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켁! 아휴!” 공항을 나서자마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이렇게 습하고 더운 날씨는 정말 난생처음이었다. “아휴 선배! 주하이 왜 이래요!” 선배가 차분하게 말했다. “선전이야.” 내가 대꾸했다.

 

“아! 선배. 선전 아니고 광고. 옛날에나 광고 보고 선전이라고 그랬죠.” 가만히 듣던 선배는 침착하고 냉정하게 버럭 했다. “여기 선전이라고, 주하이 아니고. 심천이라고 하면 알겠니?” 창피했다. 순식간에 중국 무식자가 돼버렸다. “넌 출장 오면서 기본적인 건 좀 알아보고 와야지.” 선배가 옳았다. 더군다나 모터스포츠 취재를 온 건데 말이다.

 

주하이까지 모터스포츠 취재를 온 건 2016 CJ대한통운 슈퍼레이스 때문이다. 슈퍼 레이스는 2014년부터 CTCC(China Touring Car Championship)와 교류전을 치르는데 관중이 3만~5만 명 보장되는 상하이 경기에 붙박이로 참가한다. 그리고 그 앞뒤에 치러지는 대회 중 적당한 곳에서 한 번 더 치른다. 그게 이번엔 주하이가 된 거다.

 

 

 

6월 4일 토요일 오전 10시 30분

예선이 치러지는 날이다. 일찍부터 경기가 열리는 주하이 인터내셔널 서킷으로 향했다. 예선이 12시 45분부터 치러지기에 일찍 가야 선수들과 감독들을 만날 수 있다. 10시 반쯤 도착해 미디어 센터로 향했다. 벌써부터 중국 기자들로 붐볐다. 오늘은 메인 이벤트도 없는데 중국 관영방송인 CCTV에서도 중계를 하러 나왔다. 조금은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미디어 센터에 가방을 풀고 피트로 내려갔다. 대부분의 서킷이 그렇겠지만 출발 지점에 있는 가장 큰 관중석인 메인 스탠드와 마주보고 있는 건물의 1층에 피트(Pit)가 있다. 주요목적은 경주차를 정비하고 관리하는 것이지만 각 팀들의 임시 사무실이자 휴게실, 식당, 창고이기도 하다. 복잡하고 정신없지만 가장 진솔한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이번에 새로 창단한 E&M 모터스포츠 팀이었다. 김재현 선수가 궁금했다. 루키 시즌에 제네시스 쿠페 20클래스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대한자동차경주협회(KARA) 선정 올해의 선수상까지 휩쓸었던 선수다. 당시 인터뷰를 하고 2년 만에 만나는데 기억할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E&M 레이싱팀 이정웅 감독이 먼저 와 반겨줬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반갑습니다!” 올해부터 김재현과 강진성이란 두 젊은 선수와 함께 시즌을 끌어갈 이정웅 감독이다. “다 새롭습니다. 선수들도 젊고 팀도 새로창단했고, 스톡카도 캐딜락 ATS-V로 카울을 바꿨고 저도 새 기분일 수밖에 없네요.”

 

올 시즌 몇 가지 규정에 대한 변화가 있었다. 그중에 가장 주목되는 게 타이어 규정이다. 작년까지는 예선과 결선을 통틀어 한 라운드에서 소프트 타이어 8짝, 레인 타이어 8짝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더불어 해당 라운드에 사용하지 않았거나 트레드가 충분히 남은 타이어는 다음 라운드에 이월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예선과 결선을 오직 소프트 타이어 4짝과 레인 타이어 4짝으로 버텨야 한다. 트레드가 남아도 이월할 수 없다. “저는 좋다고 생각해요.” 이 감독의 말이다. “타이어를 지원받는 팀들이야 개수에 상관하지 않지만 지원받지 못하고 사서 쓰는 팀들은 타이어에 대한 부담을 많이 느끼거든요. 일단 경제적인 부담이 적어도 타이어에서만큼은 절반으로 줄었잖아요. 예선에서 타이어를 잘 아끼면서 적당한 그리드까지 올라간다면 결승에서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어볼 수도 있고요.”

