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명절이 풍성하게 느껴지는 건 외할머니 때문이다. 우리 집은 매년 설과 추석마다 큰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바로 충주 외가에 내려갔다. 갈 때마다 외할머니는 큰손자 왔다며 넉넉한 품으로 포근히 맞아주셨다. 그러곤 한시라도 허기질까 덩치가 씨름 선수만 한 손자에게 끊임없이 음식을 내주셨다. 뿐만 아니다. 광으로 몰래 불러 용돈도 주셨다. 행여 잠자리가 궂을까봐 바닥의 온기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이불을 덮어주셨다. 살가운 손자가 아니라 항상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요즘 내 차 레이가 살짝 불만이다. 평소엔 아무 불편함 없이 잘 타고 다닌다. 작아서 서울에서 다니긴 ‘갑 오브 갑’이다. 그럼에도 뒷자리가 넓어 친구들과 다니기 나쁘지 않다. 다른 경차에서 내가 내리면 사람들이 구겨져 있다 펴지는 것처럼 보여 걱정하는데 레이는 그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짐공간이 좁은 게 흠이다. 뒷시트를 앞으로 최대한 당겨도 외할머니가 주시는 김치며 장이며 텃밭에서 키운 채소를 가져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뒷좌석을 앞으로 접자니 부모님을 모실 수가 없다. 챙겨준 것을 가져가지 못하면 외할머니는 그렇게 서운해하신다.

그럴 때면 늘 왜건이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떠오른다. 물론 개인적으로 왜건 성애자이기도 하지만 그 놀라운 실용성은 겪어보지 않고선 모른다. 단순히 짐공간만 넓은 게 아니다. SUV와는 달리 트렁크 바닥이 낮아 짐 싣기가 편하다. 아울러 근처 계곡이라도 가면 허리가 안 좋은 외할머니께서 부담 없이 앉으실 수 있는 임시 쉼터도 된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허리가 편치 않은 외할머니를 편히 모시려면 아무래도 여유로운 대형 세단이 나을 것 같다. 온갖 편의장비를 다 활용하시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마사지 기능과 오토만 시트는 정말 좋아하시지 않을까? 그럼 차로 5시간씩 걸리는 순천 큰외삼촌 댁에도 편히 다녀오실 수 있을 거고 멀리 바람 쐬러 가도 그리 피곤하지 않으실 텐데 말이다.

그런데 산을 좋아하시는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모시고 성묘 갈 걸 고려하면 SUV가 좋긴 하겠다. 외할머니는 연세가 있다 보니 무릎에도 퇴행성 관절염을 앓고 계신다. 오래 걷거나 경사를 오르면 통증을 심하게 느끼신다. 산 중턱에 있는 성묘지로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차는 단연 SUV다. 산들바람을 맞으러 뒷산 자락에 올라갈 때도 SUV 말고 다른 대안이 없다.

한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에 우리 엄마 아버지, 누나네 가족까지 모두 태우고 다니려면 미니밴은 있어야 할 것 같다. 넉넉한 공간에 모두 모여 왁자지껄하게 여행을 떠날 생각 하니 그냥 막 웃음이 터져 나온다. 아! 대체 무슨 차를 사야 한단 말인가! 이러다 비행기에까지 욕심이 뻗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핑계와 욕심은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지만 어차피 난 이번 설에도 레이를 타고 충주 외가에 갈 거다. 아마 한동안은 이 차를 타고 시골에 가지 싶다. 솔직히 얼마간은 차 바꿀 여력이 없을 것 같다. 월급이란 건 잠시 머물다 이내 흔적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외할머니 드릴 용돈부터 일단 쟁여놔야겠다.

왜건이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떠오른다. 그 놀라운 실용성은 겪어보지 않고선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