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의 베란다 인더스트리얼.

설치작가 김병호의 성수동 작업실은 밤까지 빛났다.

‘사이’ 김시온 대표. / 회색 담벼락에 예술의 빛을 입힌 벽화.

예술과 에너지로 빛나는, 성수동

성수동. 단정한 도심의 그것과는 먼 풍경이다. 낡은 고가도로와 공장 지대, 그 아래로 깊숙이 파고든 사람들의 어지러운 흔적들. 이곳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불과 3년 전이다. 성수동을 수제화 구두 특화 지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 있었고, 젊은 디자이너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홍대, 이태원의 떠들썩함에 밀린 젊은 아티스트들까지 가세했다. 빈 창고와 공장에서는 각종 전시와 패션쇼가 열리고, 낡은 주택은 레스토랑과 카페,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실과 공방으로 바뀌었다. 인쇄소로 쓰던 공간을 개조한 카페 겸 조명 갤러리 자그마치, 복합문화공간 사이, 베란다 인더스트리얼, 스튜디오 창고, 유쾌한 아이디어 성수동 공장 등 이름부터 재미난 것들의 풍경이다. 회색빛 공장 지대와 아기자기한 예술의 에너지가 혼재된 공간. 새로 쓰는 성수동의 지형도는 지금 서울을 빛나게 한다. 구두 납품 창고였던 이곳 ‘사이’ 역시 2년 만에 아티스트들의 아지트가 됐다.
“영영과 영역 ‘사이’에 있는 사람과 콘텐츠를 조합하고 연결하는 작업을 통해 재미있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하고 싶었어요. 처음엔 디자이너, 포토그래퍼 친구들과 시작했는데, 점차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들이 놀러 오고 싶어 했고 작업도 같이 진행하며 멤버가 늘어났어요.” 사이의 김시온 대표, 그의 주변엔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와 프리랜서가 많았고 말 그대로 끼리끼리 모였다. 영상, 사진, 디자인, 아티스트(무용, 음악, 연극, 회화), 패션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모여 낮엔 작업하고 밤엔 파티, 공연을 펼친다. 그런데 왜 굳이 성수동이었을까. “교통과 렌트비 때문이었어요. 시작은 양재동이었는데 두 달 정도 지내다 신사로 옮겼죠. 한데 석 달도 못 버텼어요.”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다 정착한 곳이 바로 성수동 공간이었다. 놀면서 작업하기에 적당히 높은 층고와 넓은 공간이 필요했는데 그 임대료에 이렇게 넓은 공간을 얻기란 쉽지 않았다. 물론 (예전) 성수동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변에 패션, 디자인, 사진 관련 스튜디오들이 생겼지만, 홍대나 이태원에 비해 그 수가 무척 미미해요. 아티스트들이 자리 잡기엔 이곳도 너무 올랐어요. 서울숲과 공장 지대, 그리고 한강. 분명 매력적인 지역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아요.” 그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장르의 문화, 예술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최근 ‘사이’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파티와 공연은 그러한 맥락에서 시작됐다. “매달 바뀌는 테마에 맞춰 공간, 전시, 공연이 펼쳐져요. 연말엔 안톤 체호프의 작품 중 단편으로 연극과 공연을 열 예정이에요. 내년 초엔 기성 세대 아티스트와 신진 아티스트와의 컬래버레이션도 준비 중이고요.” 아티스트와 관객의 ‘사이’,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사이’, 창조와 소비의 ‘사이’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 나아가 건강한 문화예술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사이’의 미션일 거라고 그는 말한다.
한낮의 치열한 열기도 잠시 휴식을 취하는 늦은 저녁까지, 성수동의 시그너처 카페로 떠오른 ‘자그마치’에도, 작년 이곳에 둥지를 튼 설치작가 김병호의 작업실에도 한층 ‘센티’해진 밤의 이야기와 또 다른 빛이 드리운다. 비록 새 주인의 등장과 함께 이곳 성수동을 상징하던 구두 벽화는 사라졌지만, 회색 담벼락에 재미를 더하는 거리 어딘가의 작은 벽화들이 사람들의 걸음걸음에 잠시 휴식을 전한다. 허름해 보이지만 그 안을 채운 아티스트들의 빛나는 상상력과 오랫동안 묵묵히 이곳 성수동을 지켜온 수제화 장인들의 흔적이 공존하는 곳. 그 보기 좋은 공존이 지금 성수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하나 홍대, 이태원, 연남동의 그 트렌디한 열기를 기대한다면, 성수동은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 막 서울의 또 다른 풍경을 그리고 있고, 그려가야 할 성수동. 사람들은 이곳 성수동을 한국의 브루클린이라고 부른다. 브루클린엔 가본 적이 없다. 계획도 없다. 성수동엔 언제든 갈 수 있다.

1 치유의 공간 젠틀몬스터. 2 이색 셰어스토어 어쩌다가게.

