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닌파리나에서 디자인한 50대의 작품들

 

나라마다 자동차의 특성은 모두 다르다. 독일차, 영국차, 일본차 등 ‘나라 이름+차’ 공식이 만들어질 만큼 나라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은 자동차의 성격을 결정짓는다. 브랜드 간의 치열한 인수합병 등으로 최근엔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지만 DNA는 변치 않는다. 특히 이탈리아차는 디자인에서 고유성을 잘 지켜나가며 다른 브랜드들에게 창의적인 영감을 준다. 이탤리언 카  디자이너들은 항상 시대를 앞서나가는 디자이너로 큰 주목을 받아왔다.

 

 

메르세데스 벤츠 W140 S 클래스

 

카로체리아, 작은 거인
이탈리아차를 말할 때 카로체리아를 빼놓곤 이야기가 안 된다. 카로체리아란 소량 주문생산 방식의 코치 빌더를 뜻한다. 중세 유럽에선 마차가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그때 장인들이 마차를 주문제작 방식으로 만들던 공방이 카로체리아다. 시간이 흘러 동력이 동물에서 엔진으로 바뀌자 카로체리아의 장인들은 자연스럽게 자동차로 전공을 바꾸고 지금까지 전통과 명맥을 잇고 있다.

자동차 산업이 발달하면서 카로체리아의 활동은 국가 간 경계를 넘나들었다. 1977년에 나온 크라이슬러 르바론의 차체도 크라이슬러가 흡수한 ‘르바론’이란 카로체리아에서 고안됐다. 우리나라의 포니, 레간자, 라비타, 에스페로도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의 작품이다. 이들은 단순히 차를 멋지게 그려내는 것이 아니다. 오랜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첨단 공학적인 원리도 함께 고려한다. 예를 들어 카로체리아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피닌파리나는 1972년 이탈리아 최초로 풍동실험실까지 갖췄다. 피닌파리나는 이때부터 디자인에 공기역학적인 요소를 도입해 첨단 기술이 접목된 디자인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로 나온 차가 엔초 페라리, 페라리 테스타로사 등이다.

이처럼 카로체리아는 단순한 자동차 디자인 하우스의 개념을 넘어 자동차 자체의 밑그림과 근간이 되기 시작했다. 규모는 완성차 브랜드와 비교할 수 없이 작지만 자동차의 정체성을 특정 짓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람보르기니 쿤타치

 

이탤리언 스타일은 계속 가야 한다
기아자동차의 디자인은 지난 2006년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하고 크게 바뀌었다. 한 가지 더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의사결정 구조다. 디자인에 대한 의사 결정을 경영진보다 전문 디자이너의 의견에 맞췄다. 독창적인 아이덴티티 없이 다른 차들의 장점을 가져다 붙이면 기능은 더 좋아질지 몰라도 차 자체의 개성은 함몰되기 십상이다. 디자인을 자동차 생산공정의 하나로 보고 정해진 타임라인대로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이 접근하는 것도 디자인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이탈리아는 마에스트로가 마음에 들 때까지 디자인을 다듬는다. 이러한 장인 정신이 조형적 창의성을 중시하는 지금의 이탤리언 스타일을 만들었다.

이탤리언 스타일이 대중성이 떨어진다는 것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양산형에 맞춘 차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이탤리언 스타일은 오히려 지금 더 인정받아야 하고 끌고 가야 한다. 그래야 자동차의 정체성이 사라지지 않는다.

 

 

메르세데스 벤츠 C111

 

살아 있는 전설, 마에스트로
알도 브로바로네를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는 올해 89세로 현재 살아 있는 이탈리아의 자동차 디자이너 거장 중 나이가 가장 많다. 요즘은 후학 양성에 힘쓰며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그는 35세의 젊은 나이로 피닌파리나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불후의 명작들을 만들었다. 페라리 365 GT, 란치아 감마, 푸조 504, 알파로메오 줄리아 1600 등이 그의 손에서 디자인됐다.

