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미 올해의 차 시상식 2 램 1500 레벨 3 혼다 NSX 4 쉐보레 볼트 EV 콘셉트 5 알파로메오 4C 스파이더

 

 

포드 F150 랩터

 

#1 선입견

메이저 브랜드의 회장들은 모두 CES에 집합했다. 자율주행 같은 차세대 기술들과 콘셉트카들도 거의 모두 CES에서 미리 공개됐다. 그것도 단 일주일 전에. IT산업의 본부인 미국 서부가 동부 디트로이트의 자동차산업까지 점령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북미국제오토쇼(NAIAS) 공식 홈페이지를 보니 로버트 보쉬나 델파이 같은 굴지의 부품 회사들은 아예 참가하지 않았다. 자동차의 미래를 살펴볼 수 있는 원천 기술의 개발자들이 참가하지 않는다니, 디트로이트 모터쇼도 이제는 커다란 자동차 박람회일 뿐이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선입견이었다.

 

#2 되살아난 미국의 힘, 젊은 CEO들 뜻밖이었다.

힘이 느껴졌다. 일본차에 치이고 한국차에 당하던, 그리고 IT에 위협 당하는 미국 자동차가 아니었다. 출품된 차들이 그랬고, 그곳의 사람들이 그랬다. 프레스 콘퍼런스의 시작을 알리는 쉐보레 부스에서부터 기운이 느껴졌다. 이날의 주인공은 2세대 전기차인 쉐보레 볼트도, 새로운 소형 MPV 콘셉트인 볼트 EV 콘셉트도 아니었다. 다름 아닌 자동차업계 최초의 여성 CEO 메리 배라였다. 공무원도 울고 갈 만큼 보수적이고 수동적이었던 GM의 조직을 개혁하고 있는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누구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게임체인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제너럴모터스이기 때문입니다. 전기자동차는 미래이고 우리는 준비돼 있습니다. 볼트 EV 콘셉트는 그중 하나입니다. 3만 달러 이하의 합리적인 가격으로 한 번 충전에 200마일을 달리는 전기차의 게임체인저입니다. 1년 반 안에 최종판을 공개하겠습니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아예 독립된 공간인 조 루이스 아레나를 사용한 포드는 역시 50대의 젊은 회장인 마크 필즈가 이끌었다. 그는 일주일 전 CES에서 “5년 이내에 자율주행 차가 시장에 나올 겁니다. 하지만 포드가 선봉에 설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에겐 그것을 얼마나 합리적인 가격으로 대중에게 공급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포드이기 때문입니다”라는 파격적인 발언을 한 인물. NAIAS의 포드 회견장은 완전 마초의 천국이었다. 포드는 앞으로 5년간 12차종 이상의 고성능 모델을 출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F150 랩터와 셸비 GT350R 머스탱에 이어 마침내 포드 슈퍼카의 전통을 잇는 포드 GT 콘셉트가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크 필즈 회장은 물었다 “언제 갖고 싶으세요? 내년이면 되죠?” 젊은 CEO에게선 힘이 느껴진다. 회사 내의 매너리즘도, 시장의 비관적 분위기도 그들에게는 도전의 기회일 뿐이라는 듯. 미국이 살아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힘센 자동차들이 있었다.

 

1 이번 북미국제오토쇼는 다시 일어선 미국 자동차 회사들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GM CEO 메리 배라는 그 중심에 선 이 가운데 하나였다. 2 포드 프레스 콘퍼런스는 마초의 향연이었다. 셸비 GT350 머스탱은 무대에서 드리프트를 뽐냈다. 3 포드 슈퍼카의 계보를 잇는 GT 콘셉트도 화끈한 픽업트럭 F150 랩터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3 슈퍼카+머슬카+대형 픽업=미국의 부활

‘에어컨? 없습니다. 뒷좌석? 없습니다. 후방 카메라? 트랙에서 필요 없는 물건은 싣지 않았습니다. 대신 카본파이버 휠이 도로주행용 차로는 세계 최초로 장착됩니다. 카본에어로 파츠가 보이십니까? 엔진은 포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자연흡기 V8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6단 수동변속기입니다.’ 포드가 내놓은 셸비 GT350R 머스탱은 도로주행이 가능한 트랙용 머신의 미국식 해석이다. 행사장에서 드리프트 ‘신공을 펼쳐주신’ 신모델 공개는 난생처음이었다.

