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팔라는 미국에서 흔한 차였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을 때마다

엔진오일도 한 통씩 보충해야 했지만 그땐 모든 차들이 그랬다. 그렇게 미국 생활에 젖어갔다.

자존심을 올려준 프라이드
내 첫 차는 1988년형 기아 프라이드다. 정확히 말하면 3도어 DM 5단 수동 모델로, 가격은 423만원이었다. 출고 당시엔 에어컨을 달지 않고 나중에 달았는데 기아차 정품으로 24만원이 들었다. 이걸 왜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내 돈으로 사서 내 이름으로 등록했던 첫 번째 차라 그런 모양이다. 차는 재미있어야 하고, 성격이 분명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학생 입장에서 값이 비싸거나 유지비가 많이 드는 차는 부담스러웠다. 또 하나 솔직하게 고백할 것이 있는데 처음 사는 차인 만큼 새 차를 사고 싶었다(지금 젊은이들에게 하는 조언과는 정반대다. 미안하다). 이런 조건을 만족하는 차를 고르긴 어렵지 않았다. 당시에는 차종이 많지도 않았고, 다른 모델에 비해 값이 저렴한데도 달리는 즐거움이 크고, 실내 활용도가 좋은 프라이드가 딱 맞아떨어졌다.

그 당시 프라이드는 네 가지 트림이 생산됐다. 내가 선택한 모델은 안개등과 뒷유리 열선, 뒷유리 와이퍼 등 안전장비도 충분했고, 뒷시트를 나눠 접을 수 있어 실용성도 좋았다. 프라이드는 차체가 작지만 앞시트가 완전히 펴지는 풀 플랫 시트가 가능해 ‘차 안에서 자고 싶을 만큼’ 차가 좋았던 내겐 진정한 드림카였다. 프라이드 설명서에는 앞시트만 풀 플랫이 된다고 나와 있었지만 요령만 조금 알면 뒷시트 등받이를 트렁크 쪽으로 완전히 눕힐 수도 있었다.
프라이드는 마치 이탈리아 차처럼 뜨거웠다. 토크 스티어가 심해 방심했다간 운전대를 놓칠 정도였지만 휠 스핀을 일으키며 야생마처럼 출발할 정도로 엔진의 저속 토크가 좋았고, 클러치나 수동변속기의 조작 감각이 아주 명료했다. 게다가 한계는 높지 않아도 그 감각 또한 뚜렷해 달리는 즐거움이 큰 차였다. 일본 브랜드로서 뜨거운 피가 흐르는 마쓰다와 세계적인 브랜드였던 포드 그리고 기계에 관한 한 자신이 넘쳤지만 자동차 합리화 조치 때문에 승용차를 만들지 못했던 기아차가 의기투합해 만들었던 프라이드. 기아차가 프라이드로 한풀이를 했듯 나 역시 프라이드로 차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있었다. 이런 생생한 감각이 살아 있는 차가 하나쯤 있어도 좋을 텐데…. 요즘 차들은 너무 매끈하다.
 

미국 차 한번 타봐?

어린 시절 1950~60년대 미국 차는 꿈속의 차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과 재벌 몇 명이 커다란 미국 세단을 탔다. 나는 도저히 탈 수 없는 차였다. 그러다 1980년 미국에 가게 됐다. 차를 사려는데 돈이 궁한지라 중고차를 뒤졌다. 당시 미국은 1973년 석유파동 이후 일본 소형차들이 금값이었다. 쓸 만한 중고 코롤라가 5000달러를 넘었다. 그런데 꿈에 그리던 대형 미국 세단이 훨씬 쌌다. 아무도 큰 차를 바라지 않는 시대였다. 한국인 정비사가 소개한 쉐보레 임팔라는 9년 정도 된 차였기에 많이 낡아 보였다. 1200달러에 사기로 하고 며칠 뒤 찾아가니 그릴과 사이드 몰딩을 새것으로 바꿔 차를 깨끗하게 만들어놨다. 칠이 벗겨진 부분을 터치 페인트로 손보고, 찌그러진 부분은 무시하니 완벽한 차가 됐다. 길이가 5.6미터가 넘는 임팔라는 문짝이 양쪽에 하나뿐인 2도어 쿠페 스타일이었다. 이렇게 커다란 차에 문짝이 2개뿐인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쿠페인데 앞자리는 벤치 시트라 운전석이 조수석과 함께 움직였다. 드나들기가 불편한 뒷자리는 드넓었다.
적당히 색이 바랜 가죽이 더 이상 해지지 않도록 살살 달래서 타야 하는 가여운 차였다. 라디오가 고장 났는데 동네 폐차장에 가서 똑같은 차를 뒤져 꼭 맞는 라디오를 찾았을 때 희열은 정말 컸다. 임팔라는 미국에서 흔한 차였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을 때마다 엔진오일도 한 통씩 보충해야 했지만 그땐 모든 차들이 그랬다. 그렇게 미국 생활에 젖어갔다. 스몰 블록 V8 6.6리터 엔진은 최고출력이 255마력에 불과했지만 토크가 좋았다. 펀치력이 엄청나서 활기차게 달렸다. 기어레버가 칼럼식의 자동 3단 기어인데 3단에서도 답답함을 몰랐다. 탱크 같은 보디가 미끄러지듯 하는데 가느다란 스티어링휠은 손가락 하나로 살살 돌아갔다. 임팔라는 고장도 없이 잘 달렸다.
뉴욕에 살면서 지하철을 주로 타고, 차는 주말에만 탔기에 기름값은 신경 쓰지 말자고 나를 달랬다. 커다란 덩치 때문에 길거리에 주차하기가 부담스러웠지만 뉴욕에선 주차할 때마다 앞차와 뒤차를 범퍼로 밀어대야 했기 때문에 적당히 상처 난 임팔라는 부담이 없었다. 겨울이 오자 뒷바퀴에 스노타이어를 달았는데 그 후로 떼어내지를 않았다. 여름용 타이어가 더 닳았기 때문이다. 왠지 임팔라에 돈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사이즈가 큰 스노타이어는 뒤를 들어 올려 자세가 더 멋져 보였다. 4년을 타고 귀국하면서 팔려고 내놓으니 금방 연락이 왔다. 임팔라는 1970년대의 베스트셀러였다. 미국인의 정서가 가득한 차였다. 차를 사러 온 청년은 두말없이 현금으로 1500달러를 지불했다. 그는 좋은 차를 산 것 같았다.
 

