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인  신 해 욱

“여행을 떠나면요, 시간 감각이 좀 달라지는 것 같은데요.” 신해욱 시인과 여행 이야기를 한참 했다. “가령, 집에서 학교에 갈 때 샛길로 새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어쨌든 목적지에 늘 도착해야만 하는 것이 일상의 세계니까요. 그런데 여행에서는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만, 그곳에 도착해도 되고, 가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제게 주어지죠. 그 목적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 그게 여행인 것 같아요.” 여행은 그렇게 일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신해욱 시인은 여행가도 아니고, 여행 작가도 아니다. 1년에 두 번 또는 많이 가면 세 번 정도 여행을 떠난다. 얼마 전에는 교토를 다녀왔고, 작년에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바이칼을 여행했다. 눈의 여왕이 마법을 거는 것 같은 혹독한 추위를 겪기 위해 부러 겨울에 떠났다. 추운 나라에서는 추움을 경험하고, 마른 나라에서는 마름을 경험하고픈 욕구가 그녀에게는 있다. 여행에 능숙하거나 여행지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건네지는 않지만, 적어도 신해욱만의 여행 스타일은 있다. “여행지에 가면, 생활인의 감각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현지인의 삶의 감각에서 너무 유리되고 싶지 않달까. 그런데 한편으로 제 삶을 되돌아보면 삶에 익숙해질수록 주변이 잘 안 보이잖아요. 그렇듯 현지인이 된다는 것은 주위에 조금 무감각해지는 걸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관광객처럼 너무 겉도는 느낌 말고, 그 중간. 완전히 삶에 젖어들지 않았지만 여행자처럼 반질반질하게 겉돌지 않는 그 중간의 느낌에 닿을 수 있는 어떤 것을 찾는 게 제 여행의 즐거움이에요.”

처음 가본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호텔에서 느지막이 일어나 여유롭게 쉬는 것도, 버스를 번갈아 타며 골목골목을 구경한 교토 여행도 그녀에게는 만족스럽다. 그러나 낯선 곳에 덩그러니 있는 여행지에서 생활인과 관광객의 중간 지점으로 지내는 게 그리 쉬우랴. 그녀는 이것이 의도해서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마음을 달리 먹으면 가능하다고 했다. “처음 ‘이사’했을 때의 느낌을 되살리려고 해요.” 새 동네에 완전히 적응하지는 못했지만 산책하며 둘러보고도 싶은, 호기심 많은 이사 첫날. 낯선 곳에 왔다는 불편함과 불안함을 내치지 않고, 즐겨보자고 마음먹는다면 여행은 충분히 그 중간 지점이 될 수 있다. 신해욱 시인도 남들처럼 여행에 대한 로망을 품은 적이 있다. “여행에 서투르니까 관광지를 주로 다녔죠. 그런데 다녀와서 무엇이 남았는가를 떠올리면서 약간의 허망함을 느꼈어요. 동시에 제 여행 방식에 실망도 했죠.” 그런 그녀에게 여행의 재미를 안겨준 물건이 있다. ‘돌’이다. 어느 날 친구가 속초를 여행하다 주웠다며 돌 2개를 건넸다. 그녀는 후에 여수 앞바다에 그 돌을 던지고, ‘여수 앞바다 돌’을 가져왔다. 일종의 여행지에 남기는 낙서 같은 거다. 스스로 ‘돌 릴레이’라는 이름도 붙였다. 지난 2월에 다녀온 교토의 금각사 연못에는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가져온 돌을, 몽골의 고비 사막에는 거제도 몽돌해수욕장 돌을 두고 왔다. 대부분은 여행지에서 무언가를 가져오는데, 하나를 두고 오는 것이 아쉽지 않은지 물었다. “처음에는 갈등도 했는데, 그 장소에 마음을 두고 오는 거라 생각하니 괜찮아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제는 떠나기 전, 어떤 돌을 가져갈지 새 여행지에 어울리는 돌을 고르는 재미도 있단다. 신해욱은 이질적 일상과 그 속에서 마주한 우연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바이칼 호수에서 호버크래프트라는 배를 타고 알혼 섬에 갔어요. 호버크래프트에서 내려 섬으로 들어갈 때는 줄을 서서 차를 탔고, 나올 때는 다른 수륙양용 차를 타죠. 그런데 오후 5시쯤, 딱 하나 남은 수륙양용 차가 망가져서 운행을 안 한다는 거예요. 저는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가야 하는데 방법은 하나. 10km에 달하는 얼음길을 걸어서 나가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 얼음길을 걸었어요. 저하고 제 동료, 러시아 사람까지 세 명이 한 무리로 걸어갔죠. 중간쯤 갔나? 구급대원이 플래시를 켠 채 손을 흔들고 있더라고요. 거기서부터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움직였죠.” 무섭지는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 얼음길이 곳곳이 색이 달라요. 어느 부분은 투명하고, 어떤 부분은 새하얗게 얼어 있고, 얼음마다 질감도 제각각이었는데, ‘이 얼음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얼음에 대한 감성이 각기 다르겠구나’ 싶었어요.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는 그 길을 걸을 기회가 나한테 주어진 거잖아요. 불운이 아니라 행운이었을지도.” 대부분의 일이 그렇지만, 특히 여행은 누가 어디로 어떤 마음으로 떠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녀의 여행기를 들으면 더더욱.