반대로 포드 GT는 첨단 기술의 집합체다. 미드십에 올라간 600마력 넘는 3.5리터 V6 에코부스트 트윈터보 엔진과 듀얼클러치 7단 변속기, 카본파이버와 알루미늄 복합 차체 등으로 무장한 포드 GT 콘셉트는 데뷔 무대를 마친 뒤 포드 전시 부스에서 역대 포드 GT들과 나란히 섰다. 마크 필즈 회장이 말한 “포드가 선사하는 가슴 뛰는 순간”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캐딜락도 이에 질세라 CTS-V를 공개했다. 미국 머슬카의 향취가 물씬 나는 660마력짜리 6.2리터 슈퍼차저 엔진은 “독일차 다 나와!”라고 엄포를 놓는다. 듀얼클러치 변속기도 필요 없단다. 미국식 빅블록 슈퍼차저 엔진이 만드는 토크는 8단 자동변속기도 정신 바짝 차리게 만들 수 있다는 전형적 미국 마인드이다. 하지만 타도 독일차를 주장한 캐딜락인 만큼 ZF 전자제어 파워 스티어링과 브렘보 브레이크 등 적군의 첨단장비를 착실히 챙겼고 차체 곳곳의 진지한 보강도 이뤄졌다. 힘만 센 과거의 미국 머슬카는 절대 아니라는 얘기.

미국차는 아니지만 알고 보면 미국차인 슈퍼카도 출품됐다. 어큐라 NSX다. NSX가 발표된다는 소식은 이번 모터쇼 최대의 화제 중 하나였다. 이를 증명하듯 어큐라 프레스 콘퍼런스 현장은 발 디딜 곳 없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NSX 디자인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독특하지만 미국인이 디자인했고 미국에서 생산된다는 점이 더욱 이채롭다. 기술적으로는 하이브리드 구동방식으로 요즘 최고 슈퍼카의 트렌드를 따랐다. 트윈터보 V6 엔진과 모터 한 개가 듀얼클러치 9단 변속기를 통해 뒷바퀴를 굴리고 양쪽 앞바퀴에 모터가 하나씩 더해진다. 레일 위를 달리는 듯한 코너링 성능과 ‘딜레이 제로’의 즉각적 반응으로 요약되는 슈퍼카의 신개념을 강조하는 NSX를 오는 5월이면 미디어 시승회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한다. 행사 마지막에 모두에게 샴페인을 돌리는 그들에게선 해냈다는 자신감이 보였다. 나도 축하를 보냈다.

미국 브랜드들은 물론 일본 브랜드들도 참여할 수밖에 없는 대형 픽업 시장의 부활도 미국의 힘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램 전시 부스는 어디선가 트랜스포머가 덜컥 나타날 것처럼 풀사이즈 픽업들이 즐비했다. 포드도 ‘올해의 트럭’으로 선정된 F150과 이날 발표된 고성능 오프로더 F150 랩터를, 쉐보레는 콜로라도를 비롯한 다양한 픽업 모델을 전시했다. 토요타 타코마, 닛산 타이탄 등 일본 풀사이즈 픽업도 잇달아 선보였다. 우리의 현대자동차도 시장의 분위기를 미리 파악한 듯 싼타크루즈 콘셉트 모델(HCD-15)을 내놨다. 도시 정글을 위한 차라는 표현처럼 터프한 디자인에 CUV와 가까운 주행감각을 버무렸다는 게 현대차의 설명이다. 2.0리터 R디젤 엔진과 H트랙 네바퀴굴림 시스템 조합의 구동계를 봐도 본격 오프로더는 아니다. 하지만 현대가 최초로 제시하는 중대형 픽업의 방향을 볼 수 있어 반가웠다.

이른바 ‘크고 강한 것이 아름다운’ 남자의 자동차가 다시 돌아왔다. 친환경을 얘기한 토요타 연료전지차 미라이나 혼다 FCV가 오히려 샌님처럼 보이는 디트로이트는 남자들의 세계였다.

 

1 셸비 GT350 머스탱은 포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자연흡기 V8 엔진을 얹었다. 2 폭스바겐 크로스 쿠페 GTE 콘셉트(사진) 등 여러 신모델과 콘셉트카가 공개됐지만 독일 메이커 부스는 전반적으로 활기가 떨어져 보였다. 3 중형 픽업 시장을 겨냥하는 현대 HCD-15 싼타크루즈 콘셉트. 4 CTS-V, 캐딜락이 아직 살아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

 

#4 FCA 그리고 알파로메오

크라이슬러 그룹과 피아트 그룹이 통합한 FCA가 출범 뒤 처음으로 북미국제오토쇼를 맞이했다. 한 공간에 크라이슬러, 지프, 닷지, 램, 피아트, 마세라티, 알파로메오, 모파까지 동원된 FCA 부스는 미국과 유럽의 개성 강한 브랜드들이 모여 있어 그 자체로 작은 모터쇼였다. 게다가 스포츠카부터 정통 오프로더까지 그 커버리지도 가히 최고였다.

이번 주인공은 단연 알파로메오. 새로운 브랜드 계획에 따라 마세라티와 FCA 프리미엄 브랜드의 축을 이룰 알파로메오는 레이싱 헤리티지를 강조하는 프레젠테이션과 함께 프레스 콘퍼런스를 시작했다. 알파로메오라는 유서 깊은, 그리고 가슴 뜨거운 브랜드를 본격적으로 미국 시장에 론칭함을 선포하는 예식 같은 분위기. 그리고 그 선봉장인 4C 스파이더가 세계 최초로 공개됐다. 이는 2018년까지 새롭게 선보일 8가지 모델의 신호탄에 불과하다. 2015년 알파로메오는 미국 내 판매 네트워크를 확대하는 등 본격 경쟁을 시작한다.

