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명의 모든 물건 중에서 의자만큼 디자인이 다양한 것은 없다. 하나 모든 의자는 잠시 지나가는 자리다. 스치듯 지나가거나 주인공이 아무렇지도 않게 털썩 앉는 의자는 영화 속에서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단지 기능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의자에 앉는 사람의 부와 지위, 개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러 디자인의 물건 중 유독 의자에 눈길이 간다.

앤드루 니콜 감독의 영화 <가타카>를 보았는지. 이 영화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유전자를 분석해 그의 수명은 물론 범죄 가능성 등의 미래를 완벽하게 알아낸다. 그 아이는 분석된 운명을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을 우수한 유전자와 열등한 유전자로 나누어 완벽하게 통제하는 사회다. 그 미래 사회는 빈틈없는 아름다움을 추구한 초기 모더니즘 디자인으로 구현되었다. 바우하우스의 마르셀 브로이어나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구현한 강철관 의자와 어떠한 장식도 없는 벽면, 한마디로 인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공간이다. 건물은 이른바 브루탈리즘(Brutalism: 마감하지 않은 재료를 드러내고 설비도 노출시키는 야수적인 건축양식)을 표방한다. 특히 우수한 유전자로 분류된 주드 로가 사는 공간은 대단히 바우하우스적이다. 크롬 도금한 강철관으로 만든 바르셀로나 체어와 셰이즈 롱은 완벽하지만 메마른 이들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바우하우스의 강철관 의자들은 이렇듯 두뇌가 우수하고 사회적 지위는 높지만, 인정머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에 자주 등장한다. 그 의자들이 갖고 있는 번쩍거리는 표면과 차가운 금속성 때문이리라. 에이드리언 라인의 에로틱한 영화 <나인 하프 위크>에서도 이들 바우하우스 의자는 적절하게 사용되었다. 남자 주인공 미키 루크는 성공한 주식 중개인이다. 서랍을 완벽하게 정리하는 그는 서랍 속 물건을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알아챌 정도로 철두철미한 인간이고, 오직 육체적으로만 사랑을 나누는 정서적 불구자다. 여자 주인공 킴 베이싱어가 그의 아파트를 처음 방문하는 장면. 역시 장식 없는 썰렁한 벽, 찰스 레니 매킨토시의 세련된 기하학적 의자, 마르셀 브로이어의 냉정한 바실리 체어가 놓여 있다. 여자는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은 공간에서 어색하기만 하다. 

현대 문명과 그것의 산물인 모더니즘 의자를 가장 신랄하게 조롱한 영화로 자크 타티의 <나의 삼촌>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영화에는 가식적이고 잘난 체하는 성공한 사업가 부부가 나온다. 부인이 모던 양식으로 새집을 짓고 인테리어를 한 뒤 친구들에게 최신식 집이라며 자랑한다. 장식이 전혀 없는 집은 조그만 흠집이 나도 금방 티가 나므로 그 부인은 끊임없이 걸레를 들고 여기저기를 쓸고 닦는다. 집 안의 모든 벽면을 흰색으로 창백하게 마감했고, 바닥은 윤이 반질반질 난다. 끔찍할 정도로 건조하고 차가운 가운데 심플한 금속 의자들이 놓여 있다. 이 집은 마치 청결과 질서야말로 현대의 중요한 관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질식할 것처럼 깔끔한 환경은 풍요하게는 살지만 공허하고 가식으로 가득 찬 현대인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지운이 연출한 <달콤한 인생>의 첫 장면, 주인공 이병헌은 비록 폭력의 세계이지만 작은 성취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 조직이 속한 건물 스카이라운지에서 여유롭게 커피와 초콜릿 케이크를 즐긴다. 그곳은 피에르 폴랭이 디자인한 빨간색 오렌지 슬라이스 체어와 작고 예쁜 스탠드로 채운 말 그대로 달콤한 공간이다. 영화 마지막도 이 달콤한 공간에서 펼쳐지는데, 이번에는 이곳이 온통 피로 물든다. 그 달콤한 공간은 결국 조직의 중간 보스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던 것이다. 의자라는 하나의 물체는 이처럼 영화 속에서 어떤 공간, 어떤 디자인의 것으로 연출되느냐에 따라 안식과 행복일 수도, 혹은 불행과 불안이나 공포의 상징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