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 스팅어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단순한 신차효과가 아니다. 강렬한 디자인과 강력한 동력성능,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조종성능까지 갖췄다는 평가다. 럭셔리한 포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실까지 챙겼다는 얘기다. 기아의 디자인 역량을 한껏 표현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평가와 함께 기아 브랜드를 한 단계 발전시킨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디자인 기아’의 시대를 열었던 K 시리즈 세단들은 너무 조용하다. 지난해 우리나라 승용차 시장을 대표하는 이슈였던 중형세단 대전에서도 기아 K5는 보이지 않았다. 전통의 강자인 현대 쏘나타에 르노삼성의 SM6가 프리미엄 코드로 도전하고 쉐보레 말리부가 공격적인 디자인과 조종성능으로 소비자들 마음을 사로잡을 때, 중형세단 시장에 디자인 바람을 선도했던 K5는 거론조차 되지 않은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2세대 K5는 지난해 기준으로 출시된 지 반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최신 모델임에도 그랬다는 사실이다.

기아가 K 시리즈 세단에 대해 특별하게 잘못하는 것은 없어 보인다. 홍보·마케팅의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SUV 시장에서의 강한 브랜드 이미지로부터 낙수효과를 받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렇다고 자매 브랜드인 현대차에 비해 딱히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소비자들의 주목을 끌지 못하고 있다. 이래저래 그늘이 더 어두워 보이는 구석이다. 그렇다면 기아 K 세단이 외면당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디자인 기아의 시작 피터 슈라이어 영입과 함께 기아는 디자인을 전면에 내세웠고, 브랜드 인지도를 성큼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중심에 있던 K 시리즈 세단들은 최근 존재감이 약하다. 

차별화에서 생존의 길을 찾다
기아는 영욕이 교차하는 브랜드다. 해방 이후 자전거부터 시작한 한국 최초의 운송수단 기업이자 국민 기업이었지만, 후발주자였고 나중엔 경쟁자였던 현대차에 인수된 현실이 그렇다. 시장에서도 피터 슈라이어 영입과 함께 디자인 중심 브랜드라는 테마를 선점했지만 요즘은 오히려 젊음과 역동성을 강조하는 현대차의 디자인과 르노삼성의 럭셔리 디자인, 쉐보레의 남성적 디자인에 흐름을 빼앗긴 듯하다. 

현대와의 관계 아래 브랜드 정체성도 항상 의문이었다. 합병 초기에 현대는 정통 메이저 브랜드로, 기아는 라이프스타일 지향 브랜드로 육성하겠다는 방향 제시가 있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SUV 시장의 급격한 성장에 현대도 SUV 시장으로 대거 진출하면서 기아의 위치가 위협받았다. 기아차 입장에서는 벙어리 냉가슴 앓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현대차 빌딩에 비해 5~10퍼센트 작게 지어진 양재동 기아 사옥이 이런 심정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한 가족인 이상 기아는 현대와 기술적인 요소를 공유해야 했다. 따라서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두 브랜드의 모델들이 상당히 유사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의 아류 취급을 받는 건 시간문제였다. 차별화가 필요했다. 기아가 선택할 수 있는 차별화에는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브랜드의 성격 강화가 그중 하나였다. 

기아는 오리지널 크로스오버 SUV인 스포티지를 가졌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강력한 라이프스타일 모델 브랜드다. 북미 시장에서는 스포티지와 쏘렌토가, 유럽에선 해치백인 씨드가 동급 시장의 대표 모델일 정도로 강력하다. 게다가 국내는 물론 북미에서도 인기가 높은 카니발까지 갖고 있을 정도로 라이프스타일 모델의 라인업과 브랜드는 강력하다. 이 같은 브랜드의 성격 강화는 브랜드 가치와 사업의 안정성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FCA가 위기 상황에서도 SUV의 종가인 지프 브랜드와 픽업트럭의 대명사인 램을 가진 닷지 브랜드의 수익 덕분에 회사 전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브랜드의 강화는 양날의 검이 되기 쉽다. 강하지만 크지 못하는, 즉 강소 브랜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강력한 이미지가 이미지의 고착으로 이어져 새로운 시장에서는 오히려 받아들여지지 않는, 스스로 쌓은 유리벽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또 안정적인 수입원에 의존하게 되면서 회사 자체의 혁신 의지가 쇠퇴하는 부작용도 있다. 특히 기아 브랜드처럼 하나의 브랜드 이름 아래 다양한 제품군이 포진한 경우 그 위험이 더욱 크다. 