 

그나저나 이 뜨겁고 습한 날씨에 경기가 잘 치러질지 모르겠다 싶어 물었다. “감독님. 더위에 어떻게 대비하세요?” 이정웅 감독의 말이걸작이다. “에이, 우리 애들 다 젊은데 뭐.” 그 소리를 들었는지 김재현 선수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 기억납니다!” 역시 김 선수. 일단 그의 각오가궁금했다. “올해 선배들 다 꺾어야죠?” 김 선수가 웃으며 말한다. “시즌 5등은 할 것 같은데요?” 헐. 기대 이상의 자신감이다. F1 출전 경력의 이데 유지, 포르쉐 테스트 드라이버 출신이자 지난해 시즌 우승자 팀 베르그마이스터, 언제나 우승 후보인 베테랑 김의수, 조항우, 오일기, 공격적인 드라이빙의 정연일, 차세대 선두주자 김동은, 정의철, 이젠 그냥 레이서 같은 김진표, 류시원, 르망 24시 내구레이스 경력의 가게야마 마사미 등 난다 긴다 하는 선수가 이렇게나 많은데 시즌 5위를 자신한단다. “근거있는 자신감이죠? 제네시스 쿠페에서 스톡카로 넘어왔는데 어때요?” 스톡카는 뼈대부터 레이싱을 위해 만들어진 차로 양산차 모양의 겉모습은 그저 껍데기라 생각하면 된다. “양산차 기반의 경주차는 팀에서 건드릴 수 있는 게 많지 않은 데다 밸런스도 별로 안 좋았어요. 그런데 스톡카는 경주용으로 만든 차라 팀에서제 성향에 맞게 잡아줄 수 있는 부분도 많고 밸런스가 워낙 좋아서 더 잘할 수 있어요.”

 

 

 

6월 4일 토요일 오후 12시15분

E&M 모터스포츠 팀의 피트를 나와 각 팀의 예선 준비를 둘러보고 다녔다. 차를 준비하는 미캐닉들은 이미 온몸이 다 젖었다. “야, 거기 말고 이리로 와서 밀어야지!” 피트를 단거리 육상하듯 뛰어다니는 막내 미캐닉은 이미 땀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이런 게 있었어?” 하고 스칠 수 있는 자동차 경주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생이 걸린 일이다. CJ제일제당 팀을 보니 이승철 치프 미캐닉이 보인다. 예전엔 항상 염색한 머리에 개구쟁이 같은 인상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많이 야위었다. 움직임도 그리 편해 보이진 않았다. 사실 그는 2014년 10월 급성 뇌출혈로 쓰러져 오랫동안 투병해왔다. 그의 상태가 위중했단 걸 잘 알기에 다시 돌아오리라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복귀했다. 그 힘들었을 나날을 뒤로한 채. 그가 경주장을 포기하지 않았던 건 이곳이 곧 그의 인생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6월 4일 토요일 오후 1시20분

1차 예선은 진작 끝났고 이제 2차 예선도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방금 전까지 땡볕이었는데 순식간에 소나기가 쏟아졌다. 정말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했다. 소프트 타이어를 끼우고 트랙을 돌던 차들이 모두 피트로 복귀했다. 그리고 다시 나가지 않았다. 3차 예선은 1시 40분 출발이었지만 10분 연기됐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렸다. “예선 괜히 늘렸나봐. 타이어는 더 쓰지도 못하는데. 애들 갈수록 천천히 달리잖아.” 미디어 센터에서 한 선배가 말했다. 올해 슈퍼레이스의 SK ZIC 6000 클래스, 즉 스톡카 경주는 예선을 총 3번 치른다. 각각의 랩타임을 재 빠른 순으로 순위를 매기는데 하위 5명은 다음 예선에 진출할 수 없다. 즉, 예선 1라운드와 2라운드의 하위권 5명씩 총 10명은 후위 그리드 배정이 그냥 확정이란 얘기다. 그렇다고 너무 세게 달리면 타이어가 많이 닳는다. 잘못 계산하면 결승 마지막 즈음엔 트레드가 모두 닳아 속절없이 추월을 당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기록을 보면 1차 예선엔 가장 빠른 기록이 1분 41초대인데 마지막 3차 예선엔 1분 53초대까지 떨어진다. 물론 비의 영향도 있었지만 어차피 상위 그리드로 가는 것이니 적당한 순번까지만 올라가면 된다는 눈치도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예선 1위는 팀코리아익스프레스의 황진우 감독 겸 선수가 차지했다.

