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 마니아를 뜻하는 ‘폭빠’란 표현을 인터넷 카페에서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골프가 희귀하고 대중들이 골프 사는 걸 이해하지 못하던 과거에 ‘폭빠’는 폭스바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결속력을 상징하는 무형의 끈이었다. 하지만 매년 3만대 이상의 폭스바겐, 1만대 가까운 골프가 팔리는 오늘날 이 표현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폭스바겐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폭스바겐 오너들을 비하하는 뜻으로 쓰일 때가 많다. 이런 와중에 폭스바겐은 디젤 게이트라는 전대미문의 사고를 쳤다. 당연히 브랜드 이미지는 곤두박질치고 기존 고객들은 예상되는 손해에 아우성이다. 국내 수입차 시장 3위인 폭스바겐도 위기다. 브랜드 이미지 쇄신이 필요한 때다. 브랜드를 끌고 가는 간판 모델, 골프가 움직일 때란 얘기다.

 

골프는 폭스바겐이다
골프는 폭스바겐의 베스트셀러다. 7세대에 걸쳐 3000만대 이상 판매된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연간판매 기록에서도 여전히 1등이다. 최고 판매기록을 세운 2014년 보고서에 따르면 1021만대를 생산한 폭스바겐그룹에서도, 616만대를 생산한 폭스바겐 승용차 브랜드 내에서도 골프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100만대를 넘겼다. 국내 수입차 시장에서 2014~2015년 2년 연속 판매 1위에 오른 티구안도 전 세계 생산량은 50만대 남짓이었다. 폭스바겐 세계 1위 전략의 핵심인 MQB(Modularer Querbaukasten, 가로배치 엔진용 모듈형 플랫폼)도 7세대 골프를 통해 선보였다. 골프는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폭스바겐에 가장 중요한 모델인 셈이다.

골프는 매 세대마다 신기술과 함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며 시대를 이끌었다. 앞바퀴굴림 해치백의 대중화(1세대), 핫해치 장르의 소개(1세대 GTI), 소형차 최초의 시속 200킬로미터 돌파(2세대 GTI 16V), 동급 최초의 6기통 모델(VR6), 양산형 듀얼클러치 변속기(4세대 R32), 직분사와 직분사 터보 엔진의 대량 보급(5세대 2.0 FSI와 TFSI), 다운사이징의 본격화(5세대 GT 스포트 1.4 TSI), 전 모델의 듀얼클러치 변속기 적용(6세대), 그리고 차량 전체를 아우르는 모듈형 플랫폼 적용(7세대) 등 사례는 수없이 많다. VR6 출시는 ‘골프에서 골프로 업그레이드’라는 전례 없는 모델 내 업그레이드를 가능하게 하며 ‘골프 클래스’라는 별명을 갖게 했다. 4세대의 뛰어난 품질은 벤츠 A 클래스나 아우디 A3 등 프리미엄 C 세그먼트 해치백 시장이 열리는 기폭제였다. 골프의 역사가 폭스바겐의 발전사인 동시에 해치백 장르의 역사라 해도 무리 없다. 그리고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골프는 매 세대마다 신기술과 함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며 시대를 이끌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운사이징 엔진의 정수를 보여준 1.4 TSI 엔진, 모듈화 설계의 정점인 MQB 플랫폼, TDI와 DSG의 보급 등으로 수입차 시장의 흐름을 바꾸었다.

 

 

 

 

골프가 바꾼 세상
폭스바겐은 1987년 수입차 시장 개방과 동시에 한국에 진출한 수입 브랜드 중 하나였고, 골프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30년 동안 하나의 이름으로 국내 수입차 시장을 지킨 유일한 폭스바겐 모델이다. 물론 어려운 시절도 있었고 폭스바겐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도맡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골프는 묵묵히 한국에서 폭스바겐 브랜드의 정체성과 수입차 시장의 변화를 도모해왔다.

