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이 지가 유작으로 삼고 싶다고 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 세상에 나온 지 14년이 흘렀다. 어쩌면 이와이 슌지는 그쯤에서 박제되었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까지, 그의 도전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성실하게 성장하고 있는 이와이 슌지의 진짜 이야기.
2016.01.18
1980년 세대 영화학도들에게 이와이 슌지란 신의 이름이다. 다르덴 형제, 워쇼스키 형제, 코엔 형제, 미카엘 하네케, 봉준호와 같이 만신전에 봉헌된 이름이다. 20대 초반, 내 동기 열 명 중 서너 명은 이와이 지 영화에서 본 장면을 어떻게든 딸리는 장비로 흉내 내려 버둥거렸다. 그에게 열광하건 그를 너무 감상적이라 혐오하건 그 시절 그 길목에서 이와이 슌지란 피해 갈 수 없는 돌뿌리 같은 존재였다.
영화 <소셜포비아>를 준비하며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다시 봤다. 새삼 지가 다해놓은 걸 내가 또 찍겠다고 지랄하는구나 싶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영화는 <언두>와 <이치카와 콘 이야기>이다. 하지만 가장 강렬한 이와이 지는 아마 죽을 때까지 <4월 이야기>일 것이다. 대학에 갓 들어와 매일 밤 술자리에 불려 다니던 무렵의 일이다. 술자리가 파한 후 지하철이 끊겨 난감해하는 나와 내 동기 둘을 한 선배가 자취방에 데려갔다. 술에 취한 선배는 우리한테 찐한 걸 보여주겠다며 에로비디오를 틀었다. 선배들이 무서웠던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옳은지 모른 채 얼어 있었다. 흥이 식은 선배는 비디오를 꺼버렸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하던 찰나, 선배는 곧장 다른 비디오를 데크에 집어넣었다. 화면 한가득 비처럼 내리는 벚꽃과 새로 이사온 집 마루에 옆으로 털썩 눕는 마츠 다카코의 등이 흘러나왔다. 선배의 자취방에서 에로비디오와 취기 그리고 <4월 이야기>가 뒤섞였다.
마침 난 스무 살이었고 그날은 4월 어느 밤이었다. 운동장에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플라이 낚시를 연습하는 마츠 다카코는 무얼 해야 할지 몰라 시간을 흘리고 붙잡는 스무 살의 정수를 캐치하는 이미지였다. 어쩌면 이와이 슌지는 거기서 박제되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다음 영화를 기획하고 촬영하고 세상에 내놨다. 그의 근작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추억과 과거와 호시절에 붙들리지 않았고 자유로워졌고 대담해졌다. 신작 <립 반 윙클의 신부>가 꽤 괜찮다는 평과 러닝타임이 3시간에 육박한다는 얘기에 나는 가슴이 뛰었다.
인터뷰하는 매체 중 우리가 마지막 순서였다. 피곤하고 지친 이와이 슌지의 얼굴을 보니 아차 싶었다. 나로서도 첫 인터뷰라 떨리는 상태로 준비해온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는 말을 아주 많이 했다. 이와이 슌지 영화의 대부분을 번역한 번역가이자 그날의 통역가는 ‘슌지가 10년간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며 놀라워했다. 이와이 지는 영화와 달리 겉으로 흔들림이나 감정이 새어 나오지 않는 고요한 호수 표면 혹은 너르고 단단한 돌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몰래 영업비밀을 캐낼 수 있었고(내가 감독이라는 사실은 인터뷰 말미에 밝히기로 했다) <동방유행>은 다른 곳에서 듣지 못한 이와이 슌지의 얘길 훔칠 수 있었다.
연이은 인터뷰에도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준 이와이 지
Q 이와이 슌지 필름 페스티벌의 지난 호 구매가 10월 31일부로 종료되었다. 뒤늦게 이 소식을 알고 굉장히 아쉬웠다. 이와이 지 필름 페스티벌의 운용은 어떤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A SNS가 발전한 만큼 다양한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이와이 지 필름 페스티벌도 그런 면에서 많은 도움이 된다. 창작 활동은 기본적으로 폐쇄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외부와 소통을 계속해나가려고 한다. 내가 속한 회사 ‘Rockwell Eyes’를 기반으로 한 모임 ‘Rockwell Kai’도 그런 맥락이다.
Q 내년 3월 개봉하는 신작 <립 반 윙클의 신부>도 SNS 관련 내용이다. SNS로 쉽게 결혼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라던데. 한국에서도 요즘 SNS를 통한 만남이 빈번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더욱 궁금하다.
