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다 공부에만 집중하던 고3 시절, 나는 평생 가장 많은 음악을 듣고 가장 많은 영화를 봤다. 손 닿는 대로 듣고 닥치는 대로 봐서 듣고도 들은 적 없고 보고도 본 적 없는 음악과  영화가 많다. 그래도 한동안 푹 빠져 들었던 음악이 있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다. 록이라면 자고로 육중한 기타와 폭발하는 드럼이 들어가야 한다고 믿었는데 레드 핫 칠리 페퍼스는 그게 아니어도 록은 록이라는 걸 알려준 두 번째 밴드다. 첫 번째는 U2였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를 처음  제대로 들어본 건 그들이 데뷔하고 10년도 더 지나서인 1999년이었다. 그해 발표된 <Californication> 앨범 중 ‘Scar Tissue’란 곡을 라디오에서 듣고는 냅다 달려가 음반을 사서 들었다. 그리고 올해, 그들의 신보가 나온 걸 알고는 냅다 스마트폰을 들어 음악 스트리밍 앱을 켰다. 바로 <The Getaway>다. 시간은 17년이나 지나 음악을 듣는 방법마저 달라졌는데 이들은 어쩜 변한 게 별로 없다. 사실 변한게 없다고 하면 ‘그래?’ 하는 사람도 있겠다. 거칠게 뿜어지는 직선적인 펑크(funk)의 레드 핫 칠리 페퍼스는 분명 아니다.

추상화처럼 몽환적이기도 하고 침잠하는 듯한 무게감도 느껴진다. 그러나 당당하고 경쾌한 청년의 느낌이 여전하다. 귀를 쏙 파고드는 사운드도 그대로이고.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선명한 추상화가 어쩌면 <The Getaway>와 가장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라디오 헤드가 만든 일렉트로닉 듀오 프로듀서와 보컬로 이뤄진 혼네의 두 멤버 제임스와 앤디는 라디오 헤드의 골수팬이라는 공통점으로 인연이 닿았다.

몬드리안을 생각하니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영국의 일렉트로닉 듀오 혼네도 떠오른다. 로맨틱한 멜로디와 논리적인 구성의 조화가 그의 작품과 닮았다. 지난해부터 차츰차츰 반응을 얻어온 데다 벌써 잘 알려진 곡만 4~5곡 되다 보니 이미 데뷔 앨범이 나온 줄 아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올 7월에야 나온 <Warm On A Cold Night>가 그들의 정식 데뷔앨범이다. 이번에 나온 정규 1집은 가장 큰 인기를 얻은 셀프 타이틀곡 ‘Warm On A Cold Night’를 비롯해 ‘All in The Value’, ‘3AM’, ‘Costal Love’ 등 싱글 앨범에 실린 곡들은 물론 ‘Til The Evening’, ‘Treat You Right’, ‘Out of My Control’ 등 8곡의 신작도 함께 담겼다.

개인적으로는 ‘Warm On The Cold Night’가 가장 매력적이다. 어쿠스틱보다 더 따뜻한 일렉트로닉 감성이 자꾸만 마음에 와서 닿는다. 프리템포와 FPM 등 ‘시부야계’로 통칭되던 일본산 일렉트로닉 음악의 감성과 추억까지 떠오르게 된다. 사실 이들의 이름도 속마음이나 본심 등을 의미하는 일본어 혼네(本音)에서 따왔다.

‘그래도 음악은 어쿠스틱이야’라고 생각한다면 재즈 바이올리니스트 박유진의 <WEST END>도 빼놓을 수 없다. 재즈 바이올리니스트가 생소하다면 더더욱 들어보길 권한다. 그녀가 왜 재즈를 켜는지를 말이다. 독주 악기로서 바이올린의 역량은 물론 퀸텟에 녹아드는 선율까지 매력적이다. 특히 색소폰과의 조화가 섹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