현대 엠블럼을 단 비스토
돌이켜 보면 난 시대를 앞서갔던 모양이다. 작지만 고급스러운 차를 원했다. 그래서 더욱 나만의 차를 고르는 데 고민이 많았다. 내 첫 차는 기아 비스토다. 계약은 1999년에 했지만 해를 넘겨 차를 받았다. 워낙 흔치 않은 구성으로 주문한 탓이다. 영업사원은 계약서를 쓰는 동안 은근히 만류했다. 그럴 만도 했다. 미리 뽑아놓은 차를 한 대 가져가면 편할 텐데, 내 차는 주문과 함께 공장에서 만들어야 했다. 일단 컬러가 검정이다. 에어백은 운전석과 조수석 양쪽 다 주문했다. ABS도 빼놓을 수 없었다. 카세트 플레이어를 포기해야 달 수 있는 CD 플레이어까지 기어이 달았다. 3단 자동변속기도 넣었다. 옵션만 놓고 보면 준중형차가 부럽지 않았다.
나의 기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같은 생각인데, 난 아무리 애를 써도 기아 엠블럼에 정을 붙이기 힘들었다. 정비소를 찾았고 그릴 한복판과 테일게이트에 달린 기아 엠블럼을 다 뗐다. 그리고 현대 엠블럼으로 바꿔 달았다. 그렇게 완벽한 편은 아니어서 휠 허브까지 현대로 바꾸진 못했다. 당시 정비소 직원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비스토는 다양한 장점과 단점을 지닌 차였다. 가장 큰 장점은 아담한 덩치다. 어떤 골목길도 망설임 없이 쏘다닐 수 있었다. 앞뒤 오버행이 짧아 주차도 쉬웠다. 취재 때문에 이곳저곳 돌아다녀야 하는 기자의 발로 적격이었다. 하지만 3단 자동변속기(4단 자동변속기 단 비스토는 나중에 나왔다)는 두고두고 아쉬웠다. 시속 40킬로미터 이상에선 3단으로 모든 영역을 커버해야 했다. 고속으로 달릴 때면 만만치 않은 소음을 냈다. 연료도 덩치에 안 어울리게 마셔댔다.
비스토를 타는 내내 “취향 특이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이런 취향을 가진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몇 년 뒤 중고차로 내놓자 곧장 전화가 걸려왔다. “제가 제주도에 사는데 내일 사러 갈게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진짜로 왔다. 일사천리로 계약을 마친 비스토는 인천항으로 달려갔다. 그 후부터 제주도에 갈 때마다 검정색 비스토만 보면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나의 사랑 나의 스파크
딱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되도록 작은 차일 것, 일시불로 살 수 있을 것. 넉 대의 차를 목록에 올려놓고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폭스바겐 골프, 미니 쿠퍼, 스마트 포투, 쉐보레 스파크. 골프와 스파크 사이에서 좀 망설였지만 결정적으로 마음을 움직였던 건 ‘수동변속기 경차’였다. 옵션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기본에 기본만 생각했다. 공조장치의 버튼을 누르는 것과 다이얼을 돌리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지? 그건 불편도 아니었다.
과연 자동차를 소유하는 데서 오는 쾌감의 결은 풍성하고 또 다채로웠다. 일단 경차라서 누릴 수 있는 수많은 혜택들. 출장길에 공항으로 향할 땐 한 번도 리무진 버스를 탄 적이 없다. 인천공항 장기주차장에 5박 6일을 세워놔도 리무진으로 왕복하는 차비에 다시 집으로 가는 택시비를 더한 값보다 쌌다. 보험료도 그랬다. 약 80만원에서 시작한 보험료는 1년 만에 반 정도로 떨어졌다. 여기에 수동변속기를 운전할 때만 누릴 수 있는 갖가지 일들. 밤 11시 이후에 강변북로를 달릴 땐 정속주행 중인데도 시비 걸듯 추월하는 택시를 따라잡기도 여러 번 했다. 5단에서 4단, 3단까지 내리면서 엔진회전수가 올라갈 때 나는 귀엽고 당찬 소리를 좋아하기도 했다. 995cc 휘발유 엔진은 늘 최선을 다한다는 인상을 줬다. ‘사람이 셋 이상 탔는데 가파른 언덕을 못 올라갈 땐 한 명이 내린 후 다시 올라가보세요.’ 설명서 어딘가에 써 있는 이런 문구도 재치로 읽었다. 난 아직까지 어디서도 위축된 적이 없고, 기어를 바꿀 때마다 이 작은 차와 대화를 나누는 기분마저 든다.
겨울엔 남자 셋이 스키까지 싣고 강원도 어디로 놀러 가기도 했고, 장마가 한창이던 어느 토요일 오후에는 혼자 정읍까지 가서 쑥국을 먹고 올라오기도 했다. 아직 한국에 출시되지도 않은 차를 타는 호사를 누리고 돌아온 공항에선 짐을 찾을 때부터 내 차 생각을 한다. 시동을 걸고 다시 서울로 향할 땐 음악을 크게 듣는다. 차를 모는 재미는 돈이나 제원이 좌우할 수 없다는 것, 이 작은 차에도 필요를 상회하는 기능과 여유가 있다는 걸 벌써 3년째 고맙고 애틋하게 깨닫는다. 난 아직도  스파크와 함께 산다.