최상위 시장부터 발달하는 고급 내구성 소비재답게 개방 초창기 수입차는 고급 세단 일색이었다. 당연히 수동변속기의 골프 1.8 GL은 설 자리가 좁았다. 꿋꿋이 10여 년 동안 시장을 지켰지만 골프의 시절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수입차의 대중화도 IMF 경제위기 등으로 뒤로 늦춰졌다. 2005년 폭스바겐코리아 설립은 골프에 힘을 실어줄 기회였다. 하지만 폭스바겐코리아는 뉴 비틀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폭스바겐이 얼마나 크고 강력한 회사인지 보여주는 게 급선무였다. 결국 W12 6.0 모델을 포함한 기함 페이톤을 첫 모델로 선택했고 첫해부터 12기통 모델 36대를 포함한 284대를 팔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여세를 몰아 같은 해 10월 5세대 파사트(2.0 TFSI)가 소개됐다. 파사트는 2개월 만에 초기 물량 200대가 소진됐고 폭스바겐은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에서 월 판매 100대를 넘겼다. 브랜드 이미지 쇄신을 위해 최상위 모델부터 시작하는 톱-다운 전략의 성공이었다.  

폭스바겐이 비틀 브랜드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벗는 동안 골프는 다른 임무를 준비하고 있었다. TDI와 DSG였다. 승용 디젤과 듀얼클러치 변속기의 대명사가 된 이 두 가지는 지금까지도 폭스바겐 브랜드의 주 무기다. 나아가 한국 수입차 시장의 전체 흐름까지 바꾼 중요한 터닝포인트였다. 폭스바겐코리아는 2005년 1차 TDI 론칭을 통해 세 가지 TDI 모델을 선보였다. 톱-다운 전략을 확고히 하는 페이톤과 투아렉 3.0 TDI, 그리고 미래를 열기 위한 골프 2.0 TDI였다. 1차 TDI 론칭이 성공하자 폭스바겐코리아는 1년 뒤 파사트와 제타 2.0 TDI, 파사트 바리안트 TDI 스포트로 구성된 2차 TDI 론칭을 이어갔다. 폭스바겐엔 또 다른 숙제가 있었다. 유럽형 EOBD 가솔린 엔진 판매가 금지되는 2007년부터의 배출가스 규제였다. 2006년 2월 선보인 북미형 가솔린 엔진의 골프 GTI는 첫 번째 대응이었다. 골프 GTI는 2006~2007년 900대 이상 판매되며 예상 밖의 성공을 거뒀다. 2007년과 2008년엔 각각 50대 한정 판매된 GTI 파렌하이트와 R32로 대중적인 모델도 한정판이 가능하다는 성공 사례를 남겼다. 결국 골프는 2005~2009년 폭스바겐코리아 태동기에 전체 판매량 가운데 꾸준히 20~25퍼센트를 차지하며 브랜드의 성공적인 진출과 정착에 공헌했다.

그리고 2009년 9월 6세대 골프가 출시됐다. 2.0 TDI 한 가지 모델뿐이었지만 6세대 골프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출시 2개월 만에 초기 물량 600대가 소진됐다. 이후는 탄탄대로였다. 2010~2013년 폭스바겐에서 가장 많이 팔린 모델이었고, 2012년엔 폭스바겐 전체 판매량의 43.1퍼센트를 차지했다. 판매량 못지않게 중요한 발전도 있었다. 주차보조 기능 파크 어시스트가 전 모델에 기본 적용됐고, GTI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디젤 스포츠 모델 GTD가 라인업에 더해졌다. 슈퍼차저와 터보차저를 결합한 다운사이징 엔진 1.4 TSI와 7단 DSG도 빼놓을 수 없다. 골프의 전통인 혁신이 대를 이어 전해진 것이다. 7세대 골프는 2013년 7월에 등장했다. MQB라는 근본적인 혁신으로 무장한 7세대는 클래스를 뛰어넘는 고급스러움과 주행품질까지 제공했다. 출시 직후부터 월 1000대씩 팔린 폭발적인 반응은 어쩌면 당연했다. SUV 바람을 업고 수입 베스트셀러가 된 티구안, 중형세단 시장의 파사트와 CC, 그리고 7세대 골프까지 더해지면서 수입차 시장 내에서 폭스바겐 점유율은 역대 최고인 16.39퍼센트까지 올랐다.

