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클래식카에 관심이 간다. 오래된 차를 보면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오래전 내가 본 자동차, 타본 차를 다시 만나면 반가움이 크다. 클래식카는 과거와 나를 연결해준다. BMW 세단과의 첫 만남은 19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으로 미국에 온 조카에게 삼촌은 자신의 BMW 바바리아를 내줬다. 그때 선루프라는 것을 처음 열어봤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샌프란시스코 해안길을 내달리면 터질 듯한 엔진음과 배기음이 가슴을 탁 트이게 했다. 수동변속기를 단 4도어 세단이었지만 그 어느 차보다 스포츠카다웠다. 그때는 지금보다 자동차 브랜드의 색깔이 강한 시절이라 궁극의 드라이빙 머신을 자처하는 BMW의 성격이 세단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 매력과 비교할 차는 없었다. 
미국 뉴저지에 있을 때 옆집에 살던 한국인 의사 선생은 BMW 2002를 타고 다녔다. 작은 BMW 세단은 의사와 변호사만 타는 차인 듯 지성미가 넘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 차는 3단 자동변속기를 달고 있었다. 난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BMW에 자동변속기를 얹다니! 배신행위 같았다. 사촌동생은 BMW 2002를 중고로 두 대 사서 한 대를 완벽하게 고치는 작업을 했다. 그것도 자기 집 차고에서. 당시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그 작업이 무척 경이로워 보였다. 베이지색 2002를 보니 과거의 BMW가 머릿속을 맴돈다.

 

HISTORY
제2차 세계대전 후 회사 사정이 어려워진 BMW는 이세타라는 초소형 차까지 만들어 팔아야 했다. 1960년 콴트 가문이 BMW에 상당한 투자를 하면서 1962년 뉴 클래스(노이에 클라세)를 내놓기 전까지 BMW는 어려움을 겪었다. BMW 최초의 중형차 뉴 클래스는 독일 중산층이 좋아할 만한 차였고 그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 회사가 이익을 낼 수 있었다.  뉴 클래스의 성공으로 BMW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뒤를 쫓는 회사로 기반을 다지게 됐다. 
1966년 BMW는 뉴 클래스의 휠베이스를 줄여 만든 2도어 세단 02 시리즈를 내놓았다. 1600cc 엔진을 얹은 모델이 먼저 나왔고, 1968년 중반엔 싱글 오버헤드 캠과 2.0리터 엔진을 얹은 2002가 나왔다. 2002는 바닥 카펫과 우드그레인 장식을 없애고 독일차만의 럭셔리를 만들었다. 이후 컨버터블과 투어링, 터보 등 다양한 가지치기 모델이 출시됐다. 고성능 버전 2002는 모터스포츠에서 성공을 거두며 BMW에 스포티한 이미지를 덧씌워줬다. 미국 시장에서의 성공은 BMW의 이미지와 가치를 확고히 했다. 
1966~75년까지 2002는 86만대 이상 팔렸다. 싱글 카뷰레터를 얹은 2002가 101마력, 듀얼 카뷰레터를 얹은 2002ti가 119마력, 퓨얼 인젝션을 얹은 2002tii가 130마력에 최고시속 190킬로미터를 냈다. 세계 최초의 터보 승용차였던 2002 터보는 최고출력이 170마력에 0→시속 100킬로미터 가속 시간이 6.6초, 최고속도가 시속 209킬로미터였다. 당대 쟁쟁한 스포츠카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차였다. 하지만 2002 터보는 연비가 좋지 않았다. 1973년 ‘오일쇼크’로 석유값이 폭등하자 연비 문제가 더욱 두드러졌고, 출시된 지 2년 만에 1672대를 생산한 후 단종됐다. 하지만 BMW에 고성능 이미지를 심어주기엔 충분했다.

 

 

 

DESIGN
3박스 디자인의 2002는 껑충한 보디가 남다르다. 보닛부터 옆구리를 거쳐 트렁크까지 굵은 금속의 선으로 자동차를 한 바퀴 감싸는 디자인은 어딘가 보트를 닮았다. 보닛과 트렁크 라인이 끝으로 갈수록 기울어진 것 때문인 듯하다. 조개껍데기 같은 커다란 보닛과 보디를 한 바퀴 도는 허리 라인, 앞으로 기운 프런트 그릴은 1970년대의 BMW로 진화해나간다. 매우 좁은 키드니 그릴은 328 카브리올레 같은 옛날 차를 닮았다. 이런 모양이 진짜 키드니 그릴이다. 요즘 BMW의 프런트 그릴은 ‘키드니’ 모양이 아니다. 키드니 그릴을 가운데 두고 다시 양옆으로 그릴을 붙인 후 헤드라이트를 담은 것이 이 시절 BMW의 얼굴이다.
보닛은 앞쪽에 경첩을 달아 요즘 BMW 차와 반대로 열린다. 그땐 바람에 날려 덜컥 열릴까봐 스포츠카에 이런 식으로 보닛을 달았다. BMW는 2002의 보닛을 이렇게 만들어 심심한 승용차가 아니라 속도가 빠른 스포츠카라는 걸 강조했다. 얇은 크롬 범퍼는 정겨운 모습이다. 미국에서 ‘5마일 범퍼’를 요구하기 전 옛날 차들은 다 이랬다(시속 5마일의 속도로 벽에 부딪혔을 때 차가 우그러지지 않도록 충격을 흡수하는 범퍼를 5마일 범퍼라고 한다. 1972년부터 시행된 미국 안전 규정에 따라 미국에 수출하는 차는 5마일 범퍼를 앞뒤에 붙여야 했다). 
A 필러에 달린 안테나는 손으로 뽑아야 한다. 175/70R13 사이즈의 미쉐린 타이어는 고작 13인치지만 차의 크기를 생각할 때 결코 작은 크기가 아니다. BMW의 특징인 독특한 C 필러도 뚜렷하다. 보닛처럼 조개껍데기 모양의 뚜껑을 가진 트렁크는 크기가 넉넉하다. 2002는 1971년 2002ti가 tii로 바뀌면서 한 번 페이스리프트되고, 1973년 테일램프가 원형에서 네모난 모양으로 바뀌는 두 번째 페이스리프트를 거쳤다. 시승차는 보디 상태가 기대 이상으로 깨끗해 ‘역시 독일차는 다르다’는 감탄을 하게 한다.

