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제너레이션의 반란 

지난 9월 19일, 청담동에 아크네 스튜디오의 국내 첫 플래그십 스토어가 오픈했다. 영국 유명 건축가 소피 힉스가 디자인한 것만으로도 이슈몰이를 했지만 청담동을 오가는 많은 이들을 눈길을 사로잡은 건 공사 중인 외관을 뒤덮은 브랜드의 2015 F/W 광고 캠페인 현수막이었다. 모델로 등장한 인디언 핑크 컬러의 여성용 코트를 입은 금발 소년(아크네 스튜디오의 수장 요니 요한슨의 아들)은 하이힐에 손가락을 뒤덮는 볼드한 반지와 코걸이까지 착용하며 궁금증을 자아냈다. 패션쇼에선 모델의 종아리를 장식하던 코트가 길게 내려온 걸 보면 언뜻 보아도 10대 초반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크뮈스의 2016 리조트 컬렉션 룩북엔 프랑스 여배우 조아나 프레이스 옆에 긴 머리를 휘날리는 히피풍 소년이 등장한다. 성인용 핀 스트라이프 슈트를 입고 자동차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는 바로 자크뮈스의 조카다. 또 마크 제이콥스는 광고 캠페인 모델로 위노나 라이더와 소피아 코폴라 등 최고의 셀레브리티와 당당히 어깨를 겨룰 인물로 베티 로(9세, 마크 제이콥스 광고에 등장한 모델 데이지 로의 동생)와 윌로 스미스(14세, 윌 스미스의 딸)를 택했다.

아동복 모델로 적합한 이들을 왜 어른처럼 꾸며 광고 캠페인에 등장시킨 걸까. 이에 대해 아크네 스튜디오의 디자인 디렉터 요니 요한슨은 “정해진 규칙이나 사회, 위치에 얽매이지 않고 옷 자체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새로운 세대를 생각했고, 이런 영감을 불어넣은 아들 프라세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아들을 모델로 세우며 옷 자체의 커팅과 디자인, 실루엣 등을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10대를 향한 패션계의 뜨거운 구애는 비단 이번 시즌만의 일은 아니다. 대체 불가능한 묘한 매력으로 신선하고 유쾌한 자극을 선사해 하이패션의 주 타깃인 30~40대 소비자를 유혹하는 것. 최근 샤넬 아이웨어 캠페인 모델로 활동 중인 릴리-로즈 멜로디 뎁(배우 조니 뎁과 바네사 파라디의 딸)도 16세고, 10월호 영국 <태틀러> 커버를 ‘Fashion Princess’란 타이틀과 함께 장식한 이도 16세의 탈리타 폰 퍼스텐버그(할머니가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다. 신디 크로퍼드를 똑 닮은 딸, 카이아 조던 거버(14세) 역시 지난 7월, 오빠인 프레슬리 워커 거버와 함께 IMG 모델과 정식 계약을 마쳤고, 내로라하는 잡지의 화보에 등장하며 주목받고 있다.

패션업계가 원하는 새로운 아이콘은 조금은 미성숙하지만 신선함으로 무장한 10대인 걸까. 나이 드는 것을 거부하는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본능적으로 젊음을 원하고 정해진 틀 없이 자유롭게 사고하는 10대 모델의 모습에서 대리 만족을 얻을지도 모르겠다. 여자의 옷인지 남자의 옷인지, 어른의 옷인지 아이의 옷인지 주위를 신경 쓰지 않고 사고 싶은 것을 살 수 있다는 행위만으로도 유쾌하고 긍정적인 기분을 선사할 테니 말이다.

할머니를 따르라! 

한편 새롭고 신선한 것만을 좇는 패션계에 반기라도 들 듯 할머니에게 열광하는 움직임이 눈길을 끈다. 어리고 핫한 모델만 브랜드의 광고 캠페인을 장식한다는 공식을 가뿐하게 무시한 채 예순이 훌쩍 넘는 백발의 여인들을 뮤즈로 내세우며 ‘그래니 시크’ 신드롬을 예고한 것. 모델이자 스타일리스트인 60대의 린다 로딘은 2014 프리폴 시즌 더로우의 룩북과 카렌 워커 선글라스의 모델로 활약했으며, 90년대의 전설적인 뉴욕의 패션 아이콘 아이리스 아펠(94세)은 케이트 스페이드와 주얼리 브랜드 알렉시스 비타의 광고 캠페인에 등장했다. 
 

2015 S/S 시즌 셀린은 미국 <보그> 에디터 출신의 여류 작가 존 디디온(81세)을, 생로랑은 70년대를 주름잡은 캐나다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조니 미첼(72세)을 광고 모델로 내세웠고, 돌체앤가바나는 주름이 깊게 팬 이름 모를 할머니를 기용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포토그래퍼이자 블로거인 60대의 아리 세스 코헨은 ‘어드밴스드 스타일(advancedstyle.blogspot.com)’의 시니어 패션 블로그 내용을 책으로 정리해 출간하는가 하면, <은발의 패셔니스타>란 다큐멘터리로 재구성해 이슈를 모으기도 했다. 또 베디 윙클이라는 예명으로 인스타그램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87세의 할머니는 손녀의 옷을 이용해 자신만의 감각이 돋보이는 신개념의 의상과 장신구를 만들고 셀피를 찍어 올리며 팔로어 160만여 명을 거느리고 있다.

이번 시즌 런웨이에서도 트위드나 퀼팅, 벨벳 등 투박한 소재와 체크, 꽃 등의 프린트가 등장해 한 단계 진화한 그래니 룩을 선보이며 힘을 더한다. 구찌는 빈티지 숍에 걸려 있을 법한 먼지 쌓인 빅 칼라 코트와 할머니들이 애용하던 슬리퍼를 연상시키는 슈즈를, 막스마라는 마릴린 먼로를 오마주한 만큼 우아한 여인에 가까운 그래니 룩을, 샤넬은 할머니들의 페이버릿 아이템으로 군림해온 미들 펌프스를, 돌체앤가바나 역시 방한용 헤드 스카프 등을 선보였다. 게다가 하얗게 센 머리를 연상시키는 헤어 컬러가 아크리스와 메종 마르지엘라 런웨이에 등장하며 은은한 은발 헤어가 우아함의 상징임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래니 시크의 부상은 패션은 20~40대의 전유물이란 진부한 고정관념을 환기, 새로운 시각을 부여한 것이 가장 큰 소득이다. 혹자들은 할머니를 뮤즈로 한 스타일이 인기인 이유를 ‘경기 불황으로 실질적인 소비자의 연령대가 높아졌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나이 든 당당한 여성의 모습이 선망이 되는 시대라는 사실만으로도 반갑다. 적어도 패션계에서만큼은 나이의 경계를 허문 다양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지 않은가. 틀을 깨는 신선한 모델은 패션 브랜드가 추구하는 이미지를 잘 표현하는 매개체가 될 것이고, 소비자는 ‘나이 든다는 건 축복이고 쿨한 일이란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