 

 

 

폭스바겐 브랜드는 위기다. 이미지는 떨어지고 점유율도 조금씩 줄고 있다. 골프 스포트밴이나 바리안트 같은 라이프스타일 모델로 골프 라인업을 보강하는 한편 3기통 TSI 블루 엔진과 PHEV 같은 혁신적인 기술도 적극 도입해야 한다.

 

 

폭스바겐코리아의 10년
매년 최다 판매 기록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시장 점유율은 2013년을 기점으로 하락세다.

 

 

 

골프가 바꾼 수입차 시장
C 세그먼트와 해치백 시장이 확대됐다. 무엇보다 디젤 승용차의 인기에 불을 지핀 게 컸다.

 

 

 

 

대세에서 위기로
골프가 폭스바겐 브랜드를 이끈 지난 10년, 수입차 시장도 많이 달라졌다. 가장 큰 변화는 작은 차의 약진이다. 최근 경기불황과 소득양극화 영향으로 세계적인 최상위 브랜드가 오히려 약진하고 있지만 유럽 E 세그먼트 이상 대형차 점유율은 2005년 60퍼센트 이상에서 지난해 40퍼센트까지 떨어졌다. 수입차 1~4위 브랜드 중 대중차 브랜드는 폭스바겐이 유일하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골프가 주도한 C 세그먼트는 지난 10년간 점유율 증가가 가장 두드러지는 시장이다. 2005년 9.6퍼센트에서 지난해 21.5퍼센트까지 성장했다. 프리미엄 브랜드가 C 세그먼트 이하 소형차 시장에 공격적으로 참여한 덕분인데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건 골프였다. 해치백 시장 역시 2005년 4.4퍼센트에서 지난해 11.6퍼센트로 수직 성장했다. 이는 대세라는 SUV와 MPV에 비해서도 훨씬 높은 성장률이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역시 디젤 엔진의 강세다. 2005년 4.1퍼센트에 불과했던 디젤 수입차 비율은 지난해 무려 68.8퍼센트까지 늘었다. 폭스바겐은 연비와 함께 ‘파워 디젤’이라는 슬로건으로 디젤 엔진의 토크가 주는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연비를 위해 나머지는 희생한다는 디젤 엔진의 방어적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서였다. 결국 승용 디젤 허용 초기 디젤 엔진에 회의적이던 BMW가 지금은 더 공격적으로 달려들 정도로 시장과 다른 브랜드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 폭스바겐 자신이 저지른 디젤 게이트가 아니었으면 디젤 엔진의 수입차 시장 점유율은 이미 70퍼센트를 넘어섰을 것이다.

골프는 지난해 판매량이 9501대에 이를 정도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꽁지 없는 차를 3000만~4000만원이나 주고 사냐는 핀잔도 더 이상 없다. 하지만 절대 판매량의 증가와 달리 국내 수입차 시장에서 폭스바겐의 점유율은 2013년을 기점으로 점점 줄고 있다. 게다가 폭스바겐의 독보적인 시장 키워드들(승용 디젤, 해치백, 콤팩트 클래스, 듀얼클러치 변속기, 모듈화)도 경쟁자들에 조금씩 빼앗기고 있다. 디젤 시장은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는 물론 다른 브랜드도 적극적이다. 콤팩트 시장에서도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와 미니 등의 공격으로 점유율이 줄고 있다. 듀얼클러치 변속기는 현대차도 직접 생산할 정도로 대중화됐다. 모듈화 역시 이제는 하지 않는 브랜드가 없는 상황이다. 설상가상으로 디젤 게이트까지 터졌다. 지난해 말의 할인 판매는 기존 고객의 원성을 샀다. 최근엔 리콜과 관련한 정부의 압박도 심상찮다. 어렵게 쌓아 올린 이미지가 한꺼번에 사라질 위기인 셈이다. 하지만 위기의 근원은 디젤 게이트가 아니었다. 이미 대세가 됐다는 안이한 마음가짐이었다.

