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N 브랜드가 개발 중인 2.0리터 엔진을 i30에 이식해 뉘르부르크링 레이스에 나섰다. 우승컵은 들지 못했지만 엔진 트러블 없이 경주를 완주한 것만으로도 성과는 혁혁했다.

 

 

24시간 내구 레이스는 경주차와 드라이버 그리고 미캐닉들에게 처연하고 처절한 경주임이 틀림 없다. 그들은 24시간 동안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끝까지 남은 승자는 달달한 샴페인으로 목을 축인다. 단지 그것뿐이다. 24시간을 완주 했다고 해서 엄청난 돈방석에 앉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다 알아줄 만큼 이름을 날리지도 못한다. 그저 세상을 다 가진 기분뿐이다. 단지 그것뿐이지만 24시간 레이스는 어느 레이스보다 진한 감동이 전해진다. 지난 5월 28~29일 펼쳐진 뉘르부르크링 24시간 내구레이스가 그러했다.

 

독일 현지 시간으로 5월 28일 오전 10시, 경주 시작까지 5시간 30분이나 남았지만 녹색지옥 주변엔 수많은 사람과 차로 득시글거렸다. 이곳은 축제의 현장이다. 각자 응원하는 팀과 국적기를 흔들고 응원용 나팔을 불어댄다. 경주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이미 거나하게 취한 관중도 있다. 자동차들도 볼만하다.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포르쉐 968 카브리 올레가 아무렇지도 않게 굴러다닌다. 그래도 그랜드스탠드가 있는 GP 슈트레케는 양반이다. 노르트슐라이페의 브륀헨(Bru. .nnchen) 코너는 그야말로 ‘난민촌’이다. 수많은 사람이 일주일 전부터 텐트를 치고 정박하고 있다. 경주가 열리기 전까지 할 일이 없으니 매일 밤 캠프파이어다. 그래서 여기저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주변은 맥주캔과 소시지 포장지가 어지럽게 널렸다. 불잉걸에는 부러진 의자와 우산,슬리퍼, 각종 음식물 포장지 등 태우지 말아야 할 것들이 검은 연기를 낸다. 시간이 지날수록 태울 게 없어지면서 무지한(?) 수를 낸 것이다. 우리나라의 스포츠 관람 문화는 이곳에 비하면 양반이다.

 

GP 슈트레케 입장로는 각 자동차 브랜드의 홍보와 마케팅 창구다. 메르세데스 AMG, 아우디, 토요타, 닛산, 미쉐린 등이 큰 부스를 차리고 경주차 등을 전시하고 기념품을 나눠준다. 작은 모터쇼가 열린 셈이다. 입장로를 지나면 3층으로 된 엄청난 규모의 그랜드스탠드와 이어진다. 이미 만석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랜드스탠드에서 서킷을 보니 이미 그리드워크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경주차들 맨 앞엔 부가티 시론도 보인다.

 

한참을 걸어 그리드에 닿았다. 여긴 그랜드스탠드보다 더 북적거린다. 나처럼 스탠드에 자리를 잡지 못한 이들이 경주차와 드라이버를 보면서 안위를 찾는 곳이다. 가장 앞에 있는 부가티 시론은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사람도 많고 경주차도 많아(159대 참가) 맨 앞까지 걸어갔다가는 경주가 시작될 것이다. 특히나 앞쪽은 가장 관심이 많은 GT3 차들이 정렬했기에 엄청난 인파가 몰린다. 키 작은 동양인은 미아가 될지도 모른다.

 

불빛의 향연 서킷에 제대로 된 가로등이 전혀 없다. 야간에는 오로지 헤드램프에만 의존해 달려야 한다.

 

하는 수 없이 그리드 뒤쪽으로 걸었다. 한국의 모터스포츠 그리드워크와는 분위기가 약간 다르다. 여긴 레이싱 모델이 거의 없다. 관중과 드라이버, 미캐닉이 대다수다. 경주차도 도어를 활짝 열어둔다. 경주차에 몸을 끼워 넣는 관중도 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익숙한 모습의 차가 보인다. 바로 현대 i30다. 현대차 N 브랜드는 개발 중인 2.0리터 터보 엔진을 i30에 이식해 경주에 참가했다. 좀더 엄밀히 말하자면 현대차가 참가하는 게 아니라 현대차 독일 법인이 꾸린 모터스포츠팀슈만(Schumann)이 참가하는데 엔진을 공급한 것이다. 슈만은 지난해에도 i30와 벨로스터  1.6 터보로 참가해 완주한 경험이 있다.

