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왜 모험을 하지 않나?’라는 묵직한 주제로 글을 쓰려니 이만저만 부담되는 게 아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지난달 의뢰받은 걸 두 달 동안 주무르고 있겠나. 노트북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하도 남루한 것 같아 무작정 현직 디자이너들을 호출했다. 여섯 명을 꼬셨는데 나온 사람은 딱 두 명이다. 이들에게 비싼 술을 사 먹이며 나눴던 얘기를 가감 없이 정리했다. 디자이너의 생계 문제와 기업의 보안 규정 준수 때문에 부득이하게 ‘가명’으로 처리했음을 밝힌다. 별것도 아닌 걸 비밀로 한다고 모함하지 마시라. 이들은 회사의 허락 없이 기자를 만나면 바로 징계를 받는 연구개발직 요원이다. 옛정을 생각해(잘릴 각오하고) 몰래 술자리에 나온 ‘의리의 사나이들’이니 일단 박수 한번 치고 들어가자. 그들의 요청에 따라 A사에서 일하는 17년 차 디자이너를 ‘현빈’, B사에서 일하는 15년 차 디자이너를 ‘송중기’라 하겠다. 스크린과 TV에서 맹활약 중인 두 배우에겐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마실 만큼 마셨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자. 요즘 디자이너들은 왜 모험을 하지 않나?”

현빈 언제는 모험을 했나?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일했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다. 그저 연구개발직 직원이다. 회사에서 정한 방향에 따라 일하는 월급쟁이란 말이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주어진 방향에서 최적의 형태를 뽑아내야 한다. 이걸 위해 고민하는 것이지, ‘모험’이라는 단어는 처음부터 없었다.

송중기 맞다. 우린 전혀 창의적이지 않다. 재무팀 대리나 디자인연구소의 책임연구원 모두 기업의 이윤 추구를 위해 사는 ‘일꾼’일 뿐이다. 재무팀 대리가 돈을 갖고 모험하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도 디자인 갖고 모험하면 큰일 난다.

“아니, 그런 ‘뻔한’ 얘기 말고. 벤츠를 예로 들면 C 클래스나 E 클래스, S 클래스 모두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나? 예전엔 E 클래스라도 ‘모험적’이었는데 말이지.”

현빈 (광어회를 한 점 씹으며) 그건 벤츠 디자이너에게 물어봐야지. 우리도 그 양반들이 왜 그러는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당신들 관점에서 벤츠의 요즘 디자인이 좋다고 보나?”

송중기 아마도 벤츠라는 브랜드를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 같다. 경영진이 전략적으로 ‘브랜드를 아주 강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결정한 것 같고. 이런 방향에 따라 모든 차를 ‘벤츠스럽게’ 디자인한 걸로 보인다. A 클래스부터 S 클래스까지 ‘우린 벤츠다, 우린 최고다’ 이런 메시지를 던지는 걸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현빈 보통 자랑스러운 게 많은 브랜드나 훌륭한 역사를 갖고 있는 브랜드, 좋은 혈통을 가진 브랜드는 패밀리 룩을 강조한다. 패밀리 룩을 강조하면 브랜드 충성도는 더욱 높아진다. 또 그 차가 길거리에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재 벤츠의 상황을 생각하면 요즘 벤츠의 전략은 꽤 좋은 것 같다. 다만 모든 차들이 너무 비슷하게 생겨서 디자이너인 내가 봐도 구분이 안 되는 게 탈이긴 하다.

“그렇다면 다른 회사도 브랜드 강화를 위해 비슷한 형태로 디자인하는 건가?”

현빈 브랜드 강화는 모든 자동차 회사의 과제다. 우리 회사도 브랜드를 잘 세우기 위해 전사적으로 노력한다. 전 세계 자동차가 국경을 넘어 경쟁하는 시대다. 그 브랜드만의 뭐가 없으면 앞으로 점점 힘들어진다.