 

혁신의 정신을 되찾을 때
폭스바겐엔 언제나 얘깃거리를 가진 제품이 가득했다. 남들이 갖지 않은 것을 선보이고 남들이 주저하는 걸 공격적으로 시도했다. 페이톤 TDI는 최초의 프리미엄 디젤 세단이었고, 골프는 TDI와 DSG를 선보였으며, 5세대 파사트는 어댑티브 헤드램프를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 이오스는 선루프가 달린 하드톱 컨버터블의 선조였고, CC는 레인 어시스트를, 티구안과 골프 카브리올레는 파크 어시스트와 하이빔 어시스트를 국내 최초 또는 동급 최초로 소개했다. 하지만 지금의 폭스바겐 모델은 시장을 선도하긴커녕 최근 흐름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요즘 자동차 시장의 화두는 자율주행차와 전기자동차다. 이와 관련한 능동 주행보조 장치와 자동 비상제동 장치(AEB), 하이브리드는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폭스바겐은 다르다. 파크 어시스트나 레인 어시스트, 하이빔 어시스트는 이제 해당 모델에서 사라졌고 AEB와 주행보조 장치는 투아렉 정도에서나 만날 수 있다. 요즘 폭스바겐 제품은 기술적으로나 주제 선점에 있어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안정지향적이다. 물론 보수성과 안정지향성은 대중 브랜드에 중요하다. 중형차 시장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모든 라인업이 보수화되면 그 브랜드는 정체되고 미래를 위한 준비와 포석도 사라진다.

골프는 항상 어려운 역할을 담당하고 미래를 개척해온 도전적인 모델이다. 그런데 7세대 골프에 이르러선 골프조차 보수화됐다. 해외에서 7세대 골프는 고급차에서 1500유로 이상으로 선택할 수 있던 AEB와 스마트 크루즈 시스템 패키지를 500유로 남짓으로 공급했다. 하이테크의 민주화였다. 하지만 국내 출시 모델에서 이 패키지는 언감생심이다. 능동 안전장비라곤 다중추돌 방지 브레이크 정도에 그친다. 능동 안전장비와 주행 보조장치가 상당수 기본 사양으로 제공되는 국내 수입차 시장을 감안하면 골프와 폭스바겐 모델들은 한참 뒤처진 셈이다.

골프는 대중적으로 남아도 되는 모델은 제외하고 다시 혁신의 첨병으로 뛰어야 한다.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트렌드를 따라잡고 다시 추월하는 거다. 올해 출시되는 7세대 골프 페이스리프트 모델은 훨씬 다양한 첨단장비를 제공한다. 지금의 골프가 빠트리고 있는 장비를 적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테마를 선점하기 위해 필요한 장비가 무엇일지 고민해 앞선 이미지를 되찾아야 한다. 두 번째는 파워트레인의 다변화다. 이는 디젤 게이트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이기도 하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골프 GTE를 비롯한 전기와 하이브리드 계열을 도입하고 지금까지 소수에 불과했던 가솔린 모델도 공격적으로 출시해야 한다. 특히 새롭게 선보일 3기통 TSI 블루 엔진처럼 다운사이징과 친환경에 앞장설 수 있고 가격경쟁력도 갖출 수 있는 시장개척용 모델은 필수다. 디젤 모델의 강세를 단숨에 뒤집는 건 금물이다. 그건 지난 10년과 기존 고객을 버리는 것과 같다. 신뢰를 잃은 브랜드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세 번째 방법은 골프의 다른 파생 모델을 적극적으로 추가하는 것이다. 골프가 1만대 가까이 팔리는 지금이 적기다. 스포츠밴이나 바리안트 같은 유틸리티 모델은 골프에 아쉬웠던 공간활용성을 보완한다. 나아가 신형 티구안과 함께 콤팩트 라이프스타일 모델 라인업도 구축할 수 있다. 골프 브랜드가 더 넓고 두터워지는 건 폭스바겐 브랜드 전체를 위해서도 큰 도움이 된다. 골프는 항상 앞서가야 한다. 그래야만 앞선 고객을 계속 끌어모으고 폭스바겐 브랜드의 미래도 개척할 수 있다. 골프가 다시 달려야 한다. 에디터/김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