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우리 고객의 평균연령은 62세였습니다.” 새로운 롤스로이스 컨버터블 던(Dawn)의 프로덕트 매니저 조너선 시어스가 말했다. “그러다 2010년 고스트가 나오면서 55세로 한층 젊어졌죠. 지금은 47세까지 내려갔습니다.” 메르세데스 벤츠 고객의 평균연령도 그보다는 높았던 기억이다. 하물며 그들은 C 세그먼트 소형차를 대거 투입하며 젊은 고객 확보에 열을 올렸다. 롤스로이스에 소형차? 그런 걸 가졌을 리 없다. 가장 작은 제품이 차체 길이만 5미터가 훌쩍 넘는 고스트 세단과 레이스 쿠페다. 세상에 젊은 부자가 그만큼 많아진 걸로 이해할 수밖에. 하긴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IT 기업가와 고도성장의 파도를 탄 중국 신흥부자가 수두룩하다는 얘기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다. 멀리 갈 것 없이 한국에도 히트곡을 연달아 내놓으며 돈방석에 앉은 스타 작곡가나 래퍼, 주식투자로 큰돈을 거머쥔 젊은 사업가의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이 처럼 큰 성공을 거둔 이들에게 롤스로이스는 ‘인증샷’처럼 기능하고 그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코끼리도 없고 기린도 없지만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축복받은 자연은 롤스로이스의 새로운 아침을 여는 장소로 더할 나위 없었다. 오른쪽 끝은 팬텀과 고스트, 레이스 등과 공유하는 V12 트윈터보 엔진.

 

그에 걸맞게 롤스로이스의 소통 방식도 예전과는 크게 다르다. 소수의 부호들에게 은밀하게 다가가는 게 과거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적극적이고 광범위하게 알리는 데 소홀하지 않다. “소셜미디어는 젊은 사람들만 이용할 거라고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롤스로이스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리처드 카터가 말했다. “이용자들이 먼저 롤스로이스를 인식합니다. 반응이 아주 폭발적이죠. 우리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는 100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유튜브 조회수는 300만건 이상을 기록하고 있지요. 던이 공개된 이후 증가세가 더욱 가팔라졌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변화예요.”

 

말하자면 던은 ‘새로운 부자의 시대’를 향한 롤스로이스의 대답이다. 차에 담긴 메시지도 ‘고급스러운, 우아한, 장인정신이 가득한’ 같은 전형적 수사에 머물지 않는다. 한발 더 나아가 ‘사교적 공간’과 같은 세련된 마케팅 수사로 성격을 보다 분명히 정리한다. 2+2 구성으로 무늬만 4인승인 보통의 반사교적(?) 컨버터블과 달리 뒷좌석에서도 앞자리 못지않은 여유 공간을 만끽할 수 있는, 즉 파티장을 빠져나온 성인 네 명이 도로 위에서도 사교를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진정한 4인승 럭셔리 컨버터블이라는 얘기다. 지난 3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시승 이벤트의 방점도 ‘테스트’보다는 ‘드라이브’에 찍혔다. 롤스로이스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리처드 카터는 고급 리조트 들레어 그라프 에스테이트에 모인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 이벤트는 테스트 드라이브가 아니라 던과 함께 케이프타운 남부의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하는 여행(Tour de Cap)입니다. 부담 없이 즐기세요. 소셜미디어를 통해서도 널리 알려주시고요. 해시태그 뉴 던(#newdawn)! 해시태그 뉴 던!”

 

 

던의 등장과 함께 2007년 선보였던 팬텀 드롭헤드 쿠페는 단종의 길을 걷는다. “아직 생산이 멈춘 건 아닙니다.” 조너선이 말을 이어 갔다. “주문량이 남아 있거든요.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지만요.” 롤스로이스는 연간 4000대 남짓의 차를 주문 제작하는 소량생산 회사다. 제품군을 한없이 늘리거나 성격이 비슷한 차를 함께 만드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조너선의 설명이 이어졌다. “던은 젊은 고객을 겨냥 하지만 그게 더 많은 차를 팔겠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굿우드 공장에는 라인이 한 개뿐이에요. 생산공정은 유연하게 조정되고 전체 생산량을 조금 더 늘리는 건 아무 문제 없지만 몇만대 수준으로 늘어날 일은 없을 겁니다.”

