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피아트 500X가 출시됐다. 지난 몇 년 동안 오늘만 기다려왔던 한국의 피아트다. 그동안의 설움을 보기 좋게 떨쳐내고 라이벌에게 카운터펀치를 날리고 싶었을 터다. 그들은 이미 귀여우면서도 개성 뚜렷한 외모를 자랑하는 500를 보유하고 있다. 소형 SUV의 붐을 충족하는 500X는 피아트 브랜드가 한국 시장에서 새롭게 입지를 다지기에 최적의 모델이다.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500X의 신차 효과에 힘입어 지난 3월 피아트 판매는 2월(36대)보다 2.5배 늘어난 91대를 기록했다. 500X도 첫 달에 43대가 판매됐다. 하지만 3월 시장 전체가 2월보다 54퍼센트 증가했던 걸 감안하면 신차 효과가 그만큼 큰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바로 한 달 뒤 500X 판매량은 3분의 1인 16대로 곤두박질쳤다. 피아트 브랜드 전체 판매량도 다시 58대로 수그러들었다. 비장의 무기였던 500X는 이렇게 끝나는 걸까? 한국에서 피아트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너무 빨라 실패한 초창기

피아트는 한국과 인연이 깊은 브랜드다. 무려 50년도 넘은 1964년 피아트와 기술제휴를 맺은 아시아자동차가 1970년에 피아트 124를 생산했기 때문이다. 124는 일본 토요타와 합작한 신진 코로나, 영국 포드와 손잡은 현대 코티나와 경쟁했다. 124는 판스프링이 승용차에 널리 쓰이던 시절에 네 바퀴 코일스프링 서스펜션을 사용하고 페라리 기술이 담긴 엔진으로 경쾌한 사운드를 뽐내는 등 수준 높은 엔지니어링을 자랑했다. 기아자동차도 피아트의 최고급 세단인 피아트 132를 생산한 바 있다. 132는 한국에 최초로 DOHC 엔진과 5단 수동변속기를 선보인 고성능 세단이었다. 이처럼 피아트는 한국에 하이테크와 스포츠세단이라는 유럽 세단의 면모를 선보였다. 다만 한국 자동차 시장의 발전 단계에 비해 너무 빨랐다는 게 문제였다. ‘사업은 한 발 빠르면 대박, 두 발 빠르면 쪽박’이라는 격언이 말해주듯 10여 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피아트의 국내 합작 생산은 1만대 남짓한 판매량만 남기고 1981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1987년 수입차 시장이 열렸다. 피아트는 한국 최초의 수입차 브랜드 중 하나였다. 금호그룹을 공식 수입사로 둔 피아트는 고성능 터보 세단인 크로마 터보 i.e.를 비롯해 소형 SUV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판다 4WD 등 색깔이 뚜렷한 라인업을 갖추고 있었다. 판매량에서도 1989~90년에 각각 80대 전후를 기록하는 등 BMW와 벤츠의 뒤를 잇는 베스트셀링 브랜드 중 하나였다. 하지만 다른 브랜드들이 고가 차량의 취득세 중과세(15퍼센트) 부과 문제가 해소된 1994년을 기점 삼아 급격한 성장세를 보인 것과 달리, 2000cc 중형차가 가장 큰 모델이었던 피아트는 점점 설 자리가 좁아졌고 같은 해 완전 철수하고 말았다. 이후 이탈리아 모터스를 통해 1996~97년 다시 진출했지만 IMF 금융위기와 함께 수입차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피아트 브랜드의 수줍은 컴백