현대차가 뉘르부르크링 24시간 경주에 엔진을 공급한 이유는 엔진 개발 과정의 일환이라고 한다. 가장 가혹한 조건의 자동차경주에서 엔진을 테스트하면서 성능과 내구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현대차는 뉘르부르크링에 연구개발 센터를 오픈하면서 다양한 루트로 자동차를 개발하는 여건을 마련한 셈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리스크도 있다. 내년 출시를 목표로 한창 개발 중인 엔진이 트러블을 일으켜 완주하지 못했을 경우 소비자 신뢰도가 떨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현대차가 경주차에 개발 중인 엔진을 넣은 것은 좀 더 완벽한 데이터 수집과 더불어 완주했을 때 소비자들의 한껏 높아지는 기대감 때문이다.

 

경주차는 일반 i30보다 훨씬 더 과격하게 생겼다. 펜더는 툭 불거졌고 냉각을 위해 그릴을 몽땅 뚫었다. 뒤도 엄청나게 큰 디퓨저를 달았다. 바퀴는 오즈 레이싱 18인치 휠에 한국타이어 벤투스를 끼웠다. 실내는 완전히 다르다. 모든 것을 다 떼고 버킷시트와 롤케이지 그리고 각종 전자 및 통신장비뿐이다. 사실 이 차는 i30 껍데기지만 그 안쪽의 하드웨어는 i30와 공유하는 게 많지 않다.

 

경주를 위해 거의 새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트는 세 명의 독일인과 한명의 핀란드 드라이버가 번갈아가며 앉게 된다. 경주차 안쪽 사진을 찍다 보니 그리드워크가 끝났다. 관중들이 워낙 많아 다 나가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그리드가 정렬되자 페이스카 아우디 R8을 따라 포메이션 랩이 시작된다. 서킷이 25킬로미터나 되니 포메이션 랩도 오래 걸린다. 159대의 경주차가 열 맞춰 서킷을 달리는 모습도 장관이다. 그 소리가 어마어마하다.

 

뉘르부르크링 24시간 레이스는 르망, 스파 프랑코샹과 함께 유럽 3대 24시간 내구레이스로 꼽힌다. 그중에서 뉘르부르크링이 가장 가혹한 조건이다. 세 개의 서킷 중에서 가장 길고 코너가 많으며 고저차가 심하다. 또한 코스마다 노면 그립이 다르고 서킷이 높은 곳에 위치해 기후변화도 심하다. 경주가 열린 날에도 GP 슈트레케는 해가 떴는데 노르트슐라이 페는 우박이 쏟아지기도 했다.

 

 

티켓을 지닌 관중은 누구나 그리드워크에 참가할 수 있다. 모든 경주차와 드라이버들을 만날 수 있다. 경주차에 앉을 수도 있고 차체 어디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국내 모터스포츠처럼 제약이 많지 않다.

 

 

현대 i30N 경주차는 초반에 페이스가 좋았다. 순위를 끌어올리며 잘 달렸다. 하지만 다음 날 새벽 로어암이 부러지면서 많은 시간을 피트에 있어야 했다.

 

 

포메이션 랩이 끝나고 롤링스타트가 시작되면 모든 관중이 탄성을 지르며 경주장 분위기가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이제부터 24시간의 혈전이 펼쳐지는 것이다. 가장 앞에 선 SP 9 클래스는 메르세데스 AMG, 아우디 R8,벤틀리 컨티넨탈, 람보르기니 우라칸 등 무시 무시한 GT3카들이 엄청난 굉음을 내며 튀나간다. 그 소리가 F1은 저리 가라다.

 

스탠드에 앉지 못했다고 해서 서킷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쉽지 않다. 여긴 워낙 넓어 걸어서 다닐 수가 없다. 걷는다 해도 몇 시간이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서킷 근처로 가기로 했다. 노르트슐라이페 부근에는 서킷이 잘 보이는 곳이 많다. 그곳마다 난민촌과 같은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곳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는 경주차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급한 코너를 끼고 있어 경주차의 다이내믹한 움직임을 관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그랜드스탠드는 직선이다. 때문에 차들이 너무 빨라 잘 보이지도 않는다.

 

경주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부터 백마커가 생겼다. GT3 차들은 그만큼 빠르다. SP 9 클래스에 출전한 GT3카는 모두가 프로 레이서들이고 그 외의 클래스는 준프로와 아마추어들이 달린다. 뉘르부르크링 24시는 엔진 배기량과 과급기 등에 따라 클래스가 22개로 세분돼 있다. 중요한 것은 모두 양산차 베이스라는 것. 르망 24시간처럼 프로토타입은 출전할 수 없다.

