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친구의 말에 그랜저로 대답했습니다.” 2009년 현대 그랜저 TG TV CM의 카피다. 그랜저는 이때까지 명실상부 고급 국산차를 나타내는 대명사였다. 하지만 제네시스가 나오면서 왕좌의 자리를 내주었고 대체할 만한 수입차가 늘어나면서 ‘고급스러운 보통 차’가 됐다. 심리적인 문턱이 낮아지자 판매량엔 오히려 도움이 됐다.

그랜저 HG는 2011년 출시 이후 꾸준히 성장 가도를 달리다 지난해엔 숨을 가다듬었다. 지난해 신형 그랜저 HG는 2014년 대비 6.5퍼센트 감소한 8만7182대가 팔렸다. 하지만 신차 판매량과 2~3년 시간차가 있는 중고차 시장에선 뜨거웠다. SK엔카닷컴은 자사 홈페이지에 등록된 중고차 매물을 분석한 결과, 지난해 가장 많이 거래된 국산차는 현대 그랜저 HG라고 했다. 조회 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팎의 은은한 빛 다크크롬 가니시 몰딩 처리된 LED 안개등이 기본으로 들어간다. 옵션 사항인 슈퍼비전 클러스터는 4.6인치 컬러 TFT LCD 화면으로 주행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를 보여준다.

 

 

적정한 가격과 낮아진 구매 연령층
SK엔카 장한평 직영점 이상원 대리에게 그랜저 HG의 인기 비결을 물었다. “현재 그랜저 HG의 중고 가격은 대부분 2000만원대에 형성돼 있는데요, 이 가격대에 그랜저 HG를 대체할 만한 차가 없습니다. 2013년부터 그랜저 HG 붐이 일었고 지금은 주춤한 상태입니다.” 비슷한 세그먼트로 기아 K7이 있지만 상품성에서 그랜저 HG를 넘을 순 없다. 중고차를 살 때 그랜저 HG와 K7을 고민하다 K7을 사는 이유는 딱 하나다. 아직 그랜저에 남아 있는 올드한 이미지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엔 이 트렌드마저 바뀌는 중이다. 그랜저 구매 연령층이 낮아지고 있다. 젊은 층이 현대 쏘나타나 기아 K5를 사려다 한 번쯤은 눈길을 돌리는 차가 됐다. 현재 쏘나타와 K5에 어느 정도 옵션을 넣으면 2000만원 중후반대로 가격이 매겨진다. 이 정도면 옵션이 풍부하고 마감도 더 고급스러운 2~3년 된 그랜저 중고차를 살 수 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그랜저에 끌리는 젊은 고객이 많아졌다. 그래서 흰색이 가장 인기다. 검은색은 아빠 차 같고 은색은 엄마 차 같다는 게 이유다. 중고차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실제로 같은 옵션과 사양에서 흰색 차가 가격이 더 비싸다고 한다. 물론 찾는 사람은 20~30대 젊은 층
이다.

 

풍부한 옵션과 ‘그랜저’라는 이름값
그랜저 HG의 가장 큰 장점은 고급스러운 옵션이다. 소위 ‘풀옵션’을 선호하는 국내 운전자 특성 덕분에 중고차 시장에도 풍부한 옵션을 갖춘 차가 많이 나온다. 옵션과 연식에 따라 셀러브리티, 로얄, 익스클루시브, 모던, 럭셔리 등 이름도 가지각색이다. 현대차가 해마다 연식 변경 모델을 내놓으면서 상품을 업그레이드한 탓이다. 예를 들어 현재 주행거리 4만 킬로미터인 2012년형 그랜저 HG 240 럭셔리는 대략 2000만원에 거래된다. 인조가죽으로 고급스럽게 마감된 모든 시트에 열선이 들어가 있고 운전석과 동승석을 전동으로 조절할 수 있다. 제논 헤드램프에 미끄럼 방지 시스템(TCS), 크루즈 컨트롤, 후방 카메라, 선루프, ECM 룸미러, 순정 내비게이션과 AV 시스템 등 일반적으로 선호도가 높은 옵션이 들어가 있다. 더 비싼 쏘나타와 K5 신차 구입이 망설여지는 이유다. 그랜저가 주는 예의 이미지가 아직 남아 있지만 ‘아빠 차’라는 기름기도 많이 빠지고 담백해졌다. 이젠 쏘나타와 K5보다 좀 더 고급스러운 차가 됐다.