 

2위는 엑스타 레이싱 팀의 이데 유지 선수, 3위는 개막전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던 팀코리아익 스프레스의 김동은 선수다. 결승은 22바퀴다. 걸출한 선수들이 많아 그리드 순서와는 아예 상관없는 순위로 가려질지 모른다. 오늘처럼 갑자기 비라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트랙에서 벗어나면 경주차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구조도 변수가 되겠다. 트랙 밖이 자갈밭이다. 차가 빠지면 빠지는 족족 농업용 대형 트랙터가 와서 차를 꺼내야 한다. 그런 상황이면 무조건 세이프카가 등장한다.

 

 

 

6월 4일 토요일 오후 3시

예선이 끝나고 엑스타 레이싱 팀 피트로 내려갔다. 김진표 감독에게 이데 유지 선수와 이야기 좀 하고 싶다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김진표 감독은 흔쾌히 자리를 마련해줬다. 그런데 한때 굉장히 좋아했던 래퍼인데 요즘엔 그냥 감독님 소리가 절로 나오는 상황이라 뭔가 애매한 기분이다. 아무튼 김진표 감독 덕분에 이데 유지 선수를 만났다. 이데 유지 선수와 단독으로 만난 건 처음 이었다. 그냥 이방인이 바라보는 국내 리그가 좀 남다르지 않을까 싶어 자리를 부탁했다. “이데 선수, F1에도 출전 했었는데 슈퍼레이스랑 뭐가 제일 달라요?”

 

첫 번째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자본이지요.” 뭔가 굉장히 설득력은 있는데 약간 허무했다. “그렇죠, 자본. 하하하. 다른 건요?” 다시 대답이 돌아왔다. “그 밖의 다른 것들도 다 자본에서 비롯되죠. 조직. 경주. 팀 규모. 구성. 서킷. 경기력에 연관된 것 말고도 많죠. 사소한 것들도. 그런데 자동차 경주는 자본이 중요해요. 돈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경기니까요.” 맞다. 그렇겠다. “이제 슈퍼레이스 들어온 지 3년이나 됐는데 소감은 어때요?” “만족하고 있습니다. 팀이 일단 가장 좋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좋습니다.” “이방인인데 잘 어울리고 있나요?” “여긴 그런 거 없습니다. 따뜻합니다. 따뜻한 사람들입니다.” 이데 유지 선수가 슈퍼레이스에 가장 중점을 두고 뛰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중국에서 열리는 한국의 경주에 참가하는 일본인 드라이버예요. 감회가 남다르지 싶은데요.” “그런 건 별로 없습니다. 그냥 경기에 집중하려고 하고 우승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프로 드라이버입니다.” 어쩌면 그에게 승부보다 더 중요한 건 없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트랙에서만큼은, 멋있었다. 이데 유지.