 

롤스로이스는 이 차와 관련해 쿠페인 레이스가 언급되는 걸 극도로 경계하는 눈치였다. 좀 더 정확히는 “레이스의 드롭헤드 버전이 아니”라며 보디 패널의 80퍼센트를 완전히 새로 디자인했다는 사실을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당사자들도 그릴의 크기와 위치를 레이스와 비교해 설명한다. 하긴 그런 걸 세세히 따지는 게 무슨 의미겠나 싶다.1990년대까지만 해도 엔진 출력의 수치를 묻는 기자에게 “롤스로이스는 그런 거 몰라도 되는 차”라고 대꾸하던 그들 아닌가. 수십 년이 흐르고 세상이 크게 달라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차의 세세한 기능이나 기술적 특징을 설명하는 데 그리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고전과 첨단 사이
수많은 첨단 기능을 품었지만 던의 인테리어 구성은 단출하다. 기능의 세부보다 한데 어우러져 승객을 보필하는 것이 중요한 차이기 때문이다. 긴 보닛 끝엔 ‘환희의 여신’이 여전하다.

 

우리의 ‘드라이브’는 차체를 검정 페인트로 칠하고 선홍색 소프트톱과 가죽 내장으로 치장한 섹시한 컨버터블과 함께였다. 지붕은 이미 출발 전에 트렁크 위 보관함으로 거둬들인 뒤였다. 길게 뉜 윈드실드를 타고 넘어오는 바람은 처음엔 쾌적한 산들바람이었다가 시원한 센바람으로 바뀌더니 종국엔 머리칼을 내동댕이치는 회오리바람으로 변해갔다. 바람의 종류는 달리는 세기와 한목소리를 내듯 속도에 따라 달랐고, 쾌적함을 핑계 삼아 어떤 장치로 다스려 만드는 억지 바람이 아니어서 더욱 기분 좋았다. 여섯 겹을 차곡차곡 쌓은 뒤 이음매까지 꽁꽁 싸맨 직물 지붕을 끌어올리면 차 안은 또 다른 세상이다. ‘세계에서 가장 조용한 컨버터블’이라는 그들의 자랑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정숙성이 일품이다.

 

우리가 만나는 지금의 롤스로이스는 21세기의 기술로 새롭게 빚어진 존재다. 차의 기계적인 부분은 과거의 롤스로이스와 어떤 연결고리도 없다. 그럼에도 이것만큼은 예전 그대로다. 구체적으로 보여주기보단 몸으로 느끼도록 유도한다는 점 말이다. 던 역시 알루미늄 스페이스 프레임, 에어 스프링과 액티브 안티롤 바, GPS 연동 지능형 변속 프로그램 같은 첨단 기술이 듬뿍 담겨 있지만 속력(速力)에 따라 달라지는 바람의 세기처럼 자연적인 감각을 훼손하지 않는 자동차라는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예컨대 이 차의 공조장치는 전자동처럼 보이지만 실상 완전 수동에 가깝다. 실내 어디에도 설정된 온도를 보여주는 장치가 없어 피부로 느껴가며 온도를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최상위 리무진인 팬텀의 뒷자리 승객도 예외 없다. 엔진이 얼마큼 빨리 돌고 있는지 알려주는 태코미터도 없다. 남아 있는 출력을 보여주는 파워리저브(Power Reserve)가 이를 대신한다. 1500rpm부터 나오는 최대토크(79.6kg·m)나 5250rpm에서 뿜어내는 563마력의 최고출력 같은 숫자를 살피는 게 무의미한 일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이 차가 롤스로이스 맞죠?”
신형 던은 남아공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든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차다. 화려하고 고전적인 동시에 섹시하다. 신형의 뿌리가 된 1952년형 실버 던 드롭헤드(아래)도 이벤트에 함께했다.

