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지박, 절구통, 다식판 등 심영순의 요리연구원에는 옛날 조리 도구들이 구석구석 자리한다. ‘친정어머니가 물려주셨나?’ 그 출처를 기억하기 힘들 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한 도구들. 그의 40년 요리 인생을 말해주듯 그것은 하나의 작품 같다. 

 

 

옥수동 극동상가. 비록 낡고 오래된 상가 건물이지만 누군가에겐 삶의 역사기도 하다. 옥수동 요리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심영순에겐 더더욱 그렇다. 이곳에서 요리를 가르친 지 25년. “그전에는 초빙을 받아 요리를 가르치러 다녔어요. 그래서 독선생으로 불리기도 했지요.” 재벌가에서부터 장차관 부인, 한식깨나 한다고 소문난 한식당 등 그를 거친 제자들의 수를 세는 건 무의미하다. 독선생으로 이름을 날린 시절부터 옥수동의 현재까지, 그 시간만 40년이다. 깐깐한 <한食대첩> 속 심사위원이 다시 재림한 듯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타났다. “요새는 음식 프로그램이 전 세계로 나가잖아요. <한食대첩> 제안을 받고 한식을 좀 더 알릴 수 있는 방법이 뭘지를 고민했어요. 심사위원 세 명 중 내가 중간에 한복을 입고 있으면 호기심을 가질 것 같았어요.” 출연자 모두가 양장 차림이면 외국인 입장에선 이게 ‘한식대첩’인지 ‘중식대첩’인지 자세히 보지 않는 한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 같아서,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한복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일명 후까시를 넣은 풍성한 백발 헤어와 우아한 매무새. 그는 푸근한 우리네 할머니보다는 깍쟁이 서울 할머니가 더 어울린다. 물론 TV 속 이미지가 한몫했을 것이다. 오물오물 맛을 음미하다가 조금의 실수가 발견되면 ‘이 고기는 40번은 씹어야 넘어갈 것 같다’는 독설을 서슴지 않던 그가 아닌가. “나는 여태까지 나를 위해 큰돈을 써본 적이 별로 없어요. 블라우스 하나 사 입지 않았어요. 아! 팬티만 사 입었어(웃음). 글쎄 백화점에 갔는데 내가 입은 몇만원짜리 옷보다 더 거지처럼 생긴 게 280만원이래요.” 몇백만원짜리 옷을 척척 사 입는 여자들을 보면 욕이 절로 나온다며 시원스레 입 밖으로 내뱉고는 입을 가린 채 깔깔 웃는다. 서울깍쟁이 할머니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진 채다. 

 

 

 

한식에 대한 사랑만큼 그의 한복 사랑도 비례한다. 그는 30~40벌의 한복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엔 자신에게 요리를 배우는 이들이 선물한 것도 있다. 오늘 입고 나온 한복도 선물로 받은 것이라며 심영순은 흐뭇하게 웃는다.

 

 

서른 살 때까지 그저 평범한 주부로 살았던 심영순. 그에게 기회는 우연하게 찾아왔다. 딸들의 소풍 도시락을 그저 열심히 싸주었을 뿐인데 학교에 소문이 자자했고, 마침 그 학교를 다니던 재벌가 자녀의 엄마에게까지 소문이 났다. “주변 사람에게 만들어준 음식이 맛있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독선생 요청이 많이 들어왔어요.” 내로라하는 명문가의 러브콜이 이어지면서 재벌가의 요리 선생님이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처음에는 한식, 중식, 일식을 다 가르쳤어요. 그런데 중식은 중국 사람이 아니면 제아무리 잘해도 인정받지 못하잖아요? 다 접고 한식으로 돌아와 우리나라 음식을 더 깊이 연구하자 싶었죠.” 그때부터 전국 각지를 돌며 지역별 식자재, 조리법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북은 이북대로 이남은 이남대로 각자의 요리가 발달한 게 우리나라예요. 신라는 주변에 바다가 있어 해물 요리가 번성했고, 백제는 산과 들이 있어 곡식이 엄청나게 많이 났으니 자연스럽게 떡이 발달했고.” 지역에 따라 맛, 조리법, 재료가 다 다르니, 그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요리 선생이었다. 무엇보다 그에게 최고의 요리 선생은 다름 아닌 친정어머니였다. 