 

 

 

6월 4일 토요일 오후 7시

저녁엔 김준호 슈퍼레이스 대표이사를 만났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올해 저희가 슈퍼레이스의 중국어 타이틀도 만들었습니다. ‘쑤허 웨이츠(速赫威馳)’라고 최고의 스피드와 패기 있는 질주라는 의미입니다.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이름도 만족스럽고 용인에서 열렸던 개막전도 만족스럽고, 김준호 대표 입장에서는 매우 기분이 좋을 때다. “중국어 타이틀까지 만드셨으면 깊게 자리 잡겠다는 의미로 보이네요.” 김준호 대표가 대답했다. “목표는 중국에서 슈퍼레이스 단독 개최입니다. 중국에서는 직접 하고 동남아에는 판권을 판매하는 쪽으로 진출하려고 하고 있고요. 이번에 영암에서 할 때 엠넷에서 하는 KCON과 같이 하거든요. 내년에는 중국에서 할 때 KCON과 같이 오려고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수익을 내야죠.” 중국에서 꾸준히 대회를 치르는 이유가 명확해 보였다. 프로스포츠의 수익은 연계 상품에서도 꽤 발생한다. 스티커든 옷이든 소품이든. “저희 곧 시작합니다. 용품은 사실 저희가 먼저 제안한 것도 아니고 제안을 받았습니다. 해보자고. 이제 곧 시작할 계획입니다. 국내 최대 유통망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라 좀 더기대가 됩니다.” CJ에서 슈퍼레이스에 투자하기 시작한 게 벌써 10년째다. 그동안 수익을 낸적은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개막전부터 반응이 좋았다. 여기에 좀 더 탄력이 붙었으면 하는게 ‘주식회사’ 슈퍼레이스의 입장이다.

 

6월 5일 일요일 오전 8시 30분

오늘은 주하이 인터내셔널 서킷에 마음먹고 일찍 왔다. 결승전은 오전 10시 55분 시작이었다. 하지만 주행을 마치고 돌아온 차들이 있었다. 시간표를 보니 오전 8시 25분부터 40분까지 15분간 슈퍼레이스 팀들의 웜업 주행이 잡혀 있었다. 하지만 모든 팀이 다 주행하진 않았다. 아직 팀원들도 다 보이지 않는 팀이 많았다. 그래도 분위기는 긴장감이 넘친다. 모두들 신경이 곤두선 듯 날카로웠다.

 

 

 

6월 5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

경기 시작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간의 피트는 정말 분주했다. 10시 55분에 피트를 빠져나가 트랙으로 들어가야 한다. 피트에서 차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 여기저기서 타이어 공기압을 체크하고 보닛을 결합하고 연료를 주입하고 운전대를 교체하고 아주 난리가 아니었다. 선수들도 이제야 제대로 복장을 갖추기 시작했다. 헬멧 버클을 채우고 장갑을 조이는 것조차 뭔가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그만큼 모두 간절해 보였다. 차마 누굴 응원할 순 없었다. 단지 모두의 안전을 바랄 뿐이었다. 멋진 승부와 함께.

 

6월 5일 일요일 오전 11시

슈퍼레이스 스톡카 레이스 주하이 대회 결승이 시작됐다. 스타트는 롤링 스타트 방식이다. 정지한 상태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그리드 순서대로 세이프티카를 따라가다가 세이프티카가 빠져나가면 그대로 달려나가서 출발선을 지난 직후부터 경쟁에 돌입하는 방식이다. 출발하자마자 1번 그리드를 배정받았던 황진우가 뒤로 밀렸다. 그 앞으로 이데 유지가 빠르게 치고 나가며 선두로 올라섰다. 김동은도 소속팀 감독이자 동료인 황진우를 앞서나 갔다. 7번 그리드를 배정받았던 가게야마 마사미도 첫 번째 코너에서의 혼전을 잘 뚫고 나오며 순식간에 3위까지 올라왔다. 

 

두 번째 바퀴에서 가게야마 마사미는 김동은까지 추월하고 2위로 올라섰다. 선두는 여전히 이데 유지였다. 1위와 2위의 거리는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그 뒤쪽의 순위도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첫 번째 바퀴의 치열한 자리 싸움 뒤 잠깐 동안은 숨을 고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평온은 오래가지 못했다. 안현준이 세 바퀴째 코스를 이탈하자 구난 트랙터가 투입됐다. 세이프티카 상황이다. 각 차의 간격이 부쩍 좁아졌다. 멀게만 보이던 이데 유지도 세이프티카 뒤로 정렬했다. 2위인 가게야마 마사미가 그 바로 뒤에 정렬했다. 줄줄이 늘어선 것부터 조짐이 이상했다.