지난 2013년, 피아트가 다시 돌아왔다. 500 시리즈와 프리몬트를 통해서였다. 피아트의 재진출은 여러모로 관심 대상이었다. 500라는 아이코닉 모델에 대한 관심이 첫째였다. 동시에 부족한 라인업을 어떤 전략으로 해결할 것인지, 딜러 네트워크는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도 컸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궁금증에 대한 답은 다분히 논리적이었다. 해치백과 오픈톱 모델(500C)로 구성된 아이콘 500로 피아트 브랜드의 이미지와 판매량을 기대한다는 건 미니가 초창기에 쓴 전술이었다. SUV 붐에 편승하기 위해 2.0리터 디젤을 얹은 7인승 구성의 프리몬트를 추가한 것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딜러 네트워크를 새로 구성하는 대신 기존 딜러에 피아트 코너를 설치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으로 보였다. 라인업이 부족한 브랜드에의 과도한 투자를 방지하는 동시에 짧은 기간에 많은 딜러를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곳곳에 있었다. 우선 도입 시기가 계속 연기되면서 피아트 500를 기다리던 소중한 초기 고객들 상당수가 병행수입사로 흡수됐다. 또 한국 규정에서 요구하는 OBD2가 적용되지 않아 고객들이 기다리던 야무진 0.9리터 트윈에어나 트윈에어 터보 엔진 대신 북미 모델용 1.4리터 멀티에어 엔진을 가져온 점도 아쉬웠다. 결정적인 문제는 가격 정책이었다. 2013년 2월에 2990만원으로 선보인 500 라운지 모델은 출시 5개월 만에 차량 가격의 20퍼센트에 달하는 450만원을 인하 했다. 그러다 2013년형 최종재고 처리 때는 무려 1160만원을 할인해 1830만원까지 인하됐다. 15개월 만에 차값이 3분의 1이나 떨어진 것이다. 그 결과 배신감을 느낀 소중한 초기 고객이 브랜드를 떠났고, 500 구매 의사가 있던 새로운 가망 고객들은 가격이 언제 또 떨어질지 몰라 구입을 결정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초래됐다. 500 가격은 2015년 페이스리프트 모델 출시와 함께 2000만원 초중반으로 자리 잡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귀여운 500 시리즈와 달리 점잖고 실용적인 이미지를 지닌 프리몬트가 퇴출된 것이다. 프리몬트는 출시되고 1년 반도 채우지 못한 2014년 5월에 전시장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500X의 경쟁상대를 찾아서

프리몬트 퇴출에 적잖은 역할을 한 존재가 있다. 바로 500의 SUV 버전, 즉 500X였다. 500X는 프리몬트가 퇴출된 지 10개월만에 출시됐다. 500X는 아이코닉한 500인 동시에 SUV이기 때문에 실패할 수 없는 모델로 보였다. 한국의 피아트는 500X의 신차발표회에서 정확하게 경쟁상대를 지목했다. 미니 컨트리맨이었다. 미니는 프리미엄 소형차 브랜드가 어떻게 하면 시장에서 자리 잡을 수 있는지 보여준 성공사례다. 또 컨트리맨은 귀엽지만 작은 차라는 미니 브랜드의 한계를 뛰어넘어 보다 넓은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게 한 ‘큰 미니’다. 피아트 500 및 500X와 정확히 일치하는 관계인 셈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두 가지 큰 이유가 있다. 첫째는 피아트와 미니 브랜드의 위상 차이다. 아무리 FCA코리아가 피아트 500 시리즈와 미니 브랜드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려 해도 시장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미니는 차의 크기는 작지만 프리미엄 브랜드로 대접받는 아주 독특한 경우다. BMW코리아는 미니 브랜드를 지금 위치로끌어올리기 위해 처음 한국에 진출할 때부터 당시 수입차 메카였던 도산대로에 미니 독립 전시장을 오픈했다. 그 다음에도 미니가 BMW 계열 브랜드임을 각인시키고 프리미엄 브랜드로서 인식을 심기 위해 ‘BMW 미니’라는, 약간 무리가 있는 브랜드 이름을 꾸준히 써나갔다. 초기엔 가솔린 위주의 스포티하고 앙증맞은 모델로 라인업을 구성해 뚜렷한 이미지를 만들었고, 2세대부터는 디젤 라인업과 컨트리맨으로 시장 흐름과 대중적 기호에 발맞춰 갔다. 그렇게 폭발적인 성장을 이끈 다음 3세대 부터는 5도어와 한 체급 커진 클럽맨으로 상위 세그먼트로의 확장을 꾀하고 있다. 이 같은 일련의 작업은 10년에 걸쳐 차근차근 이뤄졌다. ‘커진 미니는 더 이상 미니가 아니다’는 비판까지 피할 수는 없었지만 미니는 확고하게 다져온 프리미엄 브랜드 이미지와 충성도 높은 고객층을 바탕으로 이를 헤쳐나가고 있다.

 

 

 

 

피아트는 달랐다. 합리적인 판단이긴 했지만 별도 전시장 없는 셋방살이 브랜드는 고객들에게 아쉬운 첫인상을 남겼다. 오프로더인 지프와 보수적인 크라이슬러 세단과 전시장을 나눠 쓰는 피아트 500도 위축돼 보였다. 가망 고객들은 브랜드에 전폭적인 투자가 이뤄지지 않을지 모른다는 점에서 브랜드의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갖기 어려웠다. 나아가 일관성 없는 가격정책과 프리몬트의 조기 퇴출 등의 사건(?)은 재산목록 2호인 자동차를 선택할 때 중요한 요소인 브랜드 안정성에 회의감을 갖게 했다. 미니와 달리 브랜드 이미지 구축에 실패했다는 얘기다. 게다가 실용성보다는 기호품 성격이 강한 500 같은 모델은 가격이 조금 싸다고 해도 이미 검증된 미니 고객을 빼앗아오기가 쉽지 않다.