 

 

 

모든 이에게 온기를 그랜저 HG의 모든 시트에는 따뜻한 열선이 깔려 있다.

 

 

이왕이면 2013년형부터
그랜저 HG가 처음부터 훌륭했던 건 아니다. 지난 2011년 그랜저 HG가 처음 나왔을 때 품질 논란이 많았다. 앞범퍼와 차체가 5밀리미터 정도 벌어져 있었고 도색도 거칠었다. 어떤 모델은 범퍼와 차체 색이 미세하게 다르기도 했다. 시동이 꺼졌는데도 전자식 스티어링휠 시스템인 MDPS에 전원이 공급돼 쉽게 방전된다는 항의가 빗발치기도 했다. 하이라이트는 배기가스 실내 유입이었다. 2012년형까지 배기가스가 실내로 유입돼 숱한 질타를 받았다. 수리를 거듭해도 나아지지 않자 피해 고객들은 리콜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는 차량결함 은폐 의혹으로까지 번져 검찰이 국토교통부 담당자를 불러 조사까지 했다. 결국 무상 수리로 일단락됐지만 배기가스 실내 유입은 고쳐지지 않았다. 다행히 2013년형부터는 품질을 강화했고 현대차는 가까스로 신뢰를 회복했다.

 

 

 

끌리는 이유 고급스러운 마감과 풍부한 옵션 그리고 적당한 가격 때문에 신차를 사려다가도 한 번쯤 눈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기능인지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패밀리카로 제격
가끔 부모님을 모시고 이동을 해야 한다거나 카시트에 앉지 않아도 될 만큼 큰 아이가 있는 가정에 그랜저 HG는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운전석과 동승석의 위치를 모두 전동으로 조정할 수 있고 겨울엔 모든 시트에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트렁크 용량도 454리터로 아주 넉넉하다. 국산차라 유지비에도 큰 부담이 없다. 실제로 그랜저 HG를 중고로 구입해 끌고 있는 지인의 말에 따르면 생각보다 유지비가 적게 들어 가계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는 그전까지 2012년형 YF 쏘나타를 타다 지난해 2500만원에 그랜저 HG 300을 중고로 샀다. 구입 후 타이어와 간단한 소모품만 교체했는데 전에 타던 쏘나타와 별반 차이 없다고 말했다.

중고차로 그랜저 HG를 사려면 2013년형 이후 필요한 옵션이 들어가 있는 차를 고르는 게 가장 좋다. 블루링크가 아무리 편리한 시스템이라고 해도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건 아니다. 그랜저 HG는 A 필러가 두꺼워 양쪽 시야가 좁다. 디자인 때문에 앞유리도 많이 기울어 있어 앞쪽 시야 확보도 좋지 않은 편이다. 만약 두 사람 이상이 함께 쓰는 차라면 시트 포지션 메모리가 아주 유용하겠다. 현대차는 신차 옵션 품목이 머리가 아플 정도로 많다. 각 옵션은 패키지로 묶인다. 예를 들어 가장 기본인 내비게이션 패키지 1은 내비게이션과 12채널 스피커로 구성된 오디오 시스템이 포함돼 있다. 가장 고급 옵션인 프리미엄 패키지 3는 운전자 메모리 시스템, 전자식 주차 브레이크, 블랙베젤 HID 헤드램프, 조명 도어스커프 등으로 구성돼 있다. 중고차는 신차처럼 옵션 패키지에 따라 정확하게 나뉘진 않지만 불필요한 옵션으로 쓸데없는 비용을 지불할 수 있으니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