 

세이프티카 상황이 끝나며 가장 빠르게 움직인 건 가게야마 마사미다. 순식간에 이데유지를 추월해 앞서나갔다. 역전 초반에는 두 선수가 박빙의 승부를 펼치며 심장이 두근거리는 상황을 수없이 연출했다. 정말 깻잎 한 장 간격으로 양옆에 나란히 붙어 순위를 경쟁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기가 진행될수록 이데 유지의 경주차는 페이스에서 밀리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당시 브레이크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렇게 간격이 벌어지자 가게 야마 마사미도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경기는 마사미의 독주에 이데 유지와 김동은, 정의철이 뒤쪽으로 따라붙으며 순위가 유지되는 모양새였다. 1라운드 우승으로 50킬로그램의 핸디캡 웨이트를 부과받은 김동은은 순위에 크게 욕심내지 않는 듯 보였고 정의철은 호시탐탐 노렸으나 기회가 나지 않았다. 

 

이때 중위권에서 혈투가 벌어졌다. 김진표와 팀 베르그마이스터, 김재현이 중위권에 몰리며 치열하게 순위 싸움을 벌였다. 그런데 피트인하며 거의 꼴찌까지 떨어졌던 정연일이 어느새 여기까지 치고 올라와 싸움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때 세 대가 붙었다 두 대끼리 경합 했다 네 대가 뒤엉켰다 하며 조마조마한 경주를 이어갔다. 미디어 센터의 중국 기자들까지도 침만 꼴깍꼴깍 삼키며 모니터를 주목하고 있었다. 이날 가장 흥미로웠던 순간이다. 

그러다 경기 후반에 걸린 세이프티카 상황이 경기를 묘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확실히 치고 나간 것 같던 가게야마 마사미와 2위권의 간격이 다시 바짝 붙은 것이다. 세이프티카 상황이 끝나자 가게야마 마사미와 이데 유지가 치열한 선두 경합을 벌였다. 거의 차가 맞닿을 만큼 바싹 다가서며 자리를 지키려, 그리고 꿰차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두 선수의 경합은 김동은에게 오히려 행운이 됐다. 김동은은 50킬로그램의 우승 핸디캡을 안고 있었기에 경기 내내 무리해서 욕심내 주행하지 않았다.

 

그 덕에 경기 막판까지 타이어 그립이 남아 있었다. 그 말은 곧 다른 선수들보다 코너를 훨씬 빠르게 돌 수 있었단 얘기다. 아니나 다를까, 김동은은 20바퀴째에서 선두를 놓고 싸우던 이데 유지와 가게야마 마사미를 코너에서 한꺼번에 추월했다. 두 선수는 아마 서로만 신경썼을 뿐 김동은을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우측으로 꺾어진 코너인데 좌측에서 경합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후 가게야마 마사미는 정의철에게도 추월당해 4위로 밀렸다. 체커기를 받기 불과 2바퀴 전에 이 모든 상황이 벌어졌 고 종료됐다.

 

 

6월 5일 일요일 오후 1시 30분

경기가 끝난 흥분이 채 가라앉기 전 우승자 김동은 선수를 만났다. 아직도 얼굴이 벌겠다. “추월은 아니었어요. 그냥 두 선수가 순위 싸움을 벌이다 순식간에 공간이 나타났는데 제가 그냥 그리로 지나간 거였죠. 저는 계속 페이스만 유지하고 달려서 타이어 그립이 많이 남았거든요.” 아직 앳된 얼굴에 천진난만한 표정이 감돈다. 하지만 그건 표정일 뿐이다. 오늘 김동은은 우승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사실 누구에게도 포기란 없었다. 그게 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