 

두 번째 문제는 더 크다. 바로 지프 레니게이드다. 가장 무서운 적은 내부에 있다고 하더니 피아트에게 레니게이드가 꼭 그렇다.

 

 

500X와 레니게이드는 기술적으로 공유하는 면이 많다. 오프로드 성능이나 디자인의 존재감 등 레니게이드가 더 강한 인상을 주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제품의 태생적 문제는 수입사가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임포터가 할수 있는 일은 시장에 알맞게 모델 라인업을 구성하고 사양과 가격을 정하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 아쉬움이 있다. 레니게이드와 500X는 동일하게 가솔린 앞바퀴굴림 모델과 디젤 4WD 모델 2개의 라인업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500X는 레니게이드보다 약 200만원 저렴하다. 이는 오프로드 기능 등 레니게이드에만 적용된 기능 때문이라고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소비자에겐 ‘레니게이드보다 200만원 저렴한 하위 모델’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한다. 이렇게 직접 비교를 당하도록 라인업을 짜는 건 한쪽에 위험한 경우가 많고 이번엔 500X가 희생자다.

 

SUV에 관한 한 지프는 전문 브랜드다. 그래서 4WD 모델에 무게를 실은 현재의 라인업이 옳다. 그럼에도 올해 레니게이드가 가솔린 모델 한 대당 디젤 모델 석 대꼴로 팔린걸 보면 이 시장엔 가격이 저렴한 앞바퀴굴림 SUV 시장이 의외로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국내 소형-준중형 SUV 시장의 80퍼센트 이상이 앞바퀴굴림 모델이라는 사실과도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500X는 레니게이드와 반대로 가솔린 앞바퀴굴림 2개 라인에 디젤 4WD 1개 라인 정도로 무게중심을 달리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면 레니게이드-디젤4WD, 500X-가솔린 앞바퀴굴림으로 역할분담이 명확해지고 가격 차이도 지금보다 더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다. 같은 딜러가 두 모델을 함께 파는 현실을 감안하면 고객에게 레니게이드와 500X를 보다 확실하게 구분해 제시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나아가 미니 컨트리맨이 디젤 모델에 집중하고 있는 만큼 이는 SUV의 강자인 레니게이드가 상대하고, 500X는 다른 시장을 공략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실제로 레니게이드는 2.0리터 디젤 엔진이 170마력으로 140마력을 내는 500X의 디젤 모델보다 강점이 있다. 반대로 가솔린 모델에선 500X가 188마력으로 175마력의 레니게이드보다 강하다. 애초부터 모델마다의 무게중심이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둘도 없이 소중한 500C

미니는 프리미엄 브랜드지만 피아트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니 500 시리즈는 프리미엄보다는 귀여운 모델임을 강조하는 편이 시장 다변화에도 이롭다. 실제로 500X 가솔린 2.4 모델은 활기찬 주행감각과 거칠지 않은 승차감으로 시내에서 쓰기에 안성맞춤인 재밌는 승용차였다. 이런 점에서 중요한 모델이 하나 더 있다. 500C다.

 

500C는 지금 한국에서 둘도 없는 독특한 모델이다. 차체의 윗부분 전체가 벗겨지는 일반적인 카브리올레가 아니라 지붕과 뒷유리 부분만 열리고 옆 창문과 기둥은 그대로 남아 있는 캔버스톱의 확장 개념이기 때문이다. 컨버터블에 대한 동경은 누구나 있지만 실제로는 함부로 덤비지 못한다. 지붕을 완전히 접은 상태에서는 다른 이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느껴야 하는 게 도시 중심인 한국의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차체 옆면은 온전히 남겨둔 채 선루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게 윗부분을 열 수 있는 500C의 구조는 개방감과 프라이버시를 동시에 챙길 수 있는 독특한 선택이다. 500C는 주행감각도 500와 거의 다르지 않다. 1.4리터 엔진으로도 일상 주행영역에서 활기차고, 아날로그적인 감성도 반갑다. 너무 꽉 짜인 듯한 감각으로 여유가 없는 요즘 차들에 비해 500, 특히 500C가 주는 아날로그 감성은 대체 불가다. 미니가 프리미엄을 추구 한다면 피아트 500 시리즈는 유니크함을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500C는 이를 위한 안성맞춤형 제품이다.

 

피아트 500는 미니도 아니고 지프도 아니다. 그리고 실패한 프리몬트나 아직 들어오지 않은 다른 피아트 모델과도 다르다. 따라서 500의 모델 전략은 누구의 성공 사례를 따를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자신이 가진 것, 특히 자신만이 갖고 있는것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작지만 단단한 충성 고객을 확보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나아가 그들은 미래의 피아트에게 브랜드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씨앗으로 기능할 수 있다. 절대 잊지 마시길. 500는 누구와도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