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쉐 911 GT3 RS 박서 엔진까지 구동하는 정밀한 블록이다.

 

 

블록으로 패스트백 만들던 아이
어릴 때부터 뭔가 만드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주로 갖고 놀던 게 블록과 조립식 프라모델이었다. 특히 블록을 좋아했다. 내가 갖고 있던 건 정교한 시스템 블록은 아니었다. 그래도 만들고자 하는 걸 만드는 데는 별다른 불편함이 없었다. 이가 없으면 어떻게든 이보다 더 강하고 빛나는 방법을 강구해서 만들어 넣었다. 그때는 참 똘똘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튼 그 블록으로 주로 만들던 건 자동차였다. 그렇게 차를 만들기 시작한 게 여섯 살부터였다. 당시 우리 집엔 자가용이 없었고 택시도 타본 기억이 없었다. 난 차의 겉모습을 재현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물론 블록 자체도 세부적인 걸 표현하긴 어려운 제품이었다.

‘찝차’라고 부르던 쌍용 코란도는 난이도가 가장 낮았다. 그 어릴 때도 ‘이런 건 애들이나 만드는 거지’라며 애써 기피했던 기억이 난다. 주로 만들던 건 특정 모델이 아니라 패스트백 형태의 자동차였다. 만들기 어려워 시시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고 가장 익숙한 형태의 자동차여서도 그랬다. 당시까지만 해도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자동차가 현대 포니2였다. 택시가 대부분 포니2였다. 이후에 나온 포니 엑셀도 패스트백 스타일이었다. 물론 스텔라나 로얄 시리즈 같은 세단도 적지 않았지만 그 줄지어 달리던 초록색 포니 택시들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엔 그만큼 강렬한 기억이었다.

그런데 블록으로 늘씬하게 떨어지는 해치 라인을 만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형태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예쁘게 만들어지지가 않았다. 마치 계단처럼 빼곡히 블록을 채워보기도 하고 대각선으로 블록을 눕히기도 해봤다. 그런데 블록을 채우면 다른 부분을 완성할 여분의 블록이 부족했고 대각선으로 눕히면 결합이 제대로 되지 않아 해치도어 부분이 쉽게 떨어져 나갔다. 이 문제는 나중에 과학 상자를 살 때까지 결국 해결하지 못했다. 경첩이 없고 오직 사각형으로만 채워진 블록으로는 끝내 나의 숙원을 풀지 못했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완전한 패스트백을 만들어냈다면 난 아마 자동차 기자가 아니라 연구원이 돼 있을지도 모르겠다. 풀지 못한 숙제가 날 이리로 끌고 온 건 아닐까?

블록 이후로도 내 장난감은 언제나 자동차였다. 주로 풀백카라고 부르는 미니카였다. 많이 좋아했지만 때론 별로이기도 했다. 산타 할아버지에게 야광 부츠를 받고 싶다고 빌어도 미니카, 호피티를 갖고 싶다고 해도 미니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교임에도 좋은 선물 받아보겠다며 여름성경학교까지 갔는데 역시나 미니카를 받았다. 그땐 산타 할아버지를 참 많이도 미워했다.

아무튼 블록을 가지고 놀며 시작된 자동차에 대한 관심과 호감은 지금 날 <모터 트렌드> 기자로 이끄는 데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됐다. 단순히 타고 싶고 갖고 싶은 욕망을 넘어 형태나 원리 등 자동차가 제공할 수 있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온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나의 꿈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잘 온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예상치도 못한 일들이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더욱 적극적으로 달려들어야겠다. 그때 패스트백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던 그 아이처럼.

글_고정식

 

페라리 512 BB 와이퍼 위치까지 실제 차와 똑같이 맞췄다.

 

꿈과 트라우마가 공존하는 다이캐스트
내 취미는 다이캐스트 자동차 모형 수집이다. 지금 가진 모형만 해도 줄잡아 1700여 대다. 중학교 때부터 모으기 시작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더 어릴 때부터 자동차를 좋아했다. 미술 시간에 쓸 스케치북을 사면 미술 숙제보다는 자동차를 그리느라 종이를 다 써버리곤 했다. 때문에 다른 친구들은 스케치북 한 권이면 한 학년을 때웠지만 나는 네댓 권도 모자라기 일쑤였다.