너무나도 다양한 차가 전시돼 나와 같은 자동차 마니아들에겐 놀이동산 같은 FCA 부스에는 사업적으로 중요한 모델도 많았다. 먼저 한국 출시가 임박한 신형 200C가 눈에 띈다. 알파로메오 줄리에타와 체로키까지도 플랫폼을 공유하는 이 모델은 심지어 주요 부품들은 공유하면서 각자의 특성과 용도에 맞게 변경되는 유연성까지 갖췄다. 잠깐 시승한 결과, 미국형 패밀리 세단에 걸맞은 편안한 승차감 이면에 유럽의 탄탄한 주행안정성이 존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자세한 시승기는 다음 기회에. 지프 레니게이드도 다양한 모파 액세서리와 함께 전시됐는데, 오프로더는 물론 디자인이 독특한 아이콘 모델로도 매력이 커 보였다.

실패의 기억을 갖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거인이 하나로 합쳐진 FCA는 커버하는 세그먼트와 캐릭터의 범위가 역대 최강이다. 이들이 과거의 아픔에서 얻은 교훈을 어떻게 고객의 이득으로 승화시킬지 관심을 갖고 지켜볼 생각이다. 현재까지는, 분위기가 좋다.

 

#5 독일 브랜드, 허를 찔리다

최근 세계 자동차 시장을 주도하는 독일 브랜드의 위세는 여전했다. 부스 면적도 매우 넓고 신기술도 많지만 다만 CES와 디트로이트의 구분이 불명확했다. 세계 최고의 기술과 미국이 필요로 하는 모델들을 선보이고 있지만 머리로 하는 비즈니스 마인드가 강하게 느껴지는 걸 부정할 수 없다. 미국 브랜드들이 주도한 분위기의 전환에 허를 찔린 듯하다. 신기술은 CES를 보면 되니 생략. 아우디 Q7과 Q3, BMW 6시리즈와 메르세데스 벤츠 GLE 쿠페 SUV, 폭스바겐 크로스 쿠페 GTE 콘셉트, 포르쉐 911 타르가 GTS 같은 신모델과 콘셉트카가 있었지만 큰 반향은 얻지 못했다. ‘북미 올해의 차’로 선정된 골프가 유럽 브랜드의 자존심을 세웠다.

 

1 승용과 SUV, 픽업, 럭셔리와 고성능에 전담 튜너까지 미국과 유럽의 개성 강한 브랜드가 한데 모인 FCA 부스는 그 자체로 작은 모터쇼였다. 2 친절하고 예뻤던 아이신 부스의 리셉셔니스트는 결코 잊히지 않을 거다. 3 상복 터진 폭스바겐 골프. 디트로이트 쇼에서 ‘북미 올해의 차’까지 수상했다. 4 모파가 손질한 지프 레니게이드 3종도 관심을 끌었다. 

 

#6 트로피, 트로피, 트로피

유명하다는 브랜드들마다 유리 캐비닛이 있었다. 무엇인고 하니 그들이 지금까지 받은 상을 다 모아놓은 곳이었다. 미국 소비자들은 대단히 합리적이다. 수상 경력이 많은 브랜드에 대한 신뢰도는 절대적이다. 포드와 폭스바겐은 방금 수상한 ‘올해의 차’ 트로피를 즉시 활용하고 있었다. 공신력 있는 기관이 주는 상을 통해 쌓은 브랜드 신뢰도가 중요함을 다시 한 번 느낀다.

 

#7 부품업체는 없고, 사람은 있고

이번 디트로이트 쇼에서 가장 심각하게 아쉬운 부분이었다. 심지어 모터쇼 현장엔 미국 델파이도 없었다. 부품산업이 미래의 자동차 신기술을 선도한다는 점에서 볼 때 미국의 향후 기술 주도권이 걱정되는 부분이다.

어디에나 인상적인 사람들은 있다. 내 질문에 끝까지 성의를 다해 대답해준 줄리오 카스파리 (Julio Caspari) 북미 ZF 대표이사, 미국에 최초로 진출한 중국산 고급차 볼보 S60 롱 휠베이스에 대한 질문에 성의껏 답해준 볼보 상하이의 알렉산더 페트로프스키 제품 담당 디렉터, 잊지 않고 기술자료를 이메일로 보내준 아이신 부스의 이름 모를 리셉션 아가씨까지. 그대들이야말로 진정한 자동차산업의 주인공이십니다.

시장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이번 디트로이트 모터쇼는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신기술의 전쟁 같았던 지난 몇 년은 자동차 회사와 부품사, 배터리 회사와 모터 회사 등이 자기들이 잘하는 것을 더 팔려는 ‘판매자 주도’의 분위기였다. 하지만 디트로이트는 명확하게 말한다. 사고 싶은 사람이 좋아하는 차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금 잘나간다고 맘대로 했다간 한 방에 훅 가는 수가 있다고. 이미 미국 회사들이 겪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