A SNS를 계기로 결혼하게 된 여성이 현대사회의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 속이고 속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다.
Q 지금 한국의 인터넷은 혐오, 냉소가 가득하다. 일본은 어떤가? 영화를 통해 인터넷 사회를 부정적으로 그리고자 했나?
A 부정적인 면, 그리고 긍정적인 면을 모두 다루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의 사회, 예를 들면 일본의 결혼 제도 같은 낡은 사회 제도 또한 영화에 담았다. 전통적인 사회 시스템과 현 시스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이런 시대에 과연 사람은 누구와 만나고 시간을 보내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그것을 찾아가는 주인공을 그린 이야기다.
Q 비슷한 주제를 다룬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또한 내가 매우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이번 신작도 굉장히 기대가 크다.
A 일본보다 한국에서 먼저 개봉하니 꼭 봐달라.(웃음)
Q 당신의 다큐멘터리 <이치카와 콘 이야기>를 정말 좋아한다. 보면서 어딘가 모르게 애니메이션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당신의 최근작이 애니메이션 <하나와 앨리스 : 살인사건>이라는 지점이 흥미로웠다. <이치카와 콘 이야기>가 첫 다큐멘터리인 걸로 알고 있는데, 이 작업을 하면서 당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궁금하다.
A <이치카와 콘 이야기>를 작업한 해에 영화 <무지개 여신>을 프로듀싱했다. 이 영화는 내가 굳이 연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그해는 결국 연출한 작품이 없었다. 동시에 나의 새로운 프로필이 시작된다는 느낌이 있었고, 특별한 한 해였다. 결과적으로 그 후에 다양한 일에 도전하게 됐다. 내 인생을 통틀어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 하나의 큰 도전이었는데, 영화감독이 된 뒤에는 무엇에 뛰어들 것인가, 내 삶과 일을 어떻게 리셋할 것인지 고민했었다. 그 실마리를 찾은 게 그해였다.
Q 애니메이션 <하나와 앨리스 : 살인사건>을 작업한 뒤 이번 신작 준비에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매체가 다른 만큼 분명히 다른 부분이 있을 거 같다.
A <하나와 앨리스 : 살인사건>은 실사로 촬영한 것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것이다. 그래서 삼각대를 놓고 고정된 상태에서 촬영을 했다. 이제껏 카메라를 많이 움직이면서 영화를 찍어왔는데, 카메라를 고정해서 촬영해보니 멈춰서 찍는 쪽이 나름 설득력 있는 기법인 것 같았다. 애니메이션 작업이 그 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Q 영화 <뱀파이어>를 캐나다에서 촬영했다. 촬영할 때 굉장히 예민하다고 알고 있는데, 지금까지 살던 곳이 아닌 낯선 곳에서의 촬영은 어땠나.
A <뱀파이어>를 찍기 전에 <뉴욕 아이 러브 유>라는 옴니버스 단편을 미국에서 촬영한 적이 있다.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의 촬영 방식에는 장단점이 있다. 그래도 비교하자면 일본의 촬영 시스템에 비해 미국 시스템이 내게 더 맞는다. 오히려 편한 부분이 많았다.
Q 굉장히 의외다. 내가 듣기로는 미국 촬영 스케줄이 매우 타이트하다던데. 프로듀서와 조감독이 스케줄을 관리해서 쪼임을 많이 당하는 걸로 알고 있다. 많은 것들을 사전에 계산한 대로만 진행해서 한국의 박찬욱, 김지운 감독이 가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A 내가 다른 감독과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돈 관리를 직접 한다는 것이다. 예산을 짜고 그에 맞춰 진행하는 것이 익숙하다. 그래서 미국의 계산적인 시스템이 잘 맞았다. 보통 촬영 시간이 길어지는 데는 감독이 끄는 시간보다 조명팀이나 다른 팀에서 할애하는 부분이 많다. 내 촬영팀은 불필요한 시간을 줄이고 오직 배우의 연기를 찍는 데 주력했다. 다수가 오해하는 부분이 ‘촬영 시간을 많이 들일수록 심도 있고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것이다. 감독이 연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면 모르겠지만, 대기시간이 길다고 해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게 아니다. 사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나 <러브레터>는 촬영 시간도, 대기시간도 길었다. 그러나 정작 연출을 하는 나는 작업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그런 비효율을 경험한 뒤에 <릴리 슈슈의 모든 것>부터는 시간을 잡아먹는 시스템을 버리고 최대한 간편하게 진행했다.