또 하나의 거장은 우리와 매우 친숙하다. 바로 현대 포니를 디자인했던 조르제토 주지아로다. 그는 이탈리아 자동차 디자인의 아이콘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다. 17세에 피아트에 들어가 일하다 1959년 누치오 베르토네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디자인을 시작했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24세였다. 당시 디자인했던 차가 페라리 250 GT, 피아트 850 스파이더, 알파로메오 쿠페 2000 등이다. 이후 1968년 알도 만토바니와 함께 자동차 디자인 하우스 ‘이탈디자인’을 설립하고 국제적인 디자이너로서 발돋움한다. 골프 1세대가 여기에서 나왔다. 이 밖에도 BMW, 아우디, 페라리, 마세라티, 알파로메오, 캐딜락, 포드, 부가티 등 그의 손을 안 거쳐간 차가 없다. 1980년엔 시대의 아이콘이 된 피아트 판다를 디자인했다. 최근엔 이탈디자인 잔여 지분을 아우디에 넘기고 사실상 은퇴했다.

 

 

페라리 365 GT

조르제토 주지아로 다음으로 거론되는 디자이너는 언제나 마르첼로 간디니다. 주지아로의 뒤를 이어 ‘베르토네’의 수석 디자이너로 들어갔지만 둘의 스타일은 정반대다. 주지아로가 대량생산에 초점을 맞춘 차를 디자인했다면 간디니는 직관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했다. 그의 첫 작품인 람보르기니 미우라만 보더라도 그의 스타일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간디니는 이어서 많은 남성의 드림카로 찬양받았던 람보르기니 쿤타치를 디자인하며 또 한 번 히트를 친다. 그는 이 밖에도 시트로엥 BX, BMW 1세대 5시리즈, 마세라티 기블리 Ⅱ, 르노 5 터보 등을 디자인했다.

카로체리아의 쇠퇴 등으로 이탈리아 카 디자인의 기운도 다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있다. 하나만 아는 소리다. 이탤리언 디자인 감성의 위세는 현재까지 등등하다. 일례로 21세기 카 디자인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한 아우디 디자인은 이탈리아 출신 디자이너 발터 드 실바가 견인해왔다. 그는 싱글 프레임 그릴과 ‘이모셔널 디자인(Emotional Design)’ 등의 디자인 요소와 언어로 기능적인 독일 디자인에 살아 숨 쉬는 듯한 감성을 불어넣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피아트 판다

1990년대 메르세데스 벤츠의 자동차들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무렵의 벤츠 디자인을 진두지휘한 인물 역시 이탤리언 카 디자이너 브루노 사코였다. 그가 디자인한 S 클래스와 R129 시리즈의 SL 클래스, W203 시리즈 C 클래스 등은 지금까지도 최고의 벤츠 디자인이자 가장 독일적인 카 디자인으로 손꼽힌다. 이 밖에도 1975년 처음 입사해 1999년 디자인 총괄에서 은퇴하기까지 그는 560 SEC 쿠페와 190 시리즈, CLK와 SLK 같은 수없이 많은 혁신적 벤츠를 그려왔다.

20세기와 21세기 초반에 걸쳐 카 디자인 업계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물은 크리스토퍼 에드워드 뱅글(크리스 뱅글)이었다. 그는 미국 ACCD를 졸업한 뒤 독일 오펠에서 카 디자이너로를 시작했고,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말까지 디자인 총괄로 독일 BMW의 디자인을 송두리째 뜯어고쳤다. 그의 과감하고 파격적인 디자인에 관해선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그가 BMW를 통해 선보인 감성 디자인과 그래픽 등이 21세기 카 디자인에 엄청난 영감을 불어넣은 것만큼은 묵살하기 힘든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1985년 오펠에서 이탈리아 피아트의 디자인실로 이직한 이후부터 공격적이고 영감 넘치는 카 디자이너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의 손끝을 거쳐 1993년 처음 선보인 피아트 쿠페가 대표적으로, 보디 앞뒤에 칼집처럼 깊은 캐릭터라인이 그려진 그 차는 당시 최고의 문제적 카 디자인으로 악명(?)을 떨쳤다.

 

 

 

페라리 612 스칼리에티 스케치

이처럼 자동차와 카 디자인의 역사를 견인해온 이탈리아의 자동차 디자인 거장과 만나는 건 자동차 디자인을 전공하는 모든 이들의 꿈이다. 그들로부터 체계적인 디자인을 사사할 기회가 있다면 땡빚을 내서라도 그 기회를 잡아야 한다. 하물며 이탈리아에서 당대의 대표적 이탈리아 카 디자이너들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면? 두말할 나위 없다. 당장 떠나야 한다. 다음 페이지에서 그 기회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