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워야 한다. 관성을 다스리고 누구보다 민첩하게 움직이려면 가벼워져야 한다. 중량은 출력을 지배한다. 특히 운전자의 수족처럼 반응할 수 있어야 하는 스포츠카라면 더욱 그렇다.’

점점 편안하고 안전한 자동차를 원하는 시장의 요구 따윈 안중에 없고 오로지 주행 감성에 충실한 초경량 자동차를 만드는 영국 브랜드가 있다. 로터스를 떠올렸는가? 로터스도 이 브랜드에 비하면 다이어트가 한참 필요하다. 바로 ‘세븐’이라는 스포츠카를 손으로 만드는 케이터햄이다.

 

케이터햄 세븐은 아주 가볍다. 대부분 모델의 무게는 500킬로그램 내외. 이렇게 인상적인 몸무게에는 많은 희생이 따른다. 제대로 된 지붕과 도어가 없다. 에어컨과 오디오도 없다. 방음재는 사치고 작은 운전대에는 그 어떤 컨트롤러도 달려 있지 않다. ESP나 에어백은 이 차에서 SF 소설 같은 이야기다. 차체는 낮고 스마트 포투가 거실처럼 생각될 정도로 좁다. 차에 올라타는 일은 스키니진을 입는 것만큼이나 힘들다. 요가 수행자가 아니라면 지붕이 장착된 상태로는 승하차가 거의 불가하다. 그래서 오너들은 주로 지붕을 걷어둔다.

 

대신 차체가 몹시 가벼워 평범한 엔진을 얹어도 비범한 가속력을 빚어낸다. 케이터햄 세븐은 마력당 무게비로 모델명을 구분한다. 예를 들어 270R 모델은 톤당 출력이 270마력이다. 무게가 0.5톤밖에 안돼 엔진 출력은 아주 평범한 130마력대에 불과하다. 가벼운 만큼 출력이 조금 오를 때마다 운동성능은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경량 구조는 가속에만 도움을 주는 게 아니다. 얇은 타이어로도 민감한 스티어링 반응과 강한 횡중력을 가능케 한다. 평범한 브레이크로도 놀라울 만큼 선명한 제동력을 만든다. 그립 한계상황에서 실수했을 때 그립을 되살릴 수 있는 확률도 높다. 내가 가벼운 차를 사랑하는 이유다.

 

케이터햄 본사는 조립공장과 같이 있다. 여기서 만난 CEO 그레이엄 맥도널드는 지난 주말 열린 트랙데이에 자신의 620R을 몰고 다녀온 무용담을 꺼냈다. 본인은 빠른 드라이버가 아니지만 620R을 타고 트랙에 들어가면 모두가 빠른 레이서일 거라 착각하고 길을 비켜준다며 활짝 웃었다. 연간 생산대수는 약 500대로 일부 모델은 주문 후 반년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생산 규모를 늘릴 생각은 없단다. 현재 인원이 즐겁게 스트레스 없이 일할 수 있는 적정 규모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조립공장은 생각보다 깔끔하고 소박하다. 10여 개로 분할된 각 공정을 담당하는 셸은 컨베이어벨트 없이 인부들이 직접 밀어 옮긴다. 조립 중인 차체는 혼자서 밀고 다닐 정도로 가볍다. 로봇이나 컨베이어벨트 등 별다른 기계 설비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차체에 엔진을 장착할 때도 수동 공구로 올려서 작업한다. 자동차 메이커 공장이지만 개인 차고에서 키트카를 조립하는 모습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음악을 틀어두고 춤을 추며 일하는 작업자도 보인다. 일터라기보다 자동차를 가지고 노는 거대한 놀이터인 셈이다. 대부분 장기근속 근로자이고 자기 일에 강한 자부심을 가졌음이 표정에서 드러난다.

 

키트카 형태로 사서 반조립 상태로 배송받아 고객이 직접 조립을 해도 된다. 조립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은 없는지 묻자, 그런 경우 다시 공장으로 가져와 조립해 출고할 수도 있다고 한다. 케이터햄을 비롯해 많은 키트카가 개인 차고에서 만들어져 영국 도로를 달리고 있다. 자동차 및 레이스 관련 종사자만의 취미생활이 아니다. 기계공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부터 단순히 가족과 특별한 추억을 공유하고 싶은 이들까지 키트카에 대한 수요는 광범위하다. 영국 정부가 요구하는 안전조건 및 필수 장착 품목만 갖추면 어떠한 자동차도 등록할 수 있도록 한 덕분이다.

