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보는 볼보만의 마니아가 있다.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많다. 그들에게 볼보의 매력을 물으면 견고하고 안전해서, 내구성이 강하고 투박해서 좋다고 이야기한다. 볼보는 분명 묘한 매력을 지녔다. 자동차로 나를 표현한다면 볼보 운전석에 앉은 나는 자신을 크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지혜롭고, 우아하며 절제를 아는 지식인이다. 볼보는 유럽, 그중에서도 북유럽의 차갑고 명쾌한 이미지를 지녔다. 가족의 안전을 위해 듬직하고 내구성이 뛰어난 차를 신뢰한다는 이미지를 준다. 미국에서는 여피들이 볼보를 사랑했다. 

볼보의 새로운 플래그십 세단 S90 T5를 시승하는 날 1996년형 볼보 850을 마주하게 됐다. 20년의 세월 동안 두 차는 겉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각진 실루엣이 매끈해졌고, 크기도 커졌다. S90은 완전히 새로운 볼보가 됐다. 850은 나이가 스무 살이나 된 차지만 쇼룸에 있는 것처럼 말쑥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두 차를 번갈아 타며 볼보의 발전사를 살펴본다.

 

 

 

각진 개성이 살아 있는 850

1991년에 데뷔한 850은 투박하고 보수적인 차, 뒷바퀴굴림차만 만들던 볼보에서 처음 만든 앞바퀴굴림차였다. 900 시리즈가 나온 지 10년 만에 등장했는데 세계 최초로 사이드 에어백을 달고, 터보와 4WD 모델도 나왔다. 튼튼하지만 조금은 둔해 보였던 볼보의 이미지도 850부터 바뀌었다. 각이 두드러진 모습은 완벽한 형태의 3박스 세단을 보여준다. 균형미가 뛰어나다. 비교적 커다란 옆 창과 높은 트렁크는 그 당시 자동차 디자인의 흐름을 따른 결과다. 각진 보디에서 볼보의 개성이 뚜렷하게 느껴지지만 모서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드럽게 다듬어졌다. 세련미가 은근하다. 25년 전 데뷔한 차인데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다. 

 

겉모습은 조금 작아 보이지만 실내가 제법 여유롭다. 실제 수치로도 당시 900 시리즈 실내보다 넓다. 시트 크기도 충분한데 부드러운 쿠션이 내 몸을 포근히 받아준다. 스칸디나비안 스타일이라 부르는 볼보만의 인테리어다. 작은 버튼이 빼곡한 대시보드가 고급차라는 걸 말하는 듯하다. 모든 버튼이 늘어선 모습을 보니 모니터로 들어가 해당 스위치를 찾아야 하는 요즘 차 같지 않아 마음이 편하다. 과거의 차를 생각나게 하는 계기반 조명과 다이얼을 돌려야 하는 온도조절 장치를 보니 ‘아, 그땐 모두 이랬지’ 하는 감상에 젖는다. 오랜만에 대하는 알파인 오디오도 정겹다. 그런데 컵홀더가 눈에 띄지 않는다.

850은 포르쉐와 함께 개발한 가로배치 직렬 5기통 엔진으로 화제를 모았다. 당시만 해도 한 해 생산량이 30만대에도 미치지 못하던 볼보는 하나의 엔진으로 실린더 블록을 더하고 빼면서 4기통, 5기통으로 엔진 라인업을 세웠다. 변속기는 그때부터 일본의 아이신을 썼다. 850이 큰 의미를 갖는 건 안전에만 중점을 두던 볼보가 운동성을 더하면서 능동적인 안전 개념까지 힘주어 말한 데 있다. 단순히 엔진이 강해진 것뿐 아니라 그에 따르는 조종성과 핸들링도 좋아졌다. 사고가 났을 때 단단해서 좋은 게 아니라 사고를 피해 달아나는 능동적인 안전 기능이 있기에 좋은 거다. 볼보는 850 왜건으로 투어링카 경주대회인 BTCC에 참가해 우승하면서 시선을 모으기도 했다.

시승차로 온 1996년형 850 GLE는 850 가운데 가장 아랫급 모델로, 144마력을 내는 2.5리터 휘발유 엔진을 얹었다. 170마력의 GLT보다 출력이 조금 낮아서 부드러운 차로 여겨졌다. 이 엔진의 캠샤프트는 DOHC인데 실린더당 두 개의 밸브를 달았다. 생산을 단순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모듈형 엔진은 때로 낭비를 안고 간다. 850은 델타링크 리어 액슬도 처음 달았다. 시승차는 주행거리가 9만 킬로미터도 넘지 않았다. 1550~5400rpm까지 넉넉한 구간에서 최대토크의 90퍼센트를 내며 부드럽게 달린다. 과거 볼보에서 느꼈던 투박한 4단 변속기 감각도 되살아났다. 오래된 차라 삐거덕거리기도 했지만 무겁고 묵직한 볼보의 느낌대로 달렸다. 조금은 둔한 가속과 감속. 과거의 차는 온갖 추억을 불러온다. 드라이빙 모드는 윈터와 에코, 스포츠 모드를 고를 수 있다. 20년 전에도 볼보엔 이런 기능이 있었다. 세월이 흐른 차는 함부로 다룰 수 없다. 특히나 ‘쇼룸 컨디션’의 개인 소장 차는 더욱 조심스럽다. 나직한 파워는 차를 부드럽게 다루는 데 도움이 됐다.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조용한 차는 여러모로 무난하다. 850은 두루 쓰기 편한 대중적인 세단이었다. 1996년 생을 마감했는데 S70이 그 뒤를 이었다.