내 차가 사라졌다
여의도 밤공기는 촉촉했다. 미지근한 수은등 밑에서 내 생애 첫 차가 될 프라이드를 기다렸다. 짙은 회색(쥐색)이었다. 능숙하게(보이고 싶어서) 엔진룸부터 열었다. 엔진오일을 찍어 냄새를 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짝을 감싼 고무를 뒤집어
손톱으로 긁으며 “조수석 문짝은 바꾸셨나 봐요?” 했다. 그렇게 문짝 하나를 물고 늘어지면서 10만원을 깎았다. 서류를 받아 집에 와서 아파트 앞에 곱게 주차했다. 14층에서 내려다본 첫 차는 정말 뿌듯했다. 꿈속에서도 반듯한 쥐색 지붕이 나타났다.
다음 날 아침, 기지개를 켜다가 다리에 힘이 풀렸다. 눈을 의심했다. 염통이 쿵쾅거렸다. 어제 똑똑히 봤던 쥐색 지붕이 없다. 상반신을 통째로 내밀고 내려다봐도 정말 없다. 어깨가 늘어난 ‘런닝구’만 입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유난히 느린 엘리베이터는 층마다 멈췄다. 닫힘 버튼을 계속 때렸다. 1층 주차장에도 쥐색 프라이드는 없었다. 4190, 4190, 4190. 어제 외웠던 초록색 번호판을 정신병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드디어 찾았다! 그런데 쥐색이 아니다. 눈을 껌뻑거리며 손등으로 비볐다. 난생처음 보는 녹색 프라이드다. 손에 쥐고 있던 열쇠로 문이 열리고 시동도 걸린다. 어젯밤 서류를 건네받았던 그 프라이드가 맞다. 신기했다. 프라이드에 이런 색이 있었나? 원인은 수은등이었다. 누런 수은등 밑에서 녹색 프라이드는 마치 쥐색처럼 보였다. 물론 녹색 프라이드를 알고 난 후에는 선명한 녹색으로 보였지만 여의도에서 처음 만난 녹색 프라이드는 분명 녹색이 아니었다. 짙은 잿빛이었다.
녹색 프라이드를 타고 다녔던 난 이른바 ‘유명세’를 탔다. 한적한 것 같아서 불법 유턴이라도 하면 바로 휴대전화가 울렸다. “진택아, 어디서 막 돌리고 그래. 산울림소극장 앞에서 ‘끼기긱!’ 한 거 너 맞지?” 카페에서 데이트할 때도 “형, 학교 안 오고 뭐해? 애인 생겼어?”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아무튼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프라이드를 타고 다녔던 2년은 혼자 발가벗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2년 동안 타고 다니며 똑같은 녹색 프라이드를 딱 한 번 신호대기 중에 만났다. 부둥켜안고 싶을 만큼 반가울 줄 알았는데 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도 휴대전화 뚜껑을 열고 뭔가를 두드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