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지프와 피아트가 한 식구라니. 둘은 한때 총부리 겨누며 으르렁대던 전쟁 당사국들이 낳은 자동차 브랜드. 전시엔 분초를 다투며 군수물자를 만들던 원수지간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렀고 상황이 달라졌다. 2014년 둘은 공식적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 결과 휘하에 11개 브랜드를 거느린 세계에서 7번째로 큰 자동차 업체로 거듭났다.

둘의 만남은 2009년부터 무르익기 시작했다. 이후 심상치 않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가령 크라이슬러 300C가 란치아 테시스라고 뻔뻔하게 우기며 밀라노 도심을 누볐다. 알프스 자락에서 마세라티가 주최한 국제 시승회에선 이마에 란치아 로고를 새긴 크라이슬러 미니밴이 손님을 실어 날랐다. 국내에서도 피아트 프리몬트로 둔갑한 닷지 저니가 팔린 적 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어정쩡한 스킨십이었다. 서로 이름을 바꿔 부르고 알면서 속아주는, 연인 사이의 장난 같았다. 그러나 결국엔 유전자를 섞었다. 크라이슬러가 피아트를 원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었다. 소형차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싶었다. 반면 피아트는 미국 진출을 원했다. 그 결실이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다. 피아트 500X와 지프 레니게이드다.

 

 

 

지프의 아이콘
레니게이드는 독특하고 아이코닉한 디자인으로 지프의 또 다른 대표 모델로 성장 중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의외로 비율과 형태가 지프의 어떤 형제와도 닮지 않았다. 지프의 특징을 담되 창의적으로 재해석한 디자인이다.

 

 

같은 듯 다른 출발점
둘의 출발점은 까마득히 다르다. 당연히 동급 시장의 라이벌로 완성된 과정 또한 정반대였다. 예컨대 친퀘첸토는 성장촉진제를 먹고 성큼 자랐다. 랭글러는 지방흡입 수술을 받고 폭삭 쪼그라들었다. 그 결과 둘은 소형 SUV(혹은 CUV) 세그먼트에서 500X와 레니게이드라는 이름으로 남남처럼 만났다. 이 프로젝트는 주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금 자동차 업계가 제일 눈독 들이는 소형 SUV 시장에 두 개의 떡밥을 동시에 던진 까닭이다. 게다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정체성이 뚜렷한 두 브랜드의 스타일 아이콘을 하나의 소스로 풀어낸 시도다. 이번에 시승차로 동원된 둘의 차체 컬러는 공교롭게 빨강 계열. 채도만 조금 차이 날 뿐이다. 자연스레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격언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내막을 아는 이만 곱씹을 수 있는 우연의 일치다. 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둘의 같은 근본을 알아채기 어렵다. 그만큼 오늘날의 공유 기술은 교묘하고 은밀하다. 이 둘의 뼈대는 ‘SCCS(Small Common Components and Systems)’다. 피아트가 GM 산하의 오펠과 함께 개발한 플랫폼이다. 그걸 크라이슬러의 지프가 쓰니 이 또한 아이러니다.

 

정반대의 취향저격
피아트 500X와 지프 레니게이드를 나란히 세웠다. 그야말로 비교체험 극과 극이다. 500X는 조약돌처럼 매끈하다. 어린이가 머릿속에 떠오른 대로 그린 자동차처럼 동글동글하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디테일이 섬세하다. 레니게이드는 강인해 보이면서도 위트가 묻어난다. 애써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난꾸러기를 보는 듯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덩치는 레니게이드가 더 커 보인다. 우뚝 세우고 팍팍 꺾은 디자인 때문이다. 그러나 착시현상이다. 제원을 살펴보면 반전이 있다. 길이와 높이는 예상대로 레니게이드가 앞선다. 특히 키가 90밀리미터나 더 크다. 하지만 너비는 500X가 한층 넉넉하다. 휠베이스는 둘 다 2570밀리미터로 똑같지만 체감하는 앞뒤 좌석 공간은 500X가 좀 더 여유롭다.

둘의 디자인은 전형적이다. 서로의 특징을 또렷이 강조했다. IHS 오토모티브의 애널리스트 이언 플레처는 “같은 차종의 남성(레니게이드)과 여성용(500X) 버전 같다”고 평했다. 그러자 외신에선 즉각 그의 멘트를 인용한 반박 기사를 냈다. 여성용이란 표현에 내포된 부정적 뉘앙스를 꼬집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언 플레처의 의견에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피아트 500X를 직접 보면 생각이 또 달라진다. 사진으로 예상한 것보다 훨씬 당당한 몸집 때문이다. 500X는 500의 풍선껌 버전이다. 바람 불어넣어 지그시 부풀린 것처럼 스케일을 키웠다. 하지만 500 고유의 형태와 비율은 간직했다. 그래서 친근하고 좀 더 넓적해진 눈매와 검정 복대로 가린 옆구리 살처럼 낯선 요소도 눈감아주게 된다.