 

추억의 5기통 엔진 850 GLE는 144마력을 내는 직렬 5기통 2.5리터 휘발유 엔진을 얹었다.

 

 

 

볼보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는 S90

S90은 E 세그먼트에 속하는 준대형 세단이다. 이전의 S80은 플래그십 세단으로 보기엔 크기가 작아 어정쩡했는데, S90은 메르세데스 벤츠 E 클래스나 BMW 5시리즈와 당당히 맞설 수 있을 만큼 커졌다. 볼보의 주요 시장이 미국과 중국이란 걸 생각하면 크기를 키우는 건 꼭 필요한 조치다. S90은 앞바퀴굴림차지만 대시보드와 휠아치 간격이 멀어 비율이 꼭 뒷바퀴굴림차 같다. 롱 노즈와 쇼트 데크, 최소한의 오버행과 쿠페처럼 경사진 뒤 실루엣이 세련되면서 은근한 멋을 자랑한다. 앞 오버행을 짧게 할 수 있었던 건 콤팩트한 4기통 엔진 덕이다. 과하지 않은 기교와 담백한 라인이 내 맘엔 들지만 자칫 프리미엄이 아닌 듯 보일까 조심스럽다. 

볼보의 새로운 앞모습은 언뜻 범퍼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깔끔하다. 볼보의 클래식 쿠페 P1800을 모티프로 디자인했다고 하지만 별로 비슷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멋진 P1800을 마음에 품고 바라볼 뿐이다. ‘토르의 망치’라 이름 붙은, 개성이 뚜렷한 주간주행등은 룸미러로 새로운 볼보를 보는 모든 이의 마음에 볼보의 얼굴을 각인시킬 것이다. 주간주행등 모양으로 브랜드를 알리는 차는 많지 않다. 그 사이에 있는 수직 프런트 그릴이 중후함을 더한다. 그 한가운데 자리한 볼보의 엠블럼은 더욱 커져 존재감이 뚜렷하다. 엠블럼은 카메라까지 담았다.

어깨선을 강조하는 사이드 캐릭터 라인은 여전한데 낮고 넓고 길어서 늘씬하다. 휠도 큼지막하다. ‘ㄷ’자 모양 테일램프는 새롭게 볼보 세단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이 테일램프를 보면 왜건이 아닌 세단이란 걸 알 수 있다. 대시보드도 이전과 달라졌다. 알루미늄과 가죽, 우드그레인을 휘감은 실내에서 그윽한 향기가 느껴진다. 벤틀리 출신 디자이너의 작품이라 그런지 실내의 풍요로운 감각이 벤틀리 보급형 같기도 하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 모습을 또다시 스칸디나비안 스타일이라 부를 것이다. 볼보의 실내는 항상 심플하지만 세련미가 넘쳤다. 여기에 고급스러움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거다.

실내는 덩치가 큰 북유럽 사람들이 타기에 넉넉한 크기다. 앞뒤로 달린 가죽 시트는 큼직하면서 널찍하다. 두께가 얇아진 시트가 세련미를 더한다. 대시보드 가운데 달린 트위터는 소리에 민감하다는 증거다. B&W 오디오 시스템은 다른 차에서 느끼지 못한 감동을 불러왔다. 이 황홀한 오디오는 S90을 프리미엄급 차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운전자를 향해 살짝 기운 센터페시아 위에는 9인치 디스플레이가 달렸는데 그 안에서 차의 각종 기능을 컨트롤할 수 있다. 그 기능을 모두 숙지하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처음 만난 차를 운전하면서 누가 옆에 앉아 대신 버튼을 찾아줬으면 싶었다. 물론 내 차가 돼 익숙해진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시동 버튼이 센터콘솔에 놓인 것을 보니 사브가 떠올랐다. 조수석에서도 닿기 쉬운 위치는 장점이자 단점이다.

 

SPA 플랫폼을 두르는 볼보의 새 모델은 모두 4기통 엔진을 얹는다. 볼보는 이를 드라이브-E 파워트레인이라고 부르는데 2.0리터 엔진과 8단 변속기의 조합이다. S90에 얹히는 엔진은 모두 다섯 가지다. 254마력을 내는 T5, 320마력을 내는 T6, 400마력을 내는 T8 등 휘발유 엔진이 세 가지, 2.0리터로 배기량은 같지만 세팅을 달리해 190마력과 235마력을 내는 D4와 D5의 디젤 엔진 두 가지다. 디젤 엔진 역시 실린더까지 같이 쓰는 모듈형이다. 이 중 국내에는 휘발유 모델인 T5와 디젤 엔진인 D4, 그리고 D5 AWD가 들어온다.

