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시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양지해와 강담사 타나베 긴야. 

 

어떤 도시이든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 법. 동시대의 일상 속에 오래된 전통이 활발하게 소통되는 문화로서 배어 있는 도쿄 같은 곳일수록 특히 그렇다. 특별한 축제 철이 아니어도 전통 의상인 기모노를 멋지게 차려입고 휘황한 도시 속을 걷는 젊은 여성들과 마주치는 일이 놀랍지 않은 도쿄. 한편으로는, ‘외계인이 하루아침에 세워낸 최첨단 미래 도시’라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도시 재생 프로젝트’인 롯폰기 힐스를 성공적으로 구축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도쿄를 걷다 보면 불쑥 시공간을 초월하는 듯한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이 도시의 미래는 ‘전통’이라는 과거와 어떻게든 연결된 현재에 발을 딛고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메트로시티 브랜드를 들고 일본 시장에 진출하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도쿄라는 중심 도시를 더 깊이 탐색한 이유가 바로 이런 데 있다.

 

이번 도쿄 여행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공연을 접하며 강담사(講談師)라는 존재를 알게 됐다. 일본인도 생소하게 여기는 일본 전통문화인 ‘라쿠고(落語)’. 오래전부터 불교의 가르침을 강의하던 강담에서 시작해 전통 예능으로 발전한 라쿠고는 ‘일종의 대중적 역사물이자, 일본 고유의 전통으로 유명 역사적 사건을 대중의 기호에 맞게 각색, 허구와 전설 등을 가미해 구연되는 이야기’를 뜻한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힘쓰는 강담사인 타나베 긴야(Ginya Tanabe)를 만났다. 그녀는 역사를 소재로 하는 이야기꾼인 강담의 역사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 불교 일연종의 법연 모임에서 강담 공연을 하고 있는 긴야. 강담이란 역사를 소재로 한 일본의 전통 이야기 예술이다. 

 

“전국 시대(1467~1573)에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 등의 군기 이야기가 강의 교재로 활용되면서 군기 읽기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나타났어요. 그 대표가 아카마츠 호우인으로, 강담사의 선조로 알려졌지요. 강담사는 역사를 소재로 하는 이야기꾼으로서 사실이 아닌 어떤 장르의 이야기라도 창작이 가능한 전통 예능인이에요. 단순한 스토리텔러가 아닌, 자신만의 메시지를 담는 자유로운 창작을 할 수 있어요.”

 

어떤 이야기든 강담으로 만들 수 있다고 얘기한 그녀의 강담 작품 중에는 흥미롭게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레이디 가가>, <프랑켄슈타인> 같은 것도 있다. 일본의 역사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미국의 팝 가수 ‘레이디 가가’는 어떤 이유로 이야기의 주제로 선택된 것일까?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가가는 즉시 ‘일본을 위해 기도를’이라는 문구가 쓰인 팔찌를 인터넷으로 판매해 불과 2주일 만에 1억 2000만 엔의 성금을 모았어요. 거기에 자신의 돈 1억2000만 엔을 더해 2억4000만 엔을 성금으로 기부하며 일본인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지요. 또 지진 재해가 일어나고 10주일 후인 6월에 방일해 사랑이 넘치는 기자 회견과 더불어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라이브 공연을 선물해주었습니다. 그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만든 작품이 <레이디 가가>예요.”