 

손으로 만든 세븐의 운전감각이 궁금했다. 세븐은 엔진과 변속기, 보디 크기에 따라 몇 가지 라인업으로 나뉜다. 그중 스즈키의 660cc 터보 엔진을 얹은 160S 모델을 시승했다. 일본인 F1 드라이버 가무이 고바야시가 극찬해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모델이다. 1만6000파운드(약 2320만원)도 안되는 가격에서 시작하는 160S는 휠 커버도 없는 14인치 철제 휠을 달고도 당당한 자태를 잃지 않는다.

 

 

 

대시보드에는 꼭 필요한 계기와 스위치만 있다. 에어컨이 없는 탓에 앞유리 서리 제거용 열선 스위치를 마련한 게 특이하다. 운전석에 몸을 구겨 넣으니 클러치페달이 곧 풋레스트가 된다. 단 1센티미터도 왼쪽으로 움직일 공간이 없다. 오른발은 힐앤토 대신 토앤토 테크닉을 구사하게 된다. 세 개의 페달은 피아노 건반처럼 붙어 있으니 운전을 시작하기 전에 정확히 페달을 밟는 법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차체 외부로 돌출된 앞바퀴 펜더의 상하좌우 움직임을 눈으로 확인하는 즐거움이 제법이다. 노면이 서스펜션과 차체를 거쳐 촉각으로 느껴지기 전에 시각으로 먼저 느낀다. 헤드램프 뒤쪽 크롬 하우징에 반사된 하늘이 아름답다. 스티어링휠은 비디오게임용 로지텍 휠만큼 작다. 파워 어시스트도 없지만 많은 힘이 들진 않는다. 손으로 전해지는 정보가 풍부해 양손으로 앞타이어를 쥐고 달리는 느낌이다. 방향지 시등 레버 대신 대시보드에 솟아오른 토글스위치는 운전대를 잡은 채로도 손가락이 닿아 나름 인체공학적이다.

 

ABS는 고사하고 진공 배력 장치마저 없는 브레이크는 사실 레이스카와 다를 게 없다. 패드가 디스크를 물어 차체를 세우는 제동력은 오롯이 운전자의 다리 근력에서 나온다. 페달은 무겁지만 힘을 주는 만큼 강약을 조절하기 쉬워 제동 감각이 아주 선명하다. 그렇다면 고작 80마력을 내는 3기통 터보 엔진은 세븐의 심장으로 타당한 선택이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하루 종일 운전해도 좋을 만큼 활력이 넘쳤다.

 

극단적으로 짧은 기어비도 파워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키는 데 공헌했다. 8000rpm까지 지치지 않고 돌아가는 스즈키 엔진은 스포티한 감성이 충분했다. 뒤가 아니라 옆에서 들려오는 3기통의 배기음은 케이터햄이 가르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잘 어우러져 어지간한 6기통 스포츠카가 주는 감성보다 더 감동적이다.

 

 

 

앞(더블 위시본)의 노면 장악력은 언제나 확고했지만 뒤는 노면이 고른 곳에서만 나긋나긋하다. 가끔 투박한 요철을 만날 때면 뒤쪽 라이브액슬이 덜컹이는 모습을 보였다. 속도가 붙은 상황에선 타이어가 노면을 놓쳐버릴 수 있는데 약간 손목만 비틀면 차체가 진정될 정도로 뒷바퀴 슬라이드에 대한 섀시의 반응이 날카롭다. 원한다면 낮은 속도에서도 얼마든지 드리프트를 즐길 수 있다.

세븐은 카트처럼 체감 속도가 높다. 빠르게 달리고 있다고 느껴질 때도 속도계를 보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낮은 숫자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시골길 사이를 시속 60킬로미터로 달리면서도 이만큼의 스릴과 재미를 주는 차가 어디 있을까? 현대적 스포츠카라면 시속 200킬로미터 이상으로 내달려야 비슷한 감성을 맛볼 수 있을 테니 어느 쪽을 선호하는가는 개인의 취향이다.

 

놀라운 연비는 덤이다. 연료 탱크가 작은데도 처음 100킬로미터를 이동하는 동안 바늘이 꿈쩍도 하지 않아 게이지가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가벼운 차체에 작은 배기량이 조합이니 당연한 것임에도 키트카에 대한 품질 선입견이 있었나 보다.

세븐 160S로 온종일 달린 후 나의 마음은 확고해졌다.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660cc 엔진으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스포츠카 감성이다. 키트 상태의 세븐을 주문해 직접 조립하고 트랙용 차로 타는 계획을 버킷리스트에 올려본다.

 

글_강병휘(카레이서 겸 방송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