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한다. 혼다 레전드 하면 대우 아카디아가 먼저 떠올랐다. 오래전 출시된 그 차를 실제로 운전해본 적은 없다. 그저 이름의 의미처럼 전설(Legend)적인 존재일 뿐이다. 어쩌면 ‘그 차 정말 좋아’라는 사람들의 입소문, 그리고 그 차의 외모를 참 좋아했던 내 동심이 어슴푸레한 신화(Myth)를 쌓아 올린 건지도 모른다. 아카디아는 2세대 레전드였다. 이번에 만난 레전드는 5세대다. 개인적으론 처음 만난 레전드다. 아니, 처음 만난 어큐라 RLX다. 그동안 출시된 레전드는 모두 어큐라란 브랜드로 북미 시장에서 판매됐다. 1세대와 2세대 레전드는 어큐라 레전드, 3세대와 4세대 레전드는 어큐라 RL이란 이름으로 어큐라의 기함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모두 혼다 레전드로 먼저 출시됐거나 최소한 혼다와 어큐라로 동시에 발표됐다. 그런데 5세대 레전드는 어큐라 RLX란 이름으로 지난 2013년 3월 북미 지역에서 처음 판매되기 시작했다. 레전드란 명찰을 달기 시작한 건 지난 2014년 11월 일본에서부터다. 둘 사이엔 1년 반 정도의 시간차가 존재한다. 즉, 이번만큼은 혼다 레전드가 어큐라 RLX를 양자로 들였다는 게 좀 더 정확할 거다.

어큐라 RLX를 혼다 레전드로 바꾸며 달라진 건 로고밖에 없다. 두툼한 크롬 장식이 들어간 어큐라 특유의 라디에이터 그릴이 그대로 들어갔다. 로고만 바꾸면 영락없는 어큐라다. 라디에이터 그릴 양옆으로는 잘 깎은 크리스털을 박아놓은 듯한 헤드램프가 자리 잡았다. 이름은 주얼 아이 LED 헤드램프다. 알아서 이런저런 조절을 하는 헤드램프는 아니다. 양쪽에 각각 10개의 LED로 이뤄진 고정형 램프다. 램프의 위치별로 빛을 비추는 각도가 다르게 설정됐다. 보다 넓고 빈틈없이 비추기 위해서다. 

인상은 당당하다. 옆으로 길쭉하게 이어진 헤드램프와 라디에이터 그릴 덕에 우람해 보인다. 모서리마다 날카롭게 각을 세워 역동적인 느낌도 풍긴다. 보수적으로 바뀐 어코드에 비해 젊은 인상이다. 옆모습은 전형적인 북미형이다. 앞뒤 문짝을 부풀려 볼륨감을 높였다. 뒷모습은 무난하다. 헤드램프와 대칭을 이룬 덩치는 꽤 크다. 길이는 5미터에 달하고 폭은 1미터 89센티미터, 높이는 1미터 47센티미터다. 짐작조차 안 되면 신형 제네시스를 떠올리면 된다. 단지 제네시스보다 1센티미터 길 뿐 높이와 너비는 모두 같다. 하지만 제네시스처럼 커 보이진 않는다. 

실내는 어큐라식이다. 어큐라에서 입양된 레전드라는 게 여기서도 티가 난다. 계기반과 운전대, 센터페시아 구성은 모두 어큐라와 공유하는 부분이다. 실은 이런 구성을 처음 선보인 게 바로 이 레전드이긴 하다. 지난 2013년 레전드 출시 이후 등장한 모델들이 모두 비슷한 구성으로 다듬어졌다. 
 