레니게이드는 좀 다른 경우다. 덩치로는 랭글러의 축소판이 맞다. 동그란 눈매와 7개의 구멍을 뚫은 그릴 역시 반론의 여지 없는 지프.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의외다. 비율과 형태가 지프의 어떤 형제와도 닮지 않았다. 지프의 특징을 담되 창의적으로 재해석한 디자인이다. ‘앙증’과 ‘터프’ 사이 어디쯤의 중간지대를 의도적으로 겨냥했다.

 

 

 

 

레니게이드의 실내는 한층 흥미롭다. 지프 브랜드를 젊은 층에게 어필하겠다는 의지와 노력이 뚝뚝 묻어난다. 지프의 각종 아이콘을 스피커, 오버헤드 콘솔 등 곳곳에 심었다

 

 

 

 

속살로 이어진 개성
둘 다 속살은 외모를 연상케 한다. 각각 고유의 테마로 빚었다. 그래서 확연히 다르다. 동시에 같은 집안 형제들과도 차이 난다. 둘은 시트 프레임은 같되 포지션이 딴판이다. 레니게이드가 45밀리미터 더 높다. 풍경이 ‘살짝’ 달라 보일 만큼의 차이다. 대시보드 디자인도 전혀 다르다. 눈에 띄는 공통점은 6.5인치 터치스크린과 공조장치 스위치 정도다.

500X는 실내에서도 모난 구석을 찾을 수 없다. 부드럽고 완만한 곡선과 곡면으로 휘감았다. 포인트는 동그란 스위치와 머리받침으로 줬다. 국내에선 제한적으로 운영하겠지만 500X 역시 500처럼 실내를 다양한 컬러와 소재의 조합으로 꾸밀 수 있다. 앞좌석은 군용 배낭 옆주머니처럼 사이드 볼스터가 툭 튀어나와 있다. 뒷좌석 머리 공간은 빠듯하다.

레니게이드의 실내는 한층 흥미롭다. 지프 브랜드를 젊은 층에게 어필하겠다는 의지와 노력이 뚝뚝 묻어난다. 이를테면 지프의 동그란 헤드램프와 그릴의 7개 슬롯을 형상화한 아이콘을 스피커, 오버헤드 콘솔 등 곳곳에 심었다. 센터페시아 모니터 위엔 ‘Since 1941(1941년부터)’을 새겼다. 앞 유리와 A필러가 만나는 모서리엔 언덕을 오르는 지프를 그려 넣었다.

두 시승차 모두 듀얼 선루프를 뚫었다. 두 브랜드가 차별을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사례다. 기본 얼개는 같다. 스위치로 앞쪽 선루프만 지붕 위로 포개 여는 방식이다. 그런데 500X는 유리, 레니게이드는 폴리우레탄 패널로 씌웠다. 레니게이드의 앞뒤 선루프는 떼어낼 수 있다. 그러면 롤 바만 남긴 야성적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둘의 짐 공간은 1리터 안팎 차이다. 아무래도 껑충한 키만큼 트렁크 높이는 레니게이드가 더 넉넉하다. 하지만 활용성은 500X가 더 낫다. 레니게이드보다 트렁크 입구가 넓고 깊어서다. 또한 레니게이드 제원의 트렁크 용량은 탈착식 선루프를 수납하기 위한 공간을 포함한다. 뒷좌석은 500X가 60:40, 레니게이드는 40:20:40으로 나눠 접을 수 있다.

 

 

 

좀 더 경쾌한 500X
0→시속 100킬로미터까지 가속하는 시간은 0.4초 차이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달릴 때 둘의 간극은 한층 크게 와 닿는다. 속도를 높일수록 차이는 점점 벌어진다. 가령 0→시속 160킬로미터 가속 시간은 3초 이상 차이 난다. 전반적인 움직임 또한 500X가 상대적으로 민감하고 정교하다.

 

 

 

아직 이들 이란성 쌍둥이의 해피 엔딩을 속단하긴 이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과는 ‘아주 맑음’이다. 데뷔 이후 각종 언론 시상식에 불려 다니느라 바쁘다. 언론과 소비자의 평가도 호의적이다

 

 

하나의 심장, 서로 다른 속내
둘은 심장도 같다. 직렬 4기통 2.0리터 터보 직분사 디젤 엔진이다. 피아트가 같은 고향에 본부를 둔 GM 파워트레인 토리노와 개발한 ‘멀티젯’ 시리즈 가운데 하나다. 2008년 란치아의 3세대 델타에 처음 얹어 선보였다. 멀티젯은 커먼레일 연료 분사 시스템을 뜻한다. 초기 버전은 ‘유니젯 터보 디젤’의 이니셜을 따서 JTD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힘은 다르게 세팅됐다. 500X는 140마력과 35.6㎏·m, 레니게이드는 170마력, 35.7㎏·m를 낸다. 둘의 최대토크는 거의 같은 셈인데, 공차중량은 레니게이드가 1630킬로그램으로 135킬로그램 더 무겁다. 따라서 성능 제원만으로도 둘의 동력성능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참고로 0→시속 100킬로미터 가속 시간은 500X가 9.8초, 레니게이드가 10.2초다.