Q 당신의 작품은 말도 안 되는 기적의 순간을 포착하는 힘이 있다. 신기한 건, 보통 영화는 계획하고 찍는 매체인데 계획만으로 그런 기적 같은 순간이 찍힐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콘티를 영화 전편에 그려놓고 엄격하게 따르는 편인가? 아니면 찍어야 하는 키 감정이나 이미지를 잡아놓고 그 순간에 셋업으로 찍는 편인가?
A 미리 계산하지 않고 현장에 맞춰서 찍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찌 보면 나는 감독이 아닌 것 같다. 각본을 쓰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현장에 가서는 프로듀서의 역할을 하면서 예산, 촬영 일정을 관리한다. 때로는 내가 직접 카메라를 잡고 촬영까지 한다. 감독보다는 원작자이자 프로듀서, 그리고 카메라맨에 가깝다. 최근에 다른 감독들과 만나서야 비로소 ‘감독이 이런 일을 하는 거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 작품의 현장은 ‘감독이 없는 촬영 현장’이었다고 봐도 된다. 원작자가 나타나서 카메라를 잡고 배우에게 연기를 지시하는 현장 말이다.
Q 현장의 흐름에 맡기면 좋은 이미지를 찍을 수도 있지만 또 아주 엉망으로 망칠 확률도 존재하지 않나? 다시 말해 다소 도박적이지 않느냐는 말이다.
A 기적적이고 훌륭한 영상, 그림은 내가 찍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이야기 자체를 각본 단계에서 깊이 구상해놓기 때문에 그 이야기에 영상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흐름을 일궈내는 것이다. 영상 자체를 치밀하게 계산해 짜놓으면 오히려 만들어진 이미지처럼 보인다. 나는 촬영 현장에 대본도 안 들고 간다. 직접 쓴 각본이라 내용은 알고 있지만 배우가 연습해온 대사를 확실히 기억하지 못한다. 현장에 맡긴다. 배우는 연기에 집중하고, 나는 그저 그것을 촬영할 뿐이다. 감독이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Q 당신은 언제나 여배우와 좋은 작업을 한다. 어떤 배우의 어떤 면모가 당신을 사로잡고, 같이 찍고 싶다는 충동을 불러일으키나?
A 잠재력이다. 영화를 찍을 때는 우선 내가 2~3년간 질리지 않고 작업할 수 있는 스토리가 필요하다. 촬영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지만 그 후에 1년 정도 계속 편집을 해야 한다. 결정적으로 그때 질리지 않는 배우여야 한다. 질리면 작업이 괴로워진다. 아무리 시나리오가 좋더라도 매일 컴퓨터 앞에서 편집을 하는데 감정이입이 안 되면 힘들지 않나. 그런 잠재력을 지닌 배우와 같이 작업하고 싶다.
Q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화장에서 가장 까다로운 사람이 여배우다. 그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더 좋은 장면을 끌어내는 접근법이 있나?
A 여배우의 중요한 부분은 헤어 메이크업, 스타일리스트, 매니저에게 맡기면 된다. 현장에서 나는 여배우와 가까이 있지도 않을뿐더러 친하지도 않다.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나대로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 현장 밖에서 식사를 하는 일이 있긴 하지만 현장에서는 직접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경우를 제하곤 배우에게 가까이 갈 일이 없다. 배우들과 많이 소통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여타의 사람들처럼 여배우와 연애로 발전을 한다든지 그런 일도 없다.
Q 배우와 대화할 일이 거의 없다는 얘긴가?
A 내가 먼저 배우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캐스팅이 제대로 되지 못한 경우다. 현장의 문제 해결이 나의 역할이기 때문에 내가 누군가에게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이 제 몫을 잘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문제없이 잘하는 사람에게는 말을 걸 필요가 없다. OK를 하면 됐지 “감독님 얘기를 더 해주세요”라면서 불만을 갖는 건 칭찬을 듣고 싶은 거다. 그건 아이들이나 하는 말이다. 감독이 칭찬해주는 사람은 아니지 않나? OK만 하면 내 할 일은 다했다.
About 영화감독 홍석재는 인터넷 사회의 마녀사냥을 주제로 한 영화 <소셜포비아>로 데뷔했다. 부일영화상 신인 감독상 등 다수의 영화제에서 수상, 최근 가장 주목받는 신인 감독 중 하나다.
Interviewer Hong Seokjae(Film Director)
신선한 질문으로 현장 관계자를 놀라게 한 홍석재 감독
EDITOR : 전희란PHOTO : 안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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