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의 흐름이 심상치 않다. 게리 콘 골드만 삭스 그룹 사장은 장기적으로 유가가 배럴당 최저 30달러 선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압델 엘 바드리 OPEC 총재는 유가가 떨어진다고 해서 석유와 가스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유가는 배럴당 200달러 이상으로 올라가리라 전망했다. 금융통신사인 ‘블룸버그’가 총 32명의 애널리스트와 트레이더에게 유가와 관련해 설문조사를 했다. 이 중 12명은 2월 13일까지 계속 떨어질 것, 10명은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답했다.

골드만 삭스는 유가 급락의 주요 원인으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국제 수요 감소와 2012년부터 급증한 미국의 셰일 가스 생산량을 꼽았다. 따라서 유가 하강 곡선은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유가 등락이 단순히 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 논리로만 해석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 예로 2012년은 아직 전 세계적으로 금융위기의 여파가 남아 있는 시기였다. 이 어려운 시기에 미국이 셰일 가스 생산량을 왜 증산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고, 그 배경은 미국 대선 속에 숨어 있다.

‘360만명의 일자리 창출, 680조원의 GDP 추가, 가구당 약 110만원의 저축 효과, 중동 에너지 수입 완전 철폐, 2020년까지 북미 지역의 에너지 독립 달성.’ 이 내용은 2012년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상대 후보로 나섰던 공화당 미트 롬니 후보의 공약 일부다. 대대로 석유산업과 친했던 공화당의 대선 주자가 내놓은 에너지 정책으로는 꽤 파격적이었다. 미국은 정당 구분 없이 자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국산 에너지를 증산할 계획을 오래전부터 세우고 있었다. 지금의 유가 하락 현상 뒤에는 이처럼 미국과 같은 강대국의 에너지 패러다임 변화가 숨어 있다.

돌이켜보면 석유는 지난 100년간 전 세계의 주요 에너지로 군림했다. 자동차, 선박, 비행기 등 대부분의 이동 수단 연료로 사용됐다. 냉난방과 전기 생산에도 쓰였다. 심지어 옷과 생활용품도 석유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 자동차에만 연관 지어 봐도 그렇다. 석유는 이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자동차 연료로서 전기, 증기 등 몇 개의 에너지 종류와 경쟁해 살아남았다.

세계 2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의 주요 산유국들은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승자로 부상한 미국의 화폐(달러)를 석유 거래의 유일한 결재 화폐로 인정했다. 덕분에 미국은 강력한 군사력은 물론 세계 금융시장의 기초 화폐까지 발행하는 경제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중동의 산유국들이 석유를 글로벌 경제의 주력 에너지로 지정해준 미국에 달러를 기축통화로 승격해준 것이다.

그러다 1970년대에 들어 미국은 두 번의 석유파동을 겪고 석유 의존이 경제는 물론 안보에도 상당한 악영향을 불러온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미 석유 맛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후였다. 당시는 폴리머 건전지나 태양광 전지 등 친환경 에너지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시대라 더욱 그랬다. 장기적인 해결책이 필요했고, 그중의 하나로 나온 것이 바로 CAFE(Corporate Average Fuel Economy)다. CAFE는 미국 연방정부가 1975년에 수립한 자동차 연비 제도로 기업이 생산하는 차의 평균 연비를 제한한다. 흥미로운 건 석유 친화 정책을 펼치던 공화당 정권에서 CAFE 수치가 하향 안정됐던 반면 탈석유를 외치던 민주당 정권에선 다시 상향 조정되곤 했다. 그러다 2001년 9월 11일 아침, 모든 미국인은 뉴욕과 워싱턴 DC에서 솟은 연기를 보며 필사적으로 중동의 에너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9·11 테러의 테러범 19명 중 15명은 사우디아라비아인이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본토 공격이라는 상황에서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적국으로 간주하고 침공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미국은 오히려 이라크를 침공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는 텍사스 석유재벌 출신으로 아직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면서 비로소 미국은 중동 석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오바마의 1차 대선 공약을 살펴보면 그 역시 미국의 풍부한 천연가스 개발과 증산 필요성을 여러 번 언급했다. 게다가 당시 미국은 셰일 가스 생산 기술 수준이 높아져 비용이 낮아진 상황이었다. 오바마 집권 이후 미국은 셰일 가스를 비롯한 자국 내의 다른 에너지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 석유 수입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에서 탈석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전기차 열풍이 불었다. 전기차 산업의 주역이 된 테슬라는 미국 정부의 귀빈이 됐다. 또한 이동 수단의 패러다임까지 흔들어놓았다. 다른 완성차 업체들도 하이브리드, 전기차, 수소연료전지차 등 대체에너지 자동차 개발에 속도를 붙이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다른 산유국들은 고유가 정책이 오히려 탈석유의 흐름을 가속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경기 침체 등으로 줄어든 석유 수요에 맞춰 공급을 감소하기는커녕 공급을 유지해 전 세계적인 유가 하락을 내버려두고 있다. 그렇다면 석유의 시대는 얼마나 더 지속될까? 오히려 이러한 유가 하락은 친환경차의 개발과 보급을 더디게 하지는 않을까? 나는 아니라고 확신한다. 미국과 유럽은 유가와 무관하게 자국의 신차 평균 연비 또는 탄소 배출량 제한을 지속해서 강화하고 있다. 여러 산유국 간의 에너지 패권 싸움에 한국을 비롯한 비산유국들은 숨죽여 관망하고 있다. 산유국이라는 거대한 이익집단과 겨룰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닌 단일 국가는 미국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금 하이브리드와 전기차의 매력에 빠져들어 있다. 테슬라 고객의 90 퍼센트 이상이 다음에도 테슬라 제품을 사겠다는 설문조사만 보더라도 전기차의 시장성은 충분하다. 이러한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확대돼 결국 수십 년 후에 내연기관 자동차가 멸종하는 것은 아닐까 상상해본다. 우리가 증기기관차를 박물관에서 보듯이 우리의 다음다음 세대는 내연기관차를 박물관에서 볼 수도 있다. 내연기관차 멸종의 원인은 바로 2010년대에 벌어졌던 미국과 산유국 간의 에너지 패권 싸움에서 비롯됐다는 설명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