송중기 우린 아직 ‘브랜드, 브랜드’ 하는 분위기는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다만 패밀리 룩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고, 옆모습이나 뒷모습, 심지어 실내 버튼 형상까지 일정한 가이드에 의해 디자인해야 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이 가이드에 따라 디자인하면서 품질을 높이는 데 주력하는 추세다. 특이하게 만들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으니 디테일이 상당히 좋아지긴 하더라. 비슷한 형상을 놓고 고민하면서 점점 정교해지는 느낌이다.

“좋은 품질을 위해 ‘혁신적인 형태’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나?”

현빈 아주 많다. 기이하게 만들지 말고 반듯하게 만들어서 품질에 문제가 없도록 디자인해야 한다. 디자이너가 판금, 성형, 소재까지 공부해야 한다. 요즘 신입 디자이너들에겐 스케치를 안 가르치고 이런 걸 가르친다.

송중기 맞다. 요즘 자동차 회사 분위기는 혁신적인 형태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디자인 가이드가 매우 구체적이어서 스케치하기 전에 대략적인 디자인이 정해진 경우도 있다. 기획이나 마케팅, 영업, 설계 팀 등의 윗분들이 모여서 대부분 정해놓는 식이다. 그래도 이게 더 편하다. 예전엔 “일단 마음대로 그려봐!’라고 한 뒤에 “이건 이래서 안 돼, 저건 저래서 안 돼”라고 했다. 그러니 룸 램프 하나 디자인하는 데 500장씩 그렸던 거다. 하지만 요즘 룸 램프는 스케치를 따로 하지 않는다.

“법적인 규제도 디자이너들에겐 상당히 부담된다고 하던데?”

현빈 맞다. 이게 가장 큰 벽이다. 다른 건 조율할 수 있고, 변경할 수도 있는데 안전 규제는 무조건 지켜야 한다. 전화번호부보다 두꺼운 규정집을 펼쳐 보는 것부터 큰 부담이다. 몇 년 만에 공부하려니까 참 힘들더라. 이제 보행자 안전규정은 대부분 적응됐다. 앞부분을 공처럼 둥글게 만들고, 금속을 쓰면 안 되고, 엔진에서 보닛을 약간 들뜨게 만들면 대략 통과한다. 세단이나 SUV, 미니밴은 비교적 크기가 넉넉해서 디자인하기 쉽지만 소형차나 쿠페 같은 건 이걸 맞추느라 스타일링에 다소 소홀해질 때가 있다.

“요즘 모터쇼에 콘셉트카가 별로 없는 것 같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현빈 지금이 정상인 거다. 예전엔 의무감으로 콘셉트카를 만들었다. 모터쇼마다 메이저 회사는 몇 개, 중간급 회사는 몇 개, 서울모터쇼는 몇 개, 이런 식으로 정해놓고 방학 숙제 하는 것처럼 만들었다. 모터쇼 무대에 올리는 게 목표였던 차들이다. 하지만 요즘은 모터쇼를 위해 디자인하지 않는다. ‘차세대 무슨 프로젝트’라는 제목으로 콘셉트카를 만들 때가 가끔 있긴 하다. 이건 회사 내부적으로 새로운 디자인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만드는 거다. 이렇게 만들어놓은 걸 시기가 맞는 모터쇼 무대에 올린다. 시장 반응을 보면서 관심을 모으기 위한 목적으로 디자인할 때도 있다. 이런 걸 ‘쇼카’라고 부른다. 다 만들어놓은 차를 기본으로 콘셉트카처럼 보이도록 둔갑시킬 때도 있다.

송중기 회사 경영이 날로 ‘실질적’이 되고 있다.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으려 한다. 1990년대 모터쇼 무대에 올렸던 콘셉트카는 대부분 ‘삽질’이었다. ‘우리도 디자이너가 있다’라는 걸 알리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모터쇼 무대를 채우기 위해 외주 회사에 콘셉트카를 맡긴 적도 있다고 한다. 지금 그 콘셉트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두 사람의 의견이 모든 자동차 회사의 디자이너를 대변한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혹은 돈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모험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짐작쯤은 할 수 있다. 상황이 이런데 디자이너들이 모험하지 않는 걸 탓할 순 없다. 아니, 탓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다양한 디자인과 개성이 넘치던 시절이 가끔 그리울 뿐이다.   
글/장진택(<카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