 

“지금 생각해도 우리 어머니는 음식 자체가 다른 집 엄마와는 달랐어요.” 밥 위에 가지를 찌는 모습 하나만 봐도 그랬다. 일단 가지에 소금을 뿌려 꼭 짠 뒤 쌀 위에 한지를 깔고 그 위에 가지를 쪄냈다. 가지를 그냥 쌀 위에 얹으면 물기가 나와 밥이 질어지고, 가지색이 배어나와 흰밥에 배기 때문이다. 술 좋아하는 아버지 때문에 동동주, 소주까지 집에서 직접 담갔을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던 어머니. “우리 어머니가 왜 음식을 잘했느냐면, 집이 윤택하게 살았나 봐요. 그러니 당연히 일하는 사람도 많았고, 음식을 많이 해야 했던 거지요.” 어머니의 다재다능한 재주를 막내딸인 그가 물려받은 셈이다. 빼어난 요리 솜씨 때문에 한식 레스토랑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권유도 수없이 받았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말렸다. 그 대신 요리를 가르치는 일에는 찬성했다. 

 

“부모 자식은 물론 사람들도 그래요. 나한테 득이 돼야 찾아오지 실이 되면 안 와요. 인간사가 다 그래요.” 그는 요리를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수강생에게 어머니의 마음으로 요리를 해 먹이고 살뜰히도 챙겼다. “내 입장에서는 귀하디귀한 사람이 온 거죠. 나는 한 번도 있던 레시피로 대충 시간을 때운 적이 없어요. 늘 메뉴를 새로 연구했죠. 그래야 이 사람들이 다음 주에도 또 오니까요(웃음). 여름철 민어가 얼마나 비싼지 몰라요. 그래도 재료는 아낀 적이 없어요.” 사람들에게 대접하기를 좋아했던 심영순. 그러니 요리 강습 역시 가르친다기보다는 그들을 대접하는 마음이 더 컸다. 무엇을 가르쳐야 그들이 건강하게 먹을 수 있을지를 늘 고민했고, 그런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다 보니 자연스레 명성이 따라왔노라고 그는 말한다. 

 

 

 

 

살뜰한 영순 씨

오라를 풍기는 백발 헤어와 빈틈없는 매무새의 깐깐한 심사위원. 하나 이곳엔 심사위원 심영순은 없었다. 끼니를 놓친 채 다음 장소로 달려가는 촬영 스태프를 걱정하는 살뜰한 심영순이 있을 뿐. 평생 남을 대접하길 좋아하던 그였다. 

 

 

 

“아주 오래된 칼, 다듬이, 홍두깨가 있었어요. 미국에서 온 손녀딸한테 여기 정리를 시켰는데, 모르고 다 버린 거예요. 그래서 민속촌에 가서 칼도 새로 샀어요. 그런데 오래된 칼을 죄다 갖다 버린 손녀딸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요. 나무 손잡이에 균열이 가서 위생상 안 좋다는 거죠.” 몇십 년째 요리를 했고 명성도 얻었으니 사람들은 입이 떡 벌어질 만한 가격의 칼, 그것도 아니면 몇십 년 묵은 보물 같은 칼 하나쯤 있을 거라 여긴다. 그런 예상은 정확히 틀렸다. “조선칼. 한식을 만드는 데 이 칼 이상 좋은 게 없어요. 가격도 10만원 이하의 저렴한 칼이죠. 기름칠을 잘 하면 묵직해서 채 썰 때 엇나가지 않고, 칼질이 잘 돼요. 칼이 너무 가벼우면 팔목과 어깨가 아프고.” 그의 요리연구원엔 백자, 청자, 소반, 함지박, 다식판 등 한식 요리에 필요한 도구가 들어차 있다. 물론 개중엔 몇백만원의 가치를 지닌 소반도 있고, 오래된 그릇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반대다. “친척 중에 가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그릇을 디자인해서 주문하죠. 물론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들 때가 많아요. 다섯 번 정도는 되돌려보낸 후라야 제대로 된 그릇이 나와요. 한식 그릇은 오목한 둑이 있어야 해요. 요즘 사람은 평평한 접시를 많이 사용하는데 다 일본식이죠.” 비싼 그릇을 찾기보다는 제대로 된 그릇을 용도에 맞게 사용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건 그릇의 가격이 아닌 조리법과 양념이라며. 

