. 하지만 팀원 사이엔 난관이 있어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매번 수리를 마칠 때마다 전원이 하이 파이브를 하며 다시 달릴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다. 

동이 터오는 무렵 경주차의 베스트 랩 기록을 세웠다. 팀원 모두가 엄지를 들어 보이며 축하를 해줬다. 클래스에서 두 번째로 빠른 기록으로, TCR 초보인 내게는 과분한 성적표였다. 결국 우리는 24시간 동안 약 1200리터의 연료와 40개의 타이어를 사용해 3300킬로미터를 달려내며 최종 클래스 4위로 완주에 성공했다. 아쉽게 포디엄을 놓쳤지만 더 정교한 우승 전략을 배우는 계기가 됐다. 부디 내년엔 승리의 여신이 우리와 함께하길.  글_강병휘(카레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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