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GUAR XE
그때 난 솔직히 좀 지쳐 있었다. 밤샘 근무와 출장이 연속된 가운데 정신마저 살짝 풀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강릉에서 시승 행사가 바로 이어졌다. 평소 같으면 불평을 늘어놨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달랐다. 무조건 간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왜냐고? 시승할 차가 재규어 XE였다.

X타입이 폭삭 망하자 재규어는 D 세그먼트에서 자취를 감췄다. 마치 시프트와 딜리트를 함께 누른 듯 모든 흔적을 깨끗이 날려버렸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플랫폼부터 엔진, 서스펜션, 변속기까지 모두 새로운 것들만 고집했다. 단, 재규어의 개성과 전통만큼은 과거를 이어가려 애썼다. 그렇게 6년이 흘러 XE가 태어났다.

디자인은 딱 보면 재규어다. XJ와 XF에서 이어진 스타일이 XE의 안팎으로 물씬하다. 처음 봤을 때 너무 큰 게 아닌가 했던 리어램프는 자꾸 보니 눈에 익는다. 실내는 단정하다. 스포츠 세단의 역동성보다 프리미엄 브랜드의 고급감에 좀 더 신경 쓴 모양새다. 공간은 딱 좋다. 뒷좌석이 살짝 좁게 느껴질 수 있지만 동급 대비 부족할 건 없다.
시승은 디젤과 가솔린 모델을 번갈아가며 했다. 먼저 시승한 모델은 최고출력 180마력을 발휘하는 2.0리터 인제니움 디젤엔진이 들어간 XE 20d 포트폴리오였다. 고속도로에서 주로 시승했다. 힘은 동급 모델과 비슷한 수준이다. 숫자와 체감 모두 마찬가지다. 지치지 않고 잘 밀어준다. 8단 자동변속기는 일상 주행에서 좀처럼 rpm을 낭비하는 일이 없다. 1750rpm에서부터 43.9kg·m를 작렬시키는 엔진과의 호흡이 좋다.

성향은 안정감보단 쾌감 지향적이다. XE의 개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독일산 프리미엄 모델은 속도를 올리고 컨트롤을 급하게 가져가도 운전자에게 매우 정제된 느낌만을 전달한다. 반면 재규어 XE는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운전자에게 생생히 전달한다. 그게 바로 스릴이다. 그건 가솔린 모델인 20t로 달린 구불구불한 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으로 뒤쪽의 움직임이 크다. 세차게 꺾어진 곳일수록 체감되는 양상이 더 크다. 그래서 차체가 코너 안쪽으로 더 깊이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느낌일 뿐이다. 차는 여전히 운전자의 컨트롤 안에 머물러 있다. 스릴만 전달하는 거다. 다만 과장된 움직임 때문에 타이어 소리가 생각보다 빨리 들린다. 덕분에 실제보다 빠르게 달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반면 더 빠르게 달리겠단 일념이 꺾이기도 한다. 서스펜션 세팅은 경쟁모델 중 가장 균형이 좋은 것 같다. 굽이친 길에선 쏟아지는 무게를 든든히 받쳐주고 둔덕을 넘으면 출렁임을 유연하게 흡수한다. 앞 더블 위시본, 뒤 인티그럴 링크의 조합 덕분이다. 동급에선 XE가 유일하다. 공간에서 손해를 보고 구조가 복잡하며, 훨씬 무겁고 원가도 비싼데 재규어는 끝내 이 조합을 고집했다. 주행질감 때문이다. 재규어의 의지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아쉬운 것도 있었다. 고속에서 강하게 제동하면 뒤통수가 서늘하다. 차가 한쪽으로 약간 쏠리는 느낌이 들고 뒤쪽에 자잘한 움직임도 많다. 아울러 조향감이 살짝 가볍다. 최고속으로 치달으면 컨트롤에 약간은 부담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XE가 마음에 든다. 지쳤던 내게 활기를 불어넣었다. 자꾸만 성숙해지는 독일산 경쟁모델에선 이런 발랄함을 기대할 수가 없다. 고루한 안정만을 좇기엔 난 아직 젊다. 글/고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