다이캐스트 자동차를 처음 접한 건 1979년 중학교 때였다. 일본제인데 1:43 크기였다. 물론 그건 작은 크기의 완구였지만, 다이캐스팅으로 만들어진 금속제 차체가 주는 무게감과 존재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 뒤로 부모님을 졸라 몇 대 샀지만 종류 자체가 적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꽤 고가였기에 부모님, 특히 아버지가 중학생이 무슨 ‘장난감’이냐며 꾸지람하시곤 했다. 그 뒤로 다이캐스팅 모델은 항상 선망의 대상이었다. 어쩌다 돈을 모아 부모님 몰래 한 대 사더라도 행여 발각돼 꾸지람을 들을까 전전긍긍했던 기억이 난다. 그건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게 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대학 졸업 후 기아자동차에 디자이너로 입사하게 됐다. 당시 첫 일본 출장길에 1:18 크기의 페라리 테스타로사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구입했다. 그게 아마 1989년이었을 것이다. 출장 기간 내내 커다란 다이캐스트 박스를 마치 신주단지 모시듯 들고 다녔던 기억에 아직도 웃음이 난다. 그렇게 수집의 엔진은 시동이 걸렸다. 다이캐스팅 수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미국 디자인 연구소 주재원으로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면서부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미국은 다이캐스트 모형의 낙원이었다. 베벌리힐스(Beverley Hills)에 가면 정말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큰 규모의 다이캐스트 숍이 있었고, 싱글이던 난 주말이면 거기에 가서 살다시피 했다.

다이캐스트 수집은 물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 갖고 있는 모형들은 대부분 1:18 크기다. 그중에는 1:12나 1:6까지 있지만 대부분의 승용차와 트럭, 탱크, 장갑차는 물론 헬리콥터와 전투기까지도 1:18로 모으려고 노력 중이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1:18 크기의 F-14 전투기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손바닥 크기의 모형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크기다. F-14 전투기를 산 것은 몇 년 전에 보았던 람보르기니와 전투기의 속도 경쟁 뉴스에서 힌트를 얻어서였다. 슈퍼카와 전투기 모형의 조합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앞으로 한 15년 동안, 총 3000대가 될 때까지 다이캐스트를 모으려고 한다. 그래서 자동차 역사 150년을 모형으로 재현한 작은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 박물관에는 모형 제작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와서 작업할 수 있는 공간과 RC 자동차 경주 트랙, 자동차를 모티프로 한 작은 카페도  만들 예정이다.

나는 자동차를 좋아해서 자동차 디자이너가 됐다. 지금은 그것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은퇴한 뒤에도 사람들에게 자동차에 대한 꿈을 가질 수 있게 하고 싶다. 그것이 앞으로의 내 작은 꿈이다.

글_구상(국민대 자동차운송디자인학과 교수)

 

 

닷지 램 1500 한껏 치장해  경주차 같은 느낌이다.

 

나는 테스트 드라이버였다
초등, 아니 국민학교 4학년 때로 기억한다. 사촌 누나들이 준 용돈으로 간도 크게 두 대의 전동식 자동차 프라모델을 구입했다. 내게는 이른바 ‘조립식’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1년에 딱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겨울 방학 끝자락의 내 생일에 아홉 살 많은 형님이 사주는 것이었고, 두 번째가 여름방학마다 일주일씩 놀러 갔던 서울 이모 댁에서 사촌 누나들이 사주는 것이었다. 근검절약이 생활화되었던 부모님은 더 이상은 낭비라고 허락하지 않으셨다.

당연히 이 자동차들은 내 재산 목록 1호였다. 그리고 이 차들은 FA-13 모터와 나일론 기어박스를 통해 뒷바퀴를 구동하는, 최소한 내게는 본격적인 물건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었다. 바닥이 조금만 울퉁불퉁해도 바퀴가 튀어올라 차가 제멋대로 방향을 바꿔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진짜 자동차처럼 볼펜 스프링을 이용해 서스펜션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일단 차체 바닥판에 고정돼 있던 앞바퀴와 뒷바퀴 ‘모듈’을 뜯어내고 그 모듈이 아래위로 자연스럽게 움직이도록 모듈 둘레를 잡아주는 세로 막대를 설치했다. 그다음 윗면 차체 안쪽의 앞뒤 바퀴 모듈 위에 세로 막대를 각각 두 개씩 본드로 붙인 뒤 거기에 볼펜 스프링을 끼워서 서스펜션 스트럿을 만들었다. 아주 부드러운 것부터 꽤 단단한 것까지 스프링을 바꿔가며 서스펜션의 강도를 조절하는 등 정성을 다해서 튜닝했다. 하지만 스프링을 잡아주는 댐퍼가 없어 차가 오히려 더 튀었다. 차체가 너무 가벼워서 그런 것 같아 차 안에 동전을 붙여 무게를 늘렸다. 재미있는 것은 이 밸러스트(Ballast) 동전을 앞뒤로 배치했을 때와 중앙에 모아놓았을 때의 움직임이 달랐다는 것. 아마도 이때 50:50의 무게 배분이라도 FR처럼 앞뒤로 분산된 것과 미드십처럼 중앙으로 집중된 경우의 차이를 처음 느꼈던 것 같다. 역시 FR이 MR보다 안정감은 높았다.

