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uk Pruim 네덜란드 그래픽 디자이너 아누크 프루임의 소박한 작업실. 빵 가게였던 공간을 작업실로 쓰고 있다. 오래된 작은 공간이지만 그녀에게는 영감의 원천이 되는 소중한 보물 창고라고.

 

 

호수를 두고 작은 마을과 마을이 모여 있는 지역. 암스테르담 남부 끝자락에 자리한 이곳은 시간이 멈춘 듯 평화롭기 그지없다. 유럽의 전형적인 도시 구성을 따르듯 이곳 역시 구시가 중심부에 교회가 자리하고, 그 주변으로 작은 광장과 상점이 즐비한 가운데 사람들의 여유로운 발걸음이 정겹게 느껴지니 말이다.
“저 역시 이곳의 슬로 라이프에 이끌려 오랜 세월을 이곳에서 보냈지요.”
그래픽 디자이너 아누크 프루임(Anouk Pruim)은 이곳이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결혼하고 이곳에 정착해 아이를 낳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처럼 안정된 동네가 또 어디 있겠느냐는 것.
“그러다 보니 집에 대한 불만이 전혀 없었어요.”
이렇듯 더없이 평화로운 생활이 이어지던 그녀에게 운명 같은 일이 다가왔다. 발단은 바로 구시가 교회 건너편에 있는 빵 가게 겸 공장 문에 붙여놓은 휴점 안내문이었다.
“어느 날 동네를 산책하다 늘 아침에 빵을 사던 가게 모퉁이를 돌게 되었어요. 그런데 가게 문에 폐점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문득 건물 자체가 색다르게 보이더군요.”
찬찬히 들여다보니 빵이 진열된 카운터 뒤로 넓은 공간뿐 아니라 건물 뒤로 작은 정원이 있는 게 아닌가. 고색창연한 벽돌로 마감된 내부 역시 그렇게 정겨울 수 없었다고.
주인에게 전화해보니, 당시 휴가 중이었고 돌아오면 이 공간을 처분하고 이사할 계획이라더군요. 그 말을 듣는데 이곳이 우리 가족이 앞으로 살아갈 보금자리가 아닐까 싶었어요.”
그 후 아누크는 남편과 내부를 둘러보았다. 아늑한 공간으로의 탈바꿈이 쉽지 않아 보였다. 계산대 뒤의 공간 내부는 여러 개로 비좁게 나뉘어 있었고, 주거 공간이 아닌 만큼 설비와 구조를 완전히 새로 바꿔야 했기 때문. 그럼에도 부부는 이곳을 집으로 낙점했다. 

 

 

 

2층에 있는 부부 침실 내 파우더룸과 욕실. 침실 영역보다 바닥의 단을 높이고 벽은 반만 세운, 세미 오픈형으로 디자인해 자유로운 로프트 스타일의 욕실을 만들었다. 수전과 세면대, 거울 등은 모두 앤티크 스타일로 선택했다.

 

 

“디자이너로서 무언가를 만들 때 항상 스토리가 있어야 완성도가 있음을 깨달았어요. 이러한 점에서 빵 공장을 개조해 우리 집으로 만드는 과정에 수많은 사연이 깃들 것이고, 이미 이 공간 자체에 오랜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있으니 그 매력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개조 공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부부에게는 사건이 닥쳤다.
“건물을 구입하고 리모델링 허가를 받기까지 무려 2년이 걸렸어요.”
주거 공간이 아니었던 만큼 모든 것을 새롭게 개조해야 하는 상황, 여기에 2층을 올려 공간을 넓히려는 하는 계획이 더해지니 심의를 받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개조하기 전까지 우리 가족은 최선을 다해 이 공간을 활용했어요. 두 번의 크리스마스 파티가 빵 공장에서 열렸죠.”
어른들은 음식을 나누고 밤새 파티를 즐겼으며, 아이들은 자전거와 스케이트보드를 타거나 심지어 벽면에 낙서를 하는 등 신나게 놀았다.
“지금은 그때가 그립기도 해요. 그렇게 완벽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집이 또 어디 있겠어요!”
자칫 조바심으로 점철될 수 있던 2년의 기다림을 이렇듯 재치 있게 즐긴 부부는 리모델링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미뤄둔 숙제를 해결하는 데 몰두했다. 이 작업에는 이웃으로 지내던 건축가 유스트 판 한(Joost Van Haan)이 참여해 공간 개조와 증축을 해결했고, 아누크와 잘 아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브레히트 뮈레(Brecht Murre)가 마감재와 컬러, 가구 등을 정리했다. 

 

 

 

 

창밖 풍경을 보며 음식을 만드는, 탁 트인 주방을 갖는 게 소원이었던 부부는 주방 가구 제작에 가장 많은 투자를 했다고. 고급 무늬 목재를 사용한 주방 가구는 이 집에 맞게 제작한 것. 정면에 보이는 책장과 오븐레인지가 삽입된 수납장 뒤로 현관문이 자리한다. 주방 가구를 통해 공간을 자연스럽게 분할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증축해서 생긴 2층의 부부 침실. 박공지붕 형태의 천장이 공간을 넓어 보이게 한다. 오래된 건물의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 벽면과 천장은 모두 짙은 나무색으로 마감했다.