SPECIFICATION  기본 가격 6480만원 레이아웃 앞 엔진, FWD, 5인승, 4도어 세단 엔진 V6 3.5ℓ SOHC 314마력, 37.6kg.m 변속기 6단 자동 공차중량 1825kg 휠베이스 2850mm 길이×너비×높이 5000×1890×1480 복합연비 9.7km/ℓ CO₂ 배출량 184g/km
 

전륜구동차임에도 센터터널이 불쑥 올라와 꽤 안정적인 느낌도 준다. 오디오를 제어하는 센터페시아 디스플레이는 요즘 혼다에서 밀고 있는 장치다. 사실 그리 편한지는 모르겠다. 이 차의 주요 고객이 될 40~50대에겐 오히려 낯설 수도 있겠다. 오디오는 크렐이다. 크렐이란 오디오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오디오를 켰는데 소리가 깊어 찾아보게 됐다. 사실 요즘 수많은 차들이 고급 오디오를 달고 나오지만, 모든 오디오가 이름값을 하진 않는다. 크렐은 분명 이름값을 한다. 이퀼라이징 의도를 스스로 파악하는 것처럼 기대하는 소리를 잘 들려준다. 세밀한 소리도 잘 전달한다. 가볍게 뜨는 소리도 없다.

엔진은 3.5리터 V6 직분사 자연흡기 엔진이다. 최고출력은 314마력, 최대토크는 37.6kg·m를 뿜어낸다. 이 엔진은 지난 1999년 처음 등장한 J35 계열이다. 오랜 시간 동안 다듬어져 숙성된 성능을 보여준다. 반응도 좋고 힘도 넘친다. 원할 때 원하는 딱 그만큼의 힘을 발휘할 줄도 안다. 밀어붙이는 느낌도 박력 있다. 그런데 조화를 이루는 6단 자동변속기가 좀 느긋하다. 변속과 반응이 모두 그렇다. 달리기보단 승차감을 높이기 위한 세팅이다. 그럴 땐 스포츠 모드를 활용하면 좀 낫다. 그래도 급한 조작엔 잠깐씩 나 몰라라 한다.

주행안정감은 좋다. 운전이 조금은 서툴더라도 고속에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겠다. 덩치에 비해선 움직임도 민첩하다. P-AWS라는 사륜 정밀 조향 시스템이 달렸는데 뒷바퀴까지 상황에 따라 조금씩 틀어 재빠르게, 혹은 안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다. 다른 건 몰라도 유턴할 때 회전반경은 확실히 줄어든다.

앞차와의 거리를 가늠해 속도를 조절하는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과 차선을 벗어나면 운전대를 살짝 틀어 차선 이탈을 방지하는 장치도 들어갔다. 분명 운전을 편하게 해준다. 가끔 운전자를 깜짝 놀라게도 한다. 종종 앞차를 놓치고 돌진할 때가 있다. 코너나 언덕 등 앞차의 위치가 바뀌는 곳에서 자주 그런다. 내달리는 레전드는 또 운전자보고 브레이크 밟으라고 난리다. 대시보드 위로 불을 깜빡이고 계기반엔 큼직하게 ‘BRAKE’란 문구를 띄우며 안전벨트도 막 잡아당긴다. 충돌 경감 제동 시스템이 작동하는 거다.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과 차선이탈 방지 시스템을 켜면 계기반 중앙 디스플레이에 자동차 모양과 차선 그림이 뜨는데 이걸 잘 봐야 한다. 차선이 인식되면 하얀 차선이 나타나고 앞차를 찾으면 하얀 자동차가 나타난다. 이게 사라지면 허둥대고 있다는 거다. 재밌는 건 분명 같은 레이더로 정보를 받는 것 같은데 충돌 경감 제동 시스템이 인식하는 걸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은 모를 때가 있다. 둘이 싸운 건 아닐 텐데 친하지도 않은가 보다.

레전드의 가격은 6480만원이다. 가격은 내렸지만 출력은 높이고 크기도 커졌다. 연비도 리터당 8.1킬로미터이던 게 리터당 9.7킬로미터로 향상됐다. 어큐라로 먼저 출시된 모델이라선지 고급감도 높아졌다. 조금 서투르지만 안전 및 편의 장비도 두루 갖췄다. 하지만 6000만원대 동급 시장엔 BMW 5시리즈와 메르세데스 벤츠 E 클래스, 아우디 A4 등 전통의 강자들이 즐비하다. 혼다 레전드의 도전은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