대학교 1학년 2학기부터는 과학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제는 R/C, 즉 무선 조종까지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었다. 물론 월급 대신 물건만 잔뜩 가져왔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인생 R/C카를 이때 만났다. 타미야에서 출시한 1:12 크기의 포르쉐 959 랠리카다. 뒷좌석 중앙에 모터가 자리 잡은 정확한 리어 미드십 구조, 육각 너트를 잠그는 정도에 따라 로킹 효과를 조절할 수 있던 볼 타입 센터 디퍼렌셜을 채용한 풀타임 4WD 방식, 실리콘 튜브를 사용한 오일 봉입식 쇼크 업소버와 스프링 분리형 리어 콤파운드 서스펜션, 네 바퀴 더블 위시본 서스펜션, 오프로드 및 타맥(tarmac)용 타이어 2세트 등 자동차를 완벽하게 축소한 하이테크 모델이었다.

내 핀업카이자 인생의 꿈이던 포르쉐 959를 통해 나는 자동차를 배웠다. 그리고 959 R/C카로 그것들을 실험할 수 있었다. 직각 삼각자를 대고 바퀴의 캠버를 바꿔가며 조향 특성을 실험했고, 리저버 튜브의 길이를 바꾸고 댐퍼 오일의 점도를 바꿔가며 쇼크 업소버의 역할을 공부했다. 디퍼렌셜을 풀었다 잠갔다 하며 구동력이 조향 특성에 미치는 영향도 실제로 느껴볼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차를 빠르게 달리게 튜닝했지만 나는 실제 차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높은 R/C카의 출력을 낮추며 최대한 실제 차에 가깝게 만들어 실험했다.

실험의 결과는 항상 부서진 차였다. 디퍼렌셜의 볼 베어링이 닳아 녹아버렸고, 느리게 달리도록 하니 접점식 변속기에 사용된 시멘트 저항이 불타버렸다. 시험 과정에 수도 없이 충돌 사고를 일으키니 차체는 너덜너덜. 미안했지만 많이 배웠다. 고맙다.

글_나윤석(자동차 칼럼니스트)

 

캐딜락 엘도라도 다이캐스트처럼 정교하게 제작된 프라모델.

 

프라모델, 한 사람의 미래를 바꿀 수 있습니다
내 또래 남자라면 대부분 어렸을 때 프라모델을 만든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손을 뗀다. 그러곤 어느 순간부터 프라모델을 ‘애들이나 갖고 노는 장난감’으로 치부하기 시작한다. 대학 입학 전까지는 공부 이외의 생활이 허락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뒤늦게 프라모델에 다시 손을 대기 시작한 내가 특이한 상황에 해당할 뿐이다. 

오히려 프라모델은 내가 다 큰 다음에 더욱 큰 의미가 있는 존재로 다가왔다. 프라모델이 내 삶에 큰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은 인생의 암흑기였던 고등학교 시절이다. 그때 나는 건강 문제로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지 못했다. 대신 공부 압박은 크지 않았다. 덕분에 또래들보다는 취미와 관심사에 시간과 용돈을 더 투자할 수 있었다. 한창 자동차에 관심이 크던 시절이라 잡지를 읽고 그림도 그리며 자동차에 푹 빠져 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들른 모형 전문점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외산 자동차 프라모델을 발견했다. 즉시 모아둔 용돈을 털어 하나 사서 조립해봤다. 전에 없던 즐거움이 가득했다. 마치 신세계를 만난 기분이었다. 글과 사진으로만 접하던 차를 모형으로나마 보고 가질 수 있어 정말 뿌듯했다.

요즘처럼 정밀한 다이캐스트 모델이 많지도 않고 구하기도 어렵던 시절, 사실적인 모형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쉽고 현실적인 방법이 프라모델 조립이었다. 흔히 ‘박스 아트’라고 말하는 상자에 그려진 차 그림도 좋았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그림을 꼼꼼히 살피며 그림 표현 기법도 익힐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자동차 프라모델의 세계에 푹 빠졌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전공 공부보다 프라모델 만들기에 더 힘을 쏟았다. 생활비를 프라모델과 관련한 용품을 사는 데 미리 써버려 친구와 선후배에게 구걸하며 생활할 때도 있었고, 동호회 전시회를 준비할 때는 사나흘 사이에 예닐곱 개의 완성품을 뽑아내기도 했다. 생각해보자. 프라모델 조립 과정에는 접착제와 페인트가 마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키트 하나를 완성하고 나서 다른 키트 조립을 시작하는 식으로 작업하면 절대로 짧은 시간에 여러 개를 만들 수 없다. 여러 키트를 한꺼번에 까놓고 공정에 따라 병행 조립해야 가능한 일이다. 말 그대로 공장을 돌린 셈이다. 

4년 내내 그렇게 산 덕분에, 나는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대학을 우스운 성적으로 졸업하게 됐다. 그러나 크게 후회하지는 않는다. 프라모델을 만들며 배운 것들이 결코 전공 공부와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어서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 이름을 건 글이 실린 매체는 자동차 잡지가 아니라 프라모델 잡지였다. 자동차 프라모델을 열심히 만든 덕분이었다. 그렇게 내가 글쟁이의 삶을 시작하는 발판을 마련해준 존재였기에, 프라모델은 내 인생 아이템 중 하나이기도 하다.  

글_류청희(자동차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