1 돌 릴레이 | 디퓨저가 들어 있던 나무통 안에 돌을 가득 담았다. 처음에는 전 여행지에서 주워온 돌을 다음 여행지에 두고 오는 것이 그녀만의 규칙이었지만, 이제는 제법 돌이 늘어나 새 여행지에 어울릴 돌을 골라 가져간다.

2 블루투스 스피커 | 일정을 길게 잡고 여행을 떠나면, 어느새 그곳에 익숙해져 느지막이 눈이 떠진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잠을 못 이룰 때 음악을 틀어놓고 맥주 한잔 들이켜며 여유를 부리곤 한다. 여행지에 맞춰 음악도 미리 선곡한다.

3 카메라 | 혼자 여행을 떠날 때 카메라는 지루함을 덜어준다. 주로 여행지에서 만난 물건이나 풍경을 찍는데, 그 사진은 그곳에서 느낀 감정과 일화를 떠올리게 해준다.

P D  탁 재 형

탁재형 PD의 여행에 헤어짐은 없다. 그는 늘 돌아갈 궁리를 한다. 여행지로. “다시 가고 싶은 여행지는 어디예요?” 여행에 관해서는 빈도 면에서도 밀도 면에서도 정통한 그였기에, 가고 싶은 여행지를 묻는 것보다 적절할 것 같았다. “취재차 간 곳은 모두 다시 가고 싶어요. 같은 장소라도 취재로 가는 것과 여행으로 가는 것의 차이는, 좋아서 하는 서바이벌 게임과 군대에서 하는 각개 전투의 차이랄까.” 실제로 그는 그 염원을 조금씩 실현하는 중이다. 2008년, 남미에서 한 소수 부족의 결혼식 대부로 참석해,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가 생긴 그는, 3년 후 여행차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셋째 손자가 생겼다. 네팔에서 인연을 맺은 양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네팔을 방문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취재를 빌미로 돌아가기도 했다. EBS의 <세계테마기행>으로 잘 알려진 탁재형 PD는 현재 <탁PD의 여행수다>라는 팟캐스트의 프로듀서이자 진행자다. 처음부터 그에게 ‘여행 DNA’가 장착됐던 것은 아니다. 프로그램 때문에 두 달에 2주 정도 해외 출장을 가는 생활을 10년간 되풀이하다 보니 여행에 대한 갈망이 짙어진, 후천적 취향에 가깝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지인의 제안으로 처음 패널로 등장한 팟캐스트에서 그는 수다에 재능 있음을 발견했고,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팟캐스트를 만들었다. 바로 여행 수다. 여행을 업으로 삼게 된 것이다. 일 반, 여행 반. 예전의 생활에 비하면 여행의 비중이 크게 늘어난 셈이다. 방송 PD로 근무하던 때는 해외의 시사, 휴먼, 풍물부터 내전 지역, 이라크 난민을 취재하기도 했다. “출장은 여행이라고 하기는 힘들어요.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기 어려우니까. 그런 시간을 많이 갖기 위한 것도 여행 팟캐스트에 집중하는 이유 중 하나예요.” 다른 대상에 초점이 맞춰진 일에서, 불어난 여행에 대한 갈망은 어쩌면 그 스스로에 대한 갈증이었는지도 모른다. 원하는 때 원하는 곳으로 떠나는 자유야말로 그에게는 여행이다. 그는 청취자와 함께 작년에는 뉴질랜드를 두 번, 지난 4월에는 대만을 다녀왔다. 또 오는 9월에는 스페인에서 출발해서 스페인으로 되돌아오는 7박 8일의 지중해 크루즈 여행을 계획 중이다. “특별한 스케줄이나 프로그램은 없어요. 그냥 ‘같이 모여 놀자’예요.” 청취자와 함께 떠나는 여행은 그에게 일과 여행의 중간 지점이다.