 

“양념이 너무 많아도 안 좋고, 적어도 안 되고. 이게 음악과 같아서 계속 연습하고 만들어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실력 차가 엄청나요. 내가 아직도 직접 가르치는 이유가 그 때문이기도 해요. 우리 음식은 무엇보다 양념이 제일 중요해요.” 최근 백종원이 만든 만능 간장이 큰 인기를 끌었고, 마침 그에 대한 생각도 궁금하던 차였다. 원래 이런 일엔 주변이 더 시끄러운 법. 요리를 배우는 수강생이 안 그래도 만능 간장을 만들어보고 이야기를 해주더란다. 그중엔 ‘선생님의 레시피와 비슷한 것 같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원래 한식을 하는 사람이라면 알 만한 레시피니 누가 누굴 따라 했다는 말에는 신경 쓰지 않아요.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양념이 널리 알려지는 건 좋은 일이죠. 한 가지 우려되는 건, 모든 식품은 염분이 들어가면 딱딱해져요. 그런데 간장에 고기를 넣고 조리면 돌덩어리가 돼요.” 그는 이미 10년 전에 발행한 <최고의 우리맛>을 통해 그간의 노하우가 담긴 양념을 소개했다. “좋은 물에 소고기를 끓여 기름을 제거하고, 젤라틴처럼 응고된 물에 간장 3분의 1을 혼합하고, 채소 30%를 넣고 끓여 체에 거르면 소고기 국간장이 돼요. 이렇게 끓이면 염도도 약해지고. 사실 우리 음식에 그렇게 염도가 높을 필요가 없어요.” 국간장, 향신장 등 이미 오래전부터 한식을 집에서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양념 개발에도 힘을 쏟는 그. 실제로 요리연구원 한쪽엔 실험실까지 갖춘 식품연구원이 자리한다. 바로 그곳에서 향신장, 국간장 등 그의 노하우가 담긴 양념이 연구, 개발된다. 

 

“내가 죽기 전까지의 꿈이 향신즙, 장, 기름 소스 등 지금 개발한 즙 외에 몇 가지 양념을 더 개발하는 거예요.”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한식뿐이다. 최근 방송을 타고 인기를 끌면서 광고 촬영 제안도 많았지만 거절한 게 대부분이다. 건강하고 웰빙 음식을 만드는 게 자신의 일인데, 그렇지 않은 브랜드의 광고를 하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한食대첩>에 출연하는 이유도 최고의 음식을 발굴하기 위한 것이지 다른 의미는 없어요.” 일을 하면서도 한평생 삼시 세끼를 손수 챙겼을 만큼 그에게 요리, 건강한 음식만큼 중요한 게 없었다. 그 음식 때문이었을까? 그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는데, 공교롭게도 두 분 다 98세까지 장수했다. “집에 두 어머니가 기다린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내 구두 소리만 들려도 두 분이서 어린아이가 엄마를 기다리듯 ‘온다, 온다, 온다!’ 하고 손뼉을 치며 절 기다리셨죠.” 자신이 그토록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에 힘듦보다는 행복했노라고 그는 말한다. 이후로도 그와의 이야기는 몇 시간째 이어졌고, 그중 팔할은 삼천포로 빠졌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는 한식의 위대함을 역설하는 대신 삼시 세끼의, 부모님의, 그리고 무엇보다 남을 대접하는 행복에 대한 이야기에 긴 시간을 할애했다. 옥수동 선생님, 그는 분명 요리만 가르치지 않았다.

 

 

 

몇만원의 조선칼

사람들은 상상한다. 몇십 년째 요리를 했고 명성도 얻었으니 입이 떡 벌어질 만한 가격의 칼 하나쯤은 있을 거라고. 상상은 정확히 엇나갔다. 몇만원의 소박한 조선칼. 한식을 하는 자신에겐 그것만 한 게 없는 듯하다고 심영순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