 

 

달을 밟는 세기에 상관없이 항상 보닛 끝을 하늘로 추켜세운 채 달려나간다. 동시에 엉덩이는 노면으로 가라앉는다. 강박적으로 흔들림을 다잡는 현대식 차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매우 예스러운 움직임이다. 하지만 파워리저브 바늘이 절반 이상 꺾일 정도로 가속페달을 힘껏 밟아도 필요 이상으로 머리를 쳐들거나 트렁크 끝이 풀썩 주저앉는 법은 없다. 언제든 딱기분 좋을 만큼만 들리고 가라앉은 채 우아하게 ‘이륙(take-off)’한다. 공차중량이 2560킬로그램에 이를 정도로 육중한 체격이지만 구부러진 도로에서의 움직임은 마치 그 절반 무게의 자동차 같다. 코너 입구에선 야무지게 단단해지고 코너를 빠져나온 다음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부드럽고 달콤하게 미끄러져 움직인다. 그러나 이것 역시 롤스로이스 감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차가 기울기 시작할때와 자세를 바로잡을 때의 반응은 견고하고 또렷하지만 일련의 움직임은 시종일관 부드럽고 우아하다.

 

운전자가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일은 없다. 실상 신경 쓰고 싶다 해도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거의 없다. 이 차는 패들 시프트는커녕 요즘 저렴한 소형차도 태연하게 쓰는 그 흔한 주행 모드조차 갖추고 있지 않다. 프로덕트 매니저 조너선은 수동 변속 기능은 없는지 묻는 내게 심드렁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없어요, 그런 건. 대신 스티어링 칼럼에 달린 시프트레버에 기어를 낮춰주는 ‘로(LOW)’ 버튼이 붙어 있잖아요.” 이런 황송할 데가. 비아냥거리도 아니다. 운전자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던에는 세상 어떤 차보다 많은 전자식 차량제어 장치가 담겨 있다. 주행감각은 운전하는 태도나 열의에 따라 수시로 달라진다. 그리고 그 변화는 운전하는 사람이나 함께 탄 동승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뚜렷하고 효과적이며 변함없이 달콤하다.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보챈다고 들어주는 차는 아니라는 점이다. 코너에서의 태도는 단호하지만 그게 다음 동작을 빠르게 가져가려는 준비를 뜻하진 않는다. 든든한 섀시는 여전히 동작이 크고, 견고하게 조여진 스티어링의 유격도 여전하다. 성급한 조작에 빠르게 반응할 리 없다. 하지만 서두르고 당황하는 건 운전자뿐 차는 다급한 상황 앞에서도 유유자적이다. 운전자가 차의 여유로운 태도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이 차가 풍류를 즐기는 컨버터블임을 깨닫고 수용하면 그 순간 차에 탄 모든 이에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여행의 목적이 도착이라면 이 차와의 드라이브는 여행지에 영원히 도착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최고의 여행일지 모른다. 여행의 목적을 여정이라 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다. 던은 최근 만나본 누구보다 멋진 여행의 동반자다. 나아가 풍류를 아는 젊은 부자의 ‘움직이는 사교 클럽’으로도 손색없다. 이 차는 섹시하고 화려하며 공간이 넉넉할 뿐 아니라 지붕을 열든 닫든 맑고 선명한 소리를 내는 ‘비스포크 오디오(Bespoke Audio)’ 시스템까지 갖추고 있다. 하긴 어떤 오디오 시스템을 썼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다.

 

당신이 탈 이 차는 다른 무엇도 아닌 롤스로이스인데. 그것도 지붕을 열 수 있는. 지붕 열고 다녀서 더 섹시한 롤스로이스는 5월 말 한국에 공식 출시됐다. 가격은 4억4900만원이지만 주문하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천차만별일 테니 그냥 참고만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