공간유희
서울의 공간은 지금 스토리를 입고 있다. 카페, 패션 숍, 바, 갤러리, 공방 등 그 경계 역시 무너졌다. 업사이클링 트렌드와 공간에 관한 새로운 스토리를 찾는 대중의 호기심은 이러한 변화를 부추겼다. 얼마 전 가로수길에 문을 연 젠틀몬스터 역시 공간에 새로운 즐거움을 불어넣었다. 외관만 보면 패션 부티크가 떠오르지만 안으로 들어선 순간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낡은 베틀을 매장 한쪽에 전시한 것도 모자라 다른 한쪽엔 파이프, 라이터, 술, 바리캉, 미용실용 의자 등 남성을 모티프로 한 재미난 공간이 펼쳐진다. 전시장 같기도, 집인 것 같기도. 인테리어만 봐서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곳은 놀랍게도 선글라스, 안경 전문 매장이다. 이곳의 콘셉트는 ‘Home and Recovery’. 지하 1층과 4층으로 이루어진 이 공간은 집과 치유라는 정서적 맥락을 지닌 공간들의 교집합이다. 붕대, 링거병, 옷장과 침대 등 매장 인테리어로 사용된 독특한 오브제들에 이제야 무릎이 쳐진다. 지나간 흔적 위로 새롭게 덮인 공간은 직관적인 오브제와 만나 지친 현대인의 ‘감정의 회복’을 돕는다. 젠틀몬스터는 결국 눈이 아닌 마음을 회복시키는 치유의 공간인 것이다.  
연남동의 ‘어쩌다가게’ 역시 재미있는 콘셉트가 돋보인다. 공항철도와 경의선을 지하화하면서 홍대입구역 3번 출구부터 가좌역 1.3km 구간에 산책로가 조성됐고 연달아 다양한 숍이 문을 열었다. 어쩌다가게도 그중 하나다. 마당이 딸린 2층 주택을 개조한 어쩌다가게에는 가게 9개가 모여 있다. 100% 예약제로 운영되는 1인 미용실, 1인을 위한 프라이빗한 한의원, 서점, 싱글 몰트위스키 바 등 5~6평 남짓한 각기 다른 가게가 한 건물 안에 옹기종기 모였다. 치솟는 임대료 때문에 고민하던 사람들로, 소상공인을 위해 5년간 임대 기간을 보장하는 공용 상업 공간을 임대한다는 소식에 모여든 이들이다. 이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꾸민 이는 사이(SAAI) 건축 사무소로 셰어하우스를 만들고자 한 처음의 의도를 변경해 지금의 셰어스토어를 만들었다. 똑 닮은 회색 공간 대신 각자의 아이디어와 콘셉트로 공간을 즐기고, 이를 대중과 공유하는 흥미로운 공간의 탄생이야말로 지금 서울을 가장 빛나게 하는 백만 볼트의 빛이 아닐까.

거리를 비추다
서울의 거리는 유독 빛으로 빛났다. 서울빛초롱축제와 을지로 라이트웨이 2015가 11월 한 달을 가득 채웠다. 매년 청계천을 아름다운 빛으로 물들이는 서울빛초롱축제와 올해 새로운 시작을 알린 을지로 라이트웨이 2015. 특히 을지로 라이트웨이는 성수동 구두산업 활성화에 이어 을지로에 집적된 특화 상권인 조명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서울시와 서울디자인재단의 특별 프로젝트다. 을지로3가역과 을지로4가역을 중심으로 펼쳐진 특별 프로젝트엔 디자이너는 물론 조명 관련 기업, 서울 시내 디자인 전공 대학생 50여 팀의 컬래버레이션 전시가 펼쳐졌다. 특히 을지로3가역과 을지로4가역을 잇는 대로변 가로등 사이의 설치 조형물인 ‘Moving Installation Light’는 흥미를 더했다. 바람에 흔들거리는 여러 겹의 천 위에 빛을 쏘아 마치 그림자가 춤추는 듯한 이온에스엘디 팀의 ‘그림자 놀이’, ‘빛=희망’이라는 주제로, ‘행복’이라는 다양한 국가의 단어를 빛으로 선보인 라인 팀의 ‘Light on the Wall’ 덕에 낙후된 을지로 조명상가가 오랜만에 밝고 참신한 빛으로 빛났다. 을지로 라이트웨이는 ‘빛으로 통하다!’라는 슬로건처럼 빛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려는 작은 시작이 돋보인 프로젝트였다. 바로 이웃한 청계천 서울빛초롱축제의 북적이는 인파와 찬란한 조형물도 2015년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비춘다. 서울의 거리가 이렇듯 다채로운 이야기를 품으면서 자그마한 변화 하나도 생겼다. 친구와 함께, 가족과 함께, 그것도 아니면 혼자서라도 ‘걸으며’ 문화를 즐기는 여유로운 취향 하나가 생긴 것이다. 이제 서울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걷게’ 만든다. 어쩌면 그것은 2015년을 빛낸 서울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바야흐로 가장 아름다운 빛으로 물든, 12월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