따라서 라이프스타일 모델 브랜드라는 강력한 이미지는 단단한 기초가 됐지만 풀 라인업으로 세계적 메이저 브랜드가 되려는 기아에겐 충분한 무기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추가된 브랜드 강화 전략이 디자인 중심 브랜드로의 발전이었다. 2006년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한 뒤 첫선을 보인 ‘Design’ 캠페인을 시작으로 기아는 브랜드 자체를 새롭게 디자인했다. 그 첫 작품이 2009년에 출시한 K7이었고 이듬해 K5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지키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다. 기아처럼 신모델을 통해 ‘달라지지 않은 듯 확실하게 달라진’ 디자인을 추구하는 경우, 이는 더욱 어려운 숙제다. 포르쉐 911을 디자인하는 일은 항상 비슷한 모양이라 쉬울 것 같지만 실제로 디자이너들 사이에선 가장 고통스러운 작업 중 하나로 통한다. 게다가 지금은 너도나도 디자인 DNA를 주장하는 이른바 ‘디자인 주도 시대’다. 과하게 느껴지는 디자인, 정확하게는 장식이 지나친 모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까닭이다. 기아가 디자인 하나만으로 스스로를 차별화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정체성의 갈림길에 서다
앞서 언급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브랜드가 추구하는 것을 추상적으로 정리한 무형의 가치다. 디자인 아이덴티티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형상화한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의 본질은 달리는 것에 있다. 따라서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는 주행감각과 성능으로 실현해야만 비로소 구현되고 완성된다. 이런 점에서 기아는 지금까지 많은 노력을 해왔다. 현대와 동일한 기술적 기반에서 출발하는 모델이지만 직접 경험해보면 뭔가 조금씩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다. 

지금까지의 현대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적당한 보편타당성이 지향점이었다면, 기아는 직선 중심의 디자인과 일맥상통하는 약간 더 탄탄하고 묵직한 남성 지향적인 느낌을 다소나마 가지려 했다. 이런 차이는 LF 쏘나타와 K5의 비교 시승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스위치 감촉을 비롯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차별화를 위한 섬세한 튜닝의 흔적이 느껴졌다. 

그런데 현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개성을 강조한 경쟁모델들의 십자포화에 고전하던 LF 쏘나타는 쏘나타 뉴 라이즈로 분위기를 바꾸었다. 남녀노소의 베스트셀러였던 그랜저(HG)는 보다 스포티한 분위기(IG)로 방향을 정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의욕적이었던 i30, 논란을 지우고 출시될 벨로스터 후속 모델, 그리고 얼마 전 공개한 코나 등 현대는 확실하게 다이내믹한 캐릭터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현대가 색깔을 갖기 시작한 거다. 기아는 디자인에 이어 캐릭터에서도 갈림길에 서게 됐다. 

 

K5 GT에서 스팅어로
K5 GT가 출시됐다. 2016년형에 있던 GT라인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GT가 ‘라인’이라는 글자를 떼어버릴 수 있었던 것은 스포티한 스타일링 패키지 수준이 아니라 주행감각과 조종성능의 질적인 차이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조종성능 향상을 위해 가장 크게 손댄 부분은 서스펜션이었다. 요즘 추세라면 전자식 서스펜션을 더하는 정도에서 그쳤겠지만 K5 GT는 스프링 탄성계수를 높이는 데서 시작하는 본격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여기에 강해진 스프링을 다독거리기 위해 ZF의 전자식 가변 댐퍼를 조합했다. 향상된 조종성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사계절 타이어를 버리고 고성능 여름용 타이어까지 신겼다. 빨라진 페이스를 제어할 수 있게 대형 브레이크 시스템도 적용했다. 