불과 0.4초 차이지만 실제로 달릴 때 둘의 간극은 한층 크게 와 닿는다. 물론 500X의 발걸음도 민첩한 수준까진 아니다. 발랄한 안팎 디자인과 달리 차분하다. 하지만 레니게이드보단 경쾌하다. 속도를 높일수록 차이는 점점 벌어진다. 가령 0→시속 160킬로미터 가속 시간은 3초 이상 차이 난다. 전반적인 움직임 또한 500X가 상대적으로 민감하고 정교하다.

레니게이드의 운전감각과 몸놀림 또한 인상적이다. 아스팔트보단 갓길 너머와 궁합이 맞는 지프로서는 놀라울 만큼 좋다. 그러나 500X에서 레니게이드로 바꿔 타면 돌연 감각의 감도와 깊이가 흐릿해진다. 실망할 필요는 없다. 상실의 개념은 아니니까. 다른 느낌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 바로 지프 특유의 강인하고 질긴 감각이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두 시승차는 앞바퀴굴림 기반의 사륜구동이다. 출발할 때나 접지력을 잃을 때 빼곤 앞바퀴에 구동력을 ‘올인’해 연비를 챙긴다. 그런데 세팅은 다르다. 지프 레니게이드는 앞뒤 구동력을 똑같이 나누는 4WD 록(LOCK)과 기어비를 20:1로 고정하는 4WD 로우(LOW)를 고를 수 있다. 대신 500X는 오프로드용 주행모드 외에 스포츠 모드(체커기 아이콘)를 따로 마련했다.

최저지상고도 의외의 반전이다. 500X가 202밀리미터로 레니게이드보다 4밀리미터 높다. 하지만 험로에선 섬세한 세팅이 뒷받침된 레니게이드가 유리하다. 지프 홍보 영상을 보면 레니게이드는 사막과 바위산을 거침없이 누빈다. 영상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우린 레니게이드로 갯벌에 뛰어들었다가 결국 견인차를 불렀다. 안팎 디자인에 취해 철인 3종 경기 선수로 착각해선 곤란하다.

 

시너지의 묘미
500X와 레니게이드는 세그먼트와 판매 시장이 겹치지만 구체적인 목표는 조금 다르다. 피아트는 푸조 2008이 장악한 소형 크로스오버 시장을 욕심낸다. 지프는 연간 판매 규모를 100만 대 이상으로 키우고 싶어 한다. 자칫하면 제 살을 깎아먹을 수도 있는 도전이다. 그러나 배경과 개성이 워낙 달라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이런 게 진정한 시너지의 묘미다.

아직 이들 이란성 쌍둥이의 해피 엔딩을 속단하긴 이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과는 ‘아주 맑음’이다. 피아트 500X와 지프 레니게이드는 데뷔 이후 각종 시상식에 불려 다니느라 바쁘다. 언론과 소비자의 평가도 호의적이다. 젊은 층뿐 아니라 자녀를 독립시킨 베이비 부머 세대의 관심도 뜨겁다. 그 결과 두 브랜드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하루를 돌이켜봤다. 같은 시간,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만 뚜렷이 다른 경험이었다. 다른 옷을 입은 정도가 아닌, 별개의 자아로 보낸 시간이었다. 잠시 공감했던 IHS 애널리스트의 평은 까맣게 잊었다. 칼 구스타프 융의 주장처럼, 여성성과 남성성은 한 자아 속에 공존한다. 둘의 성향을 성별 또는 어떤 기준으로 나누는 건 무의미했다. 그냥 다를 뿐이었다. 실은 같지만, 다르다고 믿고 싶어졌다. FCA 그룹의 전략에, 난 완전히 넘어갔다.  에디터/고정식

 

 

 

SPECIFICATION

JEEP RENEGADE LIMITED 2.0 AWD
기본 가격 4190만원 레이아웃 앞 엔진, AWD, 5인승, 5도어 왜건 엔진 직렬 4기통 2.0ℓ DOHC 터보 디젤, 170마력, 35.7kg·m 변속기 9단 자동 공차중량 1630kg 휠베이스 2570mm 길이×너비×높이 4255×1805×1695mm 복합연비 12.3km/ℓ CO₂ 배출량 162g/km

 

FIAT 500X 2.0 AWD
기본 가격 TBA 레이아웃 앞 엔진, AWD, 5인승, 5도어 왜건 엔진 직렬 4기통 2.0ℓ DOHC 터보 디젤, 140마력, 35.6kg·m 변속기 9단 자동 공차중량 1495kg 휠베이스 2570mm 길이×너비×높이 4248×1796×1600mm 복합연비  TBA CO₂ 배출량 T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