 

 

 

NTERIOR
도어를 열 때 그 무게와 투박한 울림이 좋다. 우리가 아는 독일차 그대로다. 운전석에 앉자 탁 트인 시야가 마음에 든다. 사방으로 시야가 훤하다. 오뚝한 보디 디자인의 효과로 뒷자리 공간도 제법 여유가 있다. 작지만 선이 굵은 차는 커다란 덩치의 독일 사람이 앉아도 편한 자세를 찾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이 큼직하다. 선반이 마련된 대시보드는 개성이 넘친다. 계기반에는 태코미터도 달렸다. 시승차는 1975년 모델인데 생각해보면 포니가 막 생산된 때다. 그 당시 태코미터가 있는 계기반은 흔치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차는 대시보드에 시계를 달았지만 BMW는 스포티함을 강조하는 브랜드였다. 당연히 시계를 뺐다. 단순한 실내 분위기가 BMW만의 특징을 잘 살린 느낌이다.
오래된 차를 타면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옆 유리창은 레버를 빙글빙글 돌려 열어야 하고, 옆 유리 앞에 달린 세모난 쪽창 역시 다이얼을 빙빙 돌려 열어야 한다. 그런데 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에어컨? 스포츠카에 그런 건 필요 없다. 세 개의 페달은 바닥에서 튀어 올라왔다. 2002가 보통 차가 아니라는 또 하나의 증거다. 가늘고 커다란 림의 스티어링휠을 상상했는데 시승차는 모모 휠을 달았다. 시트도 애프터마켓 제품이다. 클래식카는 복원할 때 원래 모습에 충실한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못할 경우 차를 망치는 것 같아 마음 졸일 때가 있다. 그런데 시승차의 휠과 시트는 내가 2002를 새 차로 샀다고 하더라도 바꾸고 싶은 아이템으로 꾸몄다. 새롭게 단 모모 휠과 시트마저 1970년대의 체취가 흥건하다.

 

 

DRIVE
2002tii는 퓨얼 인젝션을 달아 130마력을 낸다. 그런데 시승차는 듀얼 카뷰레터에 스트럿 바 등을 달았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많은 튜닝 과정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출력이 얼마인지 얼핏 짐작할 뿐이지만 제원표에서 130마력짜리 차의 0→시속 97킬로미터 가속 시간이 9.8초였으니 그보다 조금 느리지 않을까? 
당시 승용차, 더욱이 BMW에는 수동변속기가 당연했다. 4단 수동변속기가 첨단이었던 시절, 시승차는 옵션이던 5단 수동변속기를 달았다. 오래된 차는 살살 몰아야 하는 제약이  따른다. 스포츠카를 살살 몰아야 한다면 비극일 수 있다. 시동을 걸자 우렁찬 엔진 소리가 통쾌하면서 한편 안쓰럽다. 스포티한 기분을 부추기지만 피로한 기색이 보여서다. 스티어링휠도 요즘처럼 매끈하게 돌아가는 파워 스티어링휠이 아니다. 클러치 페달의 접점을 찾아 적응하려고 애쓰는 나도 누군가는 안쓰럽게 봤을까? 
오래된 차에서 암팡진 독일차의 단단함이 느껴지는 게 의외다. 차가 출발하자 스티어링휠이 곧 가벼워진다. 착착 집어넣는 기어마다 가속을 더하는 2002에서 모터스포츠를 즐기는 나를 발견한다. 나름 거칠게 차를 몰아가는데 오너인 김윤동 씨는 좀 더 세차게 몰아치기를 권한다. 오너가 운전대를 넘겨받자 차는 다시 자신의 페이스를 찾았다. 우렁찬 엔진 소리가 조용한 시골 마을을 휘젓는다. 스포츠카에서 이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 2단에서 5000rpm 이상을 밟아댄다. 출력은 120마력 남짓으로 추측되지만 가벼운 무게 덕에 경쾌하게 달리는 느낌이 좋다. 김윤동 씨는 이 차로 시속 160킬로미터 이상 내봤다고 한다. 앞 스트럿, 뒤 세미트레일링 암을 단 2002tii를 경량 클래식이라 부르고 싶어졌다.

 

 

EPILOGUE
2002는 기본에 충실한 차다. 사람 네 명에 짐까지 한가득 싣고도 스포츠카처럼 달릴 수 있다. 40년 전 차인데 아직도 탄탄하다. 2002는 정말 아름답다. 그리고 BMW답다. 독일차답다. 평범한 3박스 세단이지만 2002는 스포츠카였다. 3시리즈의 시작이 이젠 전설이 됐다. 오늘 시승은 40년 전으로의 여행이었다. 지금은 BMW가 넘쳐나지만 40년 전 서울 거리에는 BMW가 없었다. 오래된 차와의 만남은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다. 클래식카는 과거로의 여행을 가능케 한다. 잠시잠깐 찬란했던 나의 젊은 날로 여행을 떠난 기분이다. 만남은 길지 않았지만 여운이 오래 남는다.  
에디터_서인수

 

 

모터트렌드, 자동차, 클래식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