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취향은 작은 차 쪽에 기울어 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큰 차가 싫지는 않다. 차급이나 구성에 따라 모델의 개성이 잘 반영된 차, 덩치에 걸맞은 분위기와 꾸밈새, 달리기 실력을 고루 지닌 차라면 언제나 환영한다. 이번에 모인 차들은 모두 아이덴티티가 뚜렷한 브랜드들의 간판 대형 모델이다. 그 가운데 두 모델, 레인지로버 보그 SE와 메르세데스 AMG GLE 63 4매틱을 꼼꼼히 살폈다.

먼저 오른 건 레인지로버다. 이번 시승을 위해 모인 넉 대의 대형 SUV 가운데서도 가장 몸집이 크다. 큰 덩치는 숫자에만 그치지 않는다. 일단 외모에서부터 대형 SUV의 중요한 덕목을 갖추고 시작한다. 차체 디자인에 쓰인 선과 면이 가장 단순한 덕분에 각져 보이는 차체가 주는 위압감도 단연 돋보인다. 지나치게 육중해 보이지 않도록 곳곳에 스며든 디자인 요소들도 레인지로버의 존재감을 감추지는 못한다. 그러면서도 미국식 풀 사이즈 SUV와 달리 세련미와 격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디자인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다만 오프로드의 황제라는 이미지와는 조금 동떨어져 보일정도로 뒤 오버행이 길다. 레인지로버의 위상이나 역할이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음을 증명하는 부분이다.

넉 대 중 몸집이 가장 큰 레인지로버는 위압감이 대단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세련미도 돋보인다. 높고 넉넉한 실내공간, 차고 넘치는 편의장비, 광활한 적재공간은 알찬 럭셔리카로 진화한 SUV의 형태를 제대로 보여준다.

대담해 보일 정도로 간결한 선과 면으로 디자인한 것은 실내도 마찬가지다. 직선과 평면을 부드럽게 다듬은 디자인은 실내를 넓어 보이게 하면서 중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질감 좋은 크림색 가죽과 깊이 있는 갈색 계열의 빛나는 우드 그레인, 깔끔한 느낌의 반 광택 알루미늄색 장식이 적당히 어우러져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실내를 감싼다. 바닥과 좌석 앉는 부분이 높은 실내에 오르내리기가 쉽지는 않지만, 앉아만 있어도 자연스럽게 크고 넓고 고급스러운 차에 타고 있다는 기분에 휩싸인다.

모든 부분이 LCD 스크린으로 되어 있는 계기판을 비롯해 서라운드 카메라 영상도 확인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스크린, 블루투스 기능과 섀시 제어 관련 기능 등 많은 부분이 디지털이면서 랜드로버의 전통을 이어받아 아날로그 감성으로 표현돼 있다. 앞좌석 사이에 넓은 센터콘솔이 놓여 있는데도 공간은 넉넉하고, 약간 낮게 깔린 대시보드 덕분에 시야는 탁트여 있다. 높이 앉아 주변을 내려다보듯 운전 할 수 있는 SUV의 장점이 돋보인다. 스포티한 분위기를 강조해 대시보드와 도어에 조금은 파묻히듯 앉게 되는 요즘 많은 SUV들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뒷좌석 편의장비도 아쉬울 게 없다. 8인치 크기의 스크린이 두 개 마련된 뒷좌석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이 조금 작아 보이는 이유는 앞좌석과의 거리가 넉넉해서다. 함께 시승한 차들 중 휠베이스가 가장 긴 것은 아니어도 너비와 길이, 높이의 조화가 이루어내는 체감 여유공간은 매우 훌륭하다. 두툼한 쿠션 덕분에 편안하게 느껴지는 좌석도 여유 있는 분위기를 더한다. 앞뒤 좌석 모두 공간이 충분한데도 뒤쪽에 광활한 적재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은 역시 다목적으로 쓰기에는 큰 차가 제격 이라는 사실을 재확인시켜준다. 트렁크 바닥이 조금 높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이제는 레인지로버라면 짐을 싣고 내릴 때의 불편함을 오너가 직접 겪을 일이 많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