K5 GT의 접근 방법은 고전적이되 근본적이다. 달리는 맛뿐 아니라 달리기의 수준 자체를 끌어올리기 위해 본격적인 튜닝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파워트레인의 경우 기존 2.0리터 T-GDI 엔진의 출력을 올리는 대신 변속기 프로그램을 최적화해 효율성을 높였다. 단순하게 출력을 키우고 단단하게만 만드는 양적 튜닝보다는 주행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잠재된 성능을 꺼내 쓰는 질적 향상으로 다가간 셈이다. 핸들링을 튜닝의 대상으로 삼은 건 ‘제작 편의’의 측면도 있다. 엔진 출력을 높이면 인증을 새롭게 받아야 하는 등 절차가 추가되기 때문이다. 

‘튜닝 초보는 외관이고 중수는 출력이며 상수는 핸들링, 고수는 드라이빙’이라는 격언에서 알 수 있듯이 핸들링 성능을 중심에 둔 K5 GT의 시도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고성능을 진지하게 탐구하고자 하는 기아 브랜드의 진중함, 어리지 않은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타깃 마케팅 전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K5 GT에 담긴 키워드(진중함과 진지함, 남성적인)는 향후 기아가 펼칠 GT 제품 전략의 핵심이기도 하다. 실체를 확인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GT 전략의 출사표라 할 수 있는 스팅어가 출시됐기 때문이다. 

스팅어는 기아가 원하는 진중한 스포츠에 최적인 고성능 GT의 성격을 집대성한 모델이다. 예리하기보단 예측 가능한 조종성능, 절대적으로 높은 접지 한계, 불필요한 자극은 적절히 걸러내는 수준 높은 주행품질, 그리고 필요하다면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고성능까지. 이것이 기아 GT가 추구하는 바이고 스팅어에 담겨 있는 가치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스팅어는 애초 K8으로 출시될 것이 기정사실화돼 있었다. 하지만 출시된 지금은 이름도 다르고 심지어 엠블럼까지 새롭다. 에센시스 같은 별도 브랜드 출범 소문도 그치지 않는다. 물론 현대의 제네시스처럼 독립된 럭셔리 브랜드를 갖는 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기아가 이미 브랜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K다. 스팅어가 K8이라는 이름으로 더해졌다면, 기아가 디자인 브랜드로 새 출발을 선포했던 K 브랜드도 새로운 외연과 가치를 담아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선 기아 브랜드 전체에 힘을 더하는 계기가 됐을 수도 있다.

 

 

‘달리기’에서 찾은 희망 K5 GT는 핸들링 성능 보강을 통해 주행품질의 질적 향상을 모색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스포츠세단 스팅어에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두 차는 K 시리즈, 나아가 기아 브랜드의 새로운 이정표로 삼을 만하다. 

 

지금 필요한 건 자신감
지난해 K7이 출시됐을 때 기아 내부의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랜저 IG가 나오기 전까지 열심히 팔아야죠.” 아직 나오지도 않은 제품에 패배를 인정한 셈이다.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디자인에서 알 수 있듯 K7은 그랜저 IG에 비해 훨씬 남성적이고 묵직하다. 연령과 성별이 다른 고객층을 상대할 수 있다는 얘기다. 2017년형은 단단해진 서스펜션 등으로 브랜드 캐릭터에 어울리는 조종성능까지 갖추게 됐다. K3는 신형이 나올 때를 기다린다. 아반떼는 상품성이 뛰어난 일반 모델과 함께 아반떼 스포츠를 통해 강력한 이미지까지 보탰다. 차별화를 위해 새로운 K3는 시작부터 기아다운 선 굵은 남성적 분위기로 어필하고 대중성과 상품성도 잊지 않았다는 반전의 메시지로 다가서는 게 좋겠다. K5는 실상 따져보면 판매 성적이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도 조용했다. 지레 겁먹고 몸을 사린 탓이겠다. K 시리즈는 기아에 소중한 자산이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건 자신감이다.  
글_나윤석(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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