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칼럼의 XJ는 새로운 시대의 차로 더없이 멋진 제안이었다.

지난 1월 말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재규어 ‘레어 디자인 스튜디오’ 관람을 놓쳤다. 인터넷으로 둘러보니 전시장은 신형 XJ를 발표하는 자리여서 그런지 클래식카는 과거 XJ 시리즈 2대뿐이었지만, 영국차 재규어의 향기가 가득했다. 전시된 1968년형 XJ 시리즈 1은 내가 무척 좋아하는 차다. 자동차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차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흔히 재규어 XK-E, 시트로엥 DS-19을 얘기하지만, 재규어 XJ 시리즈 1과 MK-II 역시 만만치 않다. 1960년대 재규어에 멋진 차가 많았다. XJ 시리즈 1은 재규어 창업자인 윌리엄 라이언스 경이 마지막으로 내놓은 차라 했다. 항상 점잖은 신사복의 노신사 라이언스 경은 전혀 예술가 타입이 아닌데, 그가 빚어낸 차들은 넋을 잃게 하는 힘을 지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차 재규어 XK-E도 공기역학자인 맬컴 세이어가 공기저항 분야에만 손댔고 전체적인 스타일은 라이언스 경이 완성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XJ 시리즈 1은 전통미가 흐르는 스포츠 세단이라서 내 시선을 붙잡았다. 크고 작은 4개의 원형 헤드램프는 보닛에 잔뜩 주름을 잡아야 하는 이유가 됐다. 위에서 보면 물방울 형상인 차체는 앞부분이 내려앉고 뒤는 들려서 당장 뛰쳐나갈 듯했다. 당시 4도어 세단 중에 이렇게 두터운 타이어가 달린 차가 없었다. 쫑긋하게 모아진 트렁크가 한껏 들려 섹시한데, 커다란 타이어는 보디 밖으로 튀어나올 듯 우람했다. 실내는 센터터널이 두툼해서 운전석이 무척 좁았다. 두 다리가 모아질 정도로 좁았지만 모두 스포티하다면서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뒷자리도 좁아서 어른이 타면 앞 시트에 무릎이 닿을 정도였다. XJ는 항상 영국 수상의 차였는데, 비좁은 자리에 쪼그리고 타는 높은 분이 존경스러웠다. 여성인 대처 수상만이 여유로워 보였다. XJ 시리즈 1은 과거 외교관 차로 보이는 몇 대가 서울 시내를 달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라이언스 경이 서거한 후 재규어는 제대로 된 차를 만들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같은 모양으로 시리즈 III까지 생산한 XJ는 1986년 XJ40이라는 후속차로 이어졌지만 실패작으로 여겨졌다. XJ 시리즈 1을 본떴으나 한마디로 못생긴 차가 됐다. 뒷자리 공간을 늘리고 트렁크 공간을 키웠지만 고객들은 재규어에 사각형 헤드램프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1994년 나온 코드네임 X300 XJ는 다시 4개의 원형 헤드램프로 돌아갔지만 과거의 차를 그대로 베낀 차는 오리지널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언 칼럼이 잘한 것은 과거의 차를 베끼려 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차에서 영감을 받아 완전히 새로운 차를 내놓은 것이다. 이 또한 그의 생각이 아니라 XJ40과 X300의 암흑기를 지나면서 많은 고객이 계속해서 지적하고 요구한 일이었다. 그렇게 이언 칼럼이 2009년 발표한 지금의 XJ 시리즈는 새로운 시대의 차로 더없이 멋진 제안이었다. 반면 최근 매체마다 이언 칼럼이 세계 3대 디자이너의 한 명이라고 적는 건 수긍하기 어렵다. XJ 페이스리프트 발표회장에서 나온 말 같은데, XJ의 뒷모습을 보면 그런 말에 동의하기 힘들다. 그리고 3대 디자이너가 누구를 말하는지도 분명치 않다. 외국에서는 책임 디자이너를 스타로 만드는 작업이 흔하다. 지난해 말 이탈리아에서 열린 ‘미트 더 마스터스’ 행사에 갔을 때 강사로 참가한 많은 디자이너가 현직 자동차 메이커 디자인 책임자였다. 조르제토 주지아로나 마르첼로 간디니가 거장이라면 이해할 수 있어도 현직의 피아트 디자인 책임자에 ‘마스터’라는 표현이 어울리나 싶었다. 그의 작품인 피아트 500L(친퀘첸토의 5도어형)이나 신형 멀티플라 같은 차는 못생긴 이유로 판매도 신통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제 피터 슈라이어로 디자이너의 영웅화 작업을 시작했으니 앞으로 많은 디자인실 김 부장님, 박 부장님의 신격화에 힘써야 한다. 과거에도 그런 가능성을 엿보았지만 우리나라 기업의 정서로 볼 때 가능한 일 같지 않았다. 외국에서도 많은 한국 디자이너가 활동하는 지금이 한국인 거장 만들기에 좋은 기회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