 

 

“남편은 로프트 같은 공간을 원했고, 저는 공간과 공간이 명확하게 나뉘되 따뜻하고 아늑한 집을 원했죠.”
같은 공간을 두고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린 부부, 그러나 이는 충돌 없이 두 요구 조건을 합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건축가는 거실과 주방, 다이닝룸으로 이뤄진 1층을 각 공간이 분리된 듯 서로 연결되는 미로처럼 분할해 넓은 로프트처럼 느껴지면서도 안정감이 들도록 디자인했다.
“여기서 주시할 것은 바로 거실과 다이닝룸 사이에 설치한 스틸 박스 월이에요. 이는 거실 쪽에서 보면 벽난로이고 다이닝룸에서 보면 블랙의 스틸 파티션 월이 되지요.”
아누크는 건축가의 명료하면서도 시크한 공간 분할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뉘앙스는 증축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도 이어졌다. 블랙의 스틸 박스 안으로 반듯한 콘크리트 계단이 이어지는 디자인이 바로 그것. 그리고 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박공지붕 아래 자리한 로프트 스타일의 부부 침실과 아이들 방이 자리한다. 

 

 

 

1층 거실. 다이닝룸과 이어진 벽돌로 된 벽 부분을 흰색으로 칠해 거실의 개성을 연출했다. 거실 오른쪽 블랙 스틸 벽면은 리모델링하며 새로 만든 것으로, 다이닝룸과 거실을 나누는 파티션 기능을 하는 동시에 거실 사이드에서 보면 벽난로가 된다. 거실에 놓인 가구는 레드 소파만 제외하고 이 집을 위해 모두 빈티지 숍에서 구입한 것이다.

 

다이닝룸의 식탁은 길이가 무려 6m에 이르지만 폭을 좁게 만들어 식사를 하거나 파티를 할 때 상대방과 마주 앉아 소통할 수 있게 했다. 이 테이블은 집주인 부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디자인으로, 아이들이 숙제를 하거나 그림을 그릴 때도 유용하다고. 테이블은 이 집을 개조한 건축가가 만들어줬다. 다이닝룸의 블랙 스틸 벽면은 창문을 통해 비껴 들어오는 햇빛과 나뭇잎 그림자가 일렁일 때면 근사한 풍경을 연출해 작품 하나 걸어놓은 것 못지않다고.

 

 

 

“남편이 지향하는 로프트 스타일에는 고풍스러운 멋도 함께 깃들어 있어야 했죠. 이는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건축가가 공간 구성을 명쾌하게 완성했다면 인테리어 디자이너 브레히트는 이곳을 원래 있던 오래된 집인 듯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연출해야 하는 주요 임무를 맡았다. 브레히트는 이 집의 운치를 살리기 위해 증축한 2층은 제외하고, 1층의 벽면을 최대한 살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다이닝룸에서 거실까지 이어지는 한쪽 벽면은 붉은 벽돌 벽을 노출해 로프트의 자유로운 감성을 연출했죠. 여기서 포인트는 거실에서 바라본 벽돌 벽 부분은 화이트 페인트로 칠한 것입니다.”
브레히트의 설명을 따르면 이는 공간이 완전히 분리되길 원했던 아누크를 배려한 동시에 남편이 원하는 로프트의 감성도 최대한 살리는 방안이었다. 거실에 놓인 소파에 앉아서 보면 거실은 흰색 벽돌 벽이 포인트가 되는 밝고 화사한 느낌. 즉 붉은 벽돌 벽이 있는 다이닝룸과 분리된 곳이 된다. 그리고 흰색으로 처리한 벽면에는 빵 공장에서 쓰던 오래된 우드 작업대가 콘솔로 자리하면서 자유로운 감성이 충만한 로프트 하우스다운 면모가 강조된다. 인테리어 작업은 이러한 원리로 진행된 가운데 빵 가게로 쓰인 부분은 개조 없이 그대로 남겨뒀다.
“이 건물의 역사를 알려주는 아이콘 같은 공간이니 쉽게 없앨 수 없었죠. 게다가 이곳은 건물의 앞과 뒤를 잇는 뒤뜰로 나가는 통로가 있고 길가에서 진입하는 문과 쇼윈도까지 있어 채광도 풍부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유용하리라 생각했어요.”
이곳은 현재 아누크의 그래픽 작업 공간으로 쓰이는데, 무엇보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 있으면 가족은 물론 이웃까지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금세 찾을 수 있다고.
“일하는 엄마이자 주부로서는 이만한 명당 작업실은 없을 거예요! 우스갯소리로 들릴지 몰라도, 사실 이처럼 넓은 벽면과 여백이 있는 집을 갖게 되었는데도 스케일 있는 멋진 그림 한 점 걸지 못한 게 아쉬웠죠. 리모델링하느라 돈을 다 썼거든요. 하지만 여름 한철 지내 보니 이런 섭섭한 마음은 괜한 것임을 알았어요. 창밖에 나뭇잎이 무성해지면서 실내로 햇빛이 드리울 때 집 안 벽면 곳곳에 일렁이는 나뭇잎 그림자가 얼마나 근사한지 몰라요!” 

 

 

WRITER LEE JUNG 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