 

시승차는 T5 인스크립션 모델로 2.0리터 휘발유 엔진에 터보를 달아 최고출력 254마력, 최대토크 35.7kg·m를 낸다. 휘발유 모델 중 가장 아랫급이지만 2.0리터 엔진이 254마력을 낸다는 건 대단한 수치다. 1500rpm부터 최대토크가 뿜어 나와 페달을 밟는 순간부터 뿌듯한 파워를 맛볼 수 있다. 0→시속 100킬로미터 가속시간은 6.8초, 최고속도는 시속 230킬로미터로 달리기 실력도 상당하다. 엔진은 부드럽고 조용하며 언제나 반응이 빠르다. 4기통의 한계를 의심했지만 T5 엔진은 고급차의 동력원으로 거뜬했다. 묵직함보다는 가볍고 경쾌한 기분으로 내뻗는다. 조용한 차는 파워트레인의 연결도 부드럽다. T5가 이럴진대 T6나 T8은 어떨까 궁금증이 커진다. S90은 트레드가 넓고 서스펜션이 탄탄해서인지 안정감이 좋았다. 서스펜션은 앞 더블 위시본, 뒤 멀티링크인데 에어서스펜션 대신 뒤에 리프스프링을 가로로 배치했다. 쉐보레 콜벳과 같은 이런 방식은 짐 공간을 크게 하는 장점이 있다.

구형인 850과 신형인 S90의 차이는 전자장비에서 확연하다. 20년이 흐른 지금 볼보의 안전 기술은 차원이 달라졌다. 850에 능동적인 안전 개념이 처음 도입됐다면 S90은 전자장비가 주도하는 각종 안전 기술을 담았다. S90은 볼보의 지능형 안전 시스템을 총칭하는 인텔리 세이프 시스템을 기본으로 담고 있다. 반자율주행 기술인 ‘파일럿 어시스트 II’도 모든 모델에 적용된다. 어댑티브 크루즈컨트롤에 방향조절 기능을 더한 기술인데 차선을 따라 스스로 스티어링휠을 돌리며 달린다. 긴급 제동 시스템인 시티 세이프티도 물론 적용됐다. 자동차뿐 아니라 보행자와 자전거 탄 사람, 야생동물도 인식한다. 기특한 기술이다.

S90을 타는 동안 차가 저 혼자 달리다 앞차가 서면 자동으로 서는 경험을 했다. 재미있었다. 그런데 자율주행에 지나치게 신경쓰다 보니 본래의 운전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앞차와 충돌하기 직전에 차가 스스로 브레이크 밟고 멈출까 자꾸 긴장하게 되고, 차선을 조금이라도 밟으면 덜덜 떠는 스티어링휠이 성가시게 느껴졌다. 레벨 5 수준의 완전 자율주행이 가능한 차가 나오기 전에 이런 장비가 필요할까 생각했다. 고급차를 탄다는 이유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장비를 싣고 다니는 건 불필요한 과정 같아 보인다. 물론 추돌을 막아주는 시티 세이프티는 당장 필요하지만. 그 밖에도 S90은 고급차답게 다양한 옵션이 가득하다. 자동주차 시스템과 360도 카메라, 헤드업 디스플레이, 길을 따라 도는 헤드램프, 마사지 기능 등 셀 수가 없다. 유해물질까지 걸러내는 실내 공기 청정 시스템은 미세먼지가 고통스러운 요즘 정말 필요한 장비다. 

 

S90의 우아한 실내 알루미늄과 가죽, 우드그레인을 휘감은 실내에서 고급스러움이 물씬 느껴진다. 새로운 볼보의 실내다.

 

 

 

시승을 마치며
볼보 850으로 과거의 볼보를 돌아보고, S90으로 새 차를 바라본 시간이었다. 850은 낭만적인데 S90은 의지에 불타는 경쟁력을 갖췄다. 2010년 중국의 지리자동차가 인수한 볼보는 이제 북유럽 스웨덴의 작은 자동차 회사가 아니다. 최근 볼보의 성장세는 괄목할 만하다. 과거 30만대 정도 만들던 볼보가 2020년까지 80만대를 넘어 100만대 생산을 계획하고 있다. 볼보는 지리자동차의 차들과 더불어 영역을 넓혀나갈 예정이다. 볼보의 SPA 플랫폼을 이용해 지리자동차가 대대적으로 다양한 모델을 개발하겠다는 계획도 예정돼 있다. 이 때문에 볼보의 정체성이 더욱 중요한 시점이다. 볼보는 요즘 들어 부쩍 스칸디나비안 요소를 강조한다. S90의 디자인 콘셉트는 ‘스웨디시 젠틀맨’이었다. 번호판에 붙었던 ‘VOLVO FOR LIFE’는 ‘MADE BY SWEDEN’이라고 바뀌었다. 그 옆엔 스웨덴 국기까지 붙었다. 볼보가 스웨덴 차라는 게 새삼스럽다. 글_박규철(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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