 

i30 2.0 터보가 출전한 SP 3T 클래스에는 모두 7대가 경쟁을 벌였다. 재미있는 건 토요다 아키오 사장이 ‘모리조’라는 가명으로 렉서스 RC를 타고 SP 3T 클래스에 출전했다는 것. 세계 최대 자동차 메이커의 수장이 가장 가혹하고 위험한 경주에 출전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이슈였다. 현대차와 토요타의 경쟁도 또 다른 흥밋거리였다. 현대 i30N은 순조롭게 출발했다. 출발과 함께 서킷 여기저기에서 사고 소식이 이어졌고 황색기가 발동되며 SC 상황이 이어졌지만, i30N은 리타이어 리스트에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내렸고 상황은 더좋지 않았다. 많은 차가 타이어를 바꾸기 위해 피트인하면서 피트가 북적거리는 모습도 연출됐다. 재미있는 건 F1이나 르망처럼 피트가 아주 부산스럽게 움직이지 않는다. 주유 속도가 늦기 때문이다. 엄청난 압력으로 연료를 쏘는 게 아니라 일반 주유소처럼 연료가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이어 네 개를 모두다 갈고 드라이버들이 하이파이브하며 교체해도 시간이 남는다.

 

드라이버 체인지가 이렇게나 한가로울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이유는 주유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 주유소에서 사용하는 주유기 압력과 같아 피트인 시간이 길다. 모든 팀이 똑같은 주유기를 사용하니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서킷 가장 서쪽인 아렘베르크 구간에 우박이 쏟아졌다. 여러 대의 차가 그립을 잃고 충돌하면서 리타이어했다. 노면이 얼면서 3시간 넘게 경주가 지연됐다. 뉘르부르크링이 ‘녹색지옥’이라 불리는 이유에는 이런 이상기후도 포함된다. 다행히 지옥의 기운은 i30N을 피해갔고 더불어 밤사이 순위를 계속 끌어올리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i30N이 아직 살아 있는지 궁금했다. 호텔에서 실시간 앱을 돌려보니 피트에 한 시간 이상 머무는 걸 확인했다. ‘혹시 엔진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했는데 로어암이 부러졌다고 한다. 순위가 떨어졌지만 경주는 계속됐다. 그리고 SP 2T에 출전한 벨로스터 1.6 터보는 클래스 1위에 올랐고 i30 1.6 터보도 계속 달리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다시 비가 내렸다. 뉘르부르크링은 드라이버와 경주차에도 가혹하지만 관중에게도 힘든 곳이다. 진창이 된 흙바닥이니 관람 여건이 좋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서킷 주변은 우비를 입은 관람객으로 바글바글하다. 오늘을 위해 휴가를 내고 프랑스와 벨기에 등에서 며칠씩 차를 끌고 온 이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1년에 단 한 번뿐인 경주를 그렇게 즐기고 있는 것이다.

 

경주가 끝날 무렵이 되자 먹구름이 걷히고 서킷에 햇빛이 떨어졌다. 하늘이 24시간의 악천후를 견딘 104대의 경주차에 은총을 내리는 듯하다. 2016 뉘르부르크링 24시간 레이스의 완주율은 65.4퍼센트였다. 그 안에는 현대차 석 대도 포함된다. 벨로스터 1.6 터보가 총104랩을 돌아 SP 2T 클래스 우승을 차지했다. 전체 순위는 65위다. 같은 클래스에 출전한 i30 1.6 터보는 82랩으로 전체 97위를 기록했다.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은 i30N도 91랩을 돌아 전체 90위 성적으로 완주했다.

 

애초 현대차의 목표는 i30N이 완주하고 SP 2T 클래스에서 두 대의 차 중 하나가 클래스 우승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목표 이상을 달성한 것이다. i30N의 엔진이 아무런 트러블이 없었다는 것도 큰 의미다. 최악의 조건을 견뎌낸 엔진인 만큼 양산차에서 좋은 성능을 낼 것으로 기대한다. 지금은 245마력이지만 개발이 끝나는 시점에서는 300마력 이상이 될 것이라고 하니 그 기대감은 더 크다. 더불어 부디 이번 경주가 현대차와 N 브랜드의 기술 개발에 좋은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 그래야 한국인들이 더 즐겁고 재미있는 차를 많이 타게 될 테니까. 아울러 24시간 동안 처절한사투를 벌인 드라이버와 미캐닉에게도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