그가 촬영을 위해 가져온 물건 중 포터블 포토프린터가 눈에 띄었다. “2012년 인도네시아에서 산 물건이에요. 번성한 도시인 자카르타의 칠리웅이라는 빈민가를 취재하던 중이었죠.” 취재 중 빈민가의 공부방에서 만난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싶었는데, 마침 동행한 이가 사진작가 김홍희였다. “사비로 조연출을 시켜 번화가에 나가서 사온 게 포터블 포토프린터예요. 우리가 찍어서 우리만 가져오면 의미가 없잖아요. 그런 면에서 포터블 포토프린터는 공정한 것 같아요. 요즘 말로 ‘PC(political correctness)’라고 하죠.” 함께 찍은 사진은 나눠 갖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시선이 새로웠다. 여행 중 받은 도움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는 그의 성격 탓이기도 할 터. 수많은 곳을 여행하며 터득한 지혜나 습관처럼 보였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신세 질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타지에서 사진을 선물하는 것은 괜찮은 감사의 표현 같다. 그는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연도와 지역명 등 사소하지만 기억하기 힘든 정보를 척척 막힘없이 내뱉었다. 그곳에서 만난 인연을 그가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다녀온 모든 곳이 좋았다는 그이지만, 인터뷰 내내 수없이 입에 오르내린 곳은 네팔이다. “800m의 포카라에서 안나푸르나가 보여요. 안나푸르나의 높이는 8000m 이상인데, 높이 7000m의 설산이 우뚝 서 있는 느낌은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그는 이런 충격이 시각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법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다. “상식에서 벗어나는 체험. 그 앞에 서 있으면 영감에 가득 찬 듯한 느낌이에요.” 네팔만 4번 다녀왔는데, 또 그곳으로 떠날 예정이다. 계속해서 그를 그곳으로 불러들이는 건 거대한 자연과 사람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혹독한 자연을 겪으며 살다 보니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요. 자연에 비해 인간의 존재가 미미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수용할 줄 알아요. 또 인정이 많고 관대하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내가 돕지 않으면 험난한 환경 속에서 언제 그가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똑같은 상황에 처하면 다른 이가 자신을 도울 거라 믿어서예요.” 요즘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글을 쓴다. 여정과 사색의 편린을 담은 ‘담백한 에세이가 될 것 같다’고 소개했다. <스피릿 로드>, <탁PD의 여행수다>를 책으로 내놓았지만 순수한 에세이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여행에서 그 자신을 찾고, 늘 그곳의 사람을 찾는다. 여행은 이제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 되었다. 그가 다시 돌아가야 할 이유다.

1 모자 | 해발 3800m에 위치한 티티카카 호수의 자외선에 크게 덴 후, 구입한 페루의 원주민 모자. 이 모자를 구입한 뒤 안도감 같은 것이 생긴 그는 스타일이 비슷한 모자에 요상한 애착을 갖게 되었다.

2 힙플라스크 | 힙플라스크 뒷면 링 모양의 홈으로 조그만 잔이 내장돼 있어, 주둥이째 마시지 않고 잔으로 마실 수 있다. 좋은 풍경을 앞에 두고 음유를 즐기기에 더없이 편리한 물건, 취향과 효율의 균형점에 있는 물건이라고 한다.

3 여행 노트 | 처음에는 취재 때문에 쓰기 시작했지만, 요즘 그의 노트에는 그가 끄적인 그림이 수두룩하다. 타토파니 마을의 고요한 풍경을 스케치하기도 하고, 여행하는 내내 그날 있었던 사소한 일을 그리고 쓴다.

4 포터블 포토프린터 | 여행 중 늘 갖고 다니지는 못하지만, 마음먹고 갖고 나가면 뜻하지 않게 좋은 추억이나 인연을 만들어주는 물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