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규어가 포뮬러 레이싱으로 돌아왔다. 재규어의 역사가 레이싱의 역사였는데 주인이 바뀌는 등 격변의 시기를 보내며 더 이상 레이싱 현장에서 재규어를 볼 수 없었다. 그런 재규어가 서킷 레이싱의 정점에 있는 포뮬러 레이싱으로 돌아온 것이다. 2004년 마크 웨버가 드라이버로 있던 F1이 마지막이었으니 꼬박 12년 만의 컴백이다. 

마지막 F1 출전도 사실은 온전한 재규어의 몫은 아니었다. 포드가 코스워스 엔진을 얹고 재규어 로고를 달아 출전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재규어는 2000년부터 2004년까지 5시즌 동안 F1에 있었지만, 두 차례 3위를 차지한 것이 포디엄의 전부였다. 그렇게 재규어의 마지막 레이싱 역사는 초라했다. 

재규어가 컴백하는 무대는 전기차 레이싱의 정점인 포뮬러 E다. 그들의 컴백 무대가 F1이 아닌 것이 아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영리한 선택이다. 가장 인기 있는 F1으로의 컴백은 파급효과가 클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위험하다. 현재 F1은 메르세데스, 페라리, 레드불이 포디엄을 거의 독식하고 있다. 모두 F1에서 잔뼈가 굵은 팀으로 엄청난 자본과 농익은 기술을 지녔다. 이 외에 윌리엄스와 포스 인디아도 꽤 전력이 탄탄하다. 재규어가 매뉴팩처러 팀으로 F1에 참가한다는 건 고난을 예상하고 가시밭길을 걷겠단 뜻. 몇 년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할 것이 뻔하니 잔뜩 기대했던 재규어 팬들은 실망할지 모른다.

반면 포뮬러 E는 시작된 지 몇 년 되지 않았다. 올해가 3번째 시즌이다. 2번째 시즌까지는 모든 팀이 똑같은 섀시, 똑같은 전기 시스템을 사용했다. 즉, 팀 전력이 거의 비슷하다. 재규어가 출전하는 올 시즌부터 획일화된 파워트레인이 아닌 각 팀이 자체 개발한 시스템을 사용한다. 재규어의 전기 시스템 파트너는 ‘윌리엄스 어드밴스드 엔지니어링’이다. F1에서도 긴 역사와 전통을 지닌 팀이거니와 1, 2시즌 동안 포뮬러 E에 배터리팩을 단독 공급했던 회사다. 윌리엄스 어드밴스드 엔지니어링만큼 레이싱에 특화된 전기 시스템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곳은 없다. 재규어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다. 

2016~2017 포뮬러 E 개막전이었던 홍콩 레이스(10월 9일)에서 파나소닉 재규어 레이싱은 애덤 캐럴이 12위를 차지했고 미치 에번스는 전기 시스템 문제로 리타이어했다. 만족할 만한 성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12년 만의 포뮬러 레이싱 복귀 무대에서 완주 차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재규어가 레이싱 복귀 무대를 포뮬러 E로 선택한 다른 이유는 차세대 에너지 환경을 위한 기술 개발과 브랜드 이미지 쇄신을 위해서다. 전기차 시대로 가는 과도기에서 배터리 효율과 안정적인 전기 시스템 관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극한의 환경인 자동차 경주는 이런 시스템을 테스트하기에 훌륭한 장소다. 더불어 포뮬러 E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미래 재규어 전기차에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재규어가 준비 중인 소형 SUV E페이스는 순수 전기차라는 소문이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재규어 외에도 여러 자동차 브랜드가 포뮬러 E에 참가하고 있거나 준비 중이다. 아우디와 르노, DS는 일찌감치 팀을 꾸렸고 다음 시즌엔 메르세데스 벤츠가 들어온다. BMW도 안드레티 레이싱과 함께 팀을 꾸려 5번째 시즌에 함께하기로 했다.

포뮬러 E 인기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도 자동차 브랜드가 관심을 갖는 주요 이유다. 포뮬러 E 경주차는 엔진이 없으니 당연히 배기가스가 없고 소음도 크지 않다. 덕분에 시가지에서도 경주를 할 수 있다. 2016~2017 시즌도 대부분 시가지에서 진행된다. 경주장이 필요 없으니 건설 비용이 들지 않고 시가지에서 진행해 관객 접근성도 좋다. 더불어 포뮬러 E는 ‘팬 부스트’라는 독특하고 참신한 포인트 시스템으로 관객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투표에서 가장 많이 득표한 세 드라이버에게 경주 중 100킬로줄의 에너지를 더 쓸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즉, 관객 투표가 레이싱에 영향을 주는 만큼 관객도 레이싱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는 셈이니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홍보의 장으로 포뮬러 E의 가치가 점점 커지고 있다. 

재규어는 포뮬러 E 개막전에 맞춰 아주 특별한 홍보대사를 발표하기도 했다. 영국의 가상 밴드 고릴라즈(Gorillaz)에서 기타와 보컬을 맡고 있는 누들(Noodle)이다. 재규어, 랜드로버의 글로벌 PR 디렉터 피오나 파르게타는 이렇게 말했다. “재규어, 랜드로버는 2022년까지 영국에서만 30만 명의 엔지니어가 필요합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새로운 영감을 지닌 젊은이들이 필요하죠. 포뮬러 E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재규어의 변화의 일부분입니다. 파나소닉 재규어 레이싱과 누들의 파트너십은 젊은이들에게 재규어의 이미지를 젊게 보이게 할 것입니다.”
사실 재규어의 고풍스러운 브랜드 이미지는 젊은 층에게 고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재규어는 이런 브랜드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포뮬러 E 참가와 함께 디지털 세대를 겨냥해 가상의 인물을 브랜드 홍보대사로 임명한 것이다. 

레이싱의 역사인 재규어는 다시 한 번 레이싱으로 브랜드 가치와 이미지를 재확립하려 한다. 포뮬러 E의 선택으로 레이싱 혈통을 이어나가면서 미래 자동차 환경까지 대비하는 영리한 판단을 했다. 더불어 브랜드 이미지를 좀 더 젊게 쇄신하고 젊은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서도 포뮬러 E를 활용한다. 재규어에게 포뮬러 E는 단순한 홍보 수단을 넘어 미래를 위한 중요한 투자다. 따라서 재규어는 포뮬러 E에서 새로운 레이싱 헤리티지를 쌓기 위해 많은 투자와 노력을 할 것이다. 벤츠, BMW 등 뛰어난 레이싱 기술과 역사를 지닌 브랜드들도 포뮬러 E로 몰려들고 있어 재규어로서는 녹록지 않겠지만 관객 입장에선 흥미진진하게 됐다. 레이싱 팬으로서 재규어의 컴백을 격하게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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