 

가가의 성장기에서부터 세계적인 스타덤에 오르기까지의 과정과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인류애를 가진 사회 활동가로서의 면모까지 갖춘 인물로 구성된 이야기다. 또 하나의 문제적 작품 <프랑켄슈타인>은,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괴물은 잇달아 죄를 범하게 된다. 어린이는 어른의 거울이다. 어린이의 타락은 어른의 잘못이다. 사회적 책임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 ‘교육’에 대해 생각해주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전했다. 학교 선생님이 되는 ‘꿈’을 가진 그녀는 앞으로 꼭 시도하고 싶은 주제가 하나 있다. 두 번 다시 전쟁을 바라지 않는 피폭 3세로서 히로시마 원폭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1, 3  아사쿠사의 오래된 와시(일본 종이) 잡화점 쿠로다야는 강담사 긴야가 즐겨 찾는 곳이다. 2 기모노를 입는 긴야를 위해 양지해 대표가 멋진 백을 디자인했다. 4, 5 긴야가 추천하는 하이엔드 패션 빈티지 숍 라일라. 시부야에 있다. 5 와시 잡화점에서 화려한 일본 종이를 보고 있는 긴야.

 

타나베 긴야가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또 다른 주제는, 바로 패션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패션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 마루야마 케이타, 야마모토 칸사이 등은 물론 코코 샤넬이나 이브 생 로랑 등 해외의 디자이너 이야기도 하고 싶다”고 한 그녀는 전통 의상인 기모노를 입고 공연하는 전통 예능인으로서 전통을 계승하는 일만큼이나 동시대 젊은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타나베 긴야라는 개성에 부합하는 것인지’를 고려해 무대 의상은 물론 일상에서도 다양한 소재의 기모노를 선택해 입어온 그녀는 “가능하면 메이크업과 의상, 연출에 이르는 모든 것에서 ‘가부키모노’를 구현하고 싶다”고. 무로마치 시대에서 에도 시대에 걸쳐 색다르고 화려한 차림으로 남의 눈을 끄는 언동을 일삼던 사람을 지칭하는 ‘가부키모노’. 말하자면 언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을 갖춘 슈퍼 강담사가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믿음을 전하겠다는 뜻을 품고 있는 그녀는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극적인 장치’로 일본의 전통 패션을 이용하려는 셈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이국 땅에서 진정으로 일본에 대해 눈을 떴다”고 표현할 만큼 자신의 정체성을 치열하게 고민한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

 

“뉴질랜드로 떠나기로 결정한 이유는 나 자신을 찾는 데에 있었어요. 해외로 나가면 일본에 대해 여러 질문을 받는데 거의 대답할 수 없었고, 몇 번이나 ‘왜 일본인인데도 일본을 모르니?’라는 얘기를 듣곤 했죠. 부끄러웠어요. 저뿐 아니라 다른 일본인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그런데 ‘타국’에 와 있는 다른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은 모두 자신의 나라를 잘 알고 있고, 무엇보다 조국을 자랑할 만한 거리가 있었거든요. 그런 데서 상당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해외에 나가서 처음으로 일본인으로 보였고 일본을 의식하게 된 경험이에요. 다음은, 티셔츠에 청바지라는 조합이 어찌 해도 서양인보다 멋지지 않아 고민했던 거예요. 결국 양복은 서양 옷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일본인에게 어울리는 복식을 몇 개월간 열심히 찾았어요. 그때 내린 대답은 전시에 무사가 쓴 ‘투구’였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기모노’가 있었는데도, 투구로 결론을 내린 이유는 아마도 제가 강담사였기 때문 아닐까요. 하지만 틀림없이 처음으로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느낀 기념해야 할 순간이었어요.”

 

외국에서 살면서 느낀 것은, 각 나라의 문화 차이와 재미, 그리고 좀 더 ‘일본적인 것’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모두가 달라서 좋다고 생각했고, 전 세계에 더 많은 친구들이 생기면 더더욱 즐거울 거라 생각했다.

 

6 긴야가 추천한 빈티지 숍에서 원단을 구경하고 있는 양지해 디렉터. 7 와시 잡화점에서 화려한 일본 종이를 보고 있는 긴야. 

 

강담의 창작 원리에 대해 문학평론가 오형엽은 “혼자 책상머리에 앉아 문자로 써나가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 함께 구두로 엮어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생활 현실에 밀착해 사회 내부의 갈등은 물론 대중의 사랑과 웃음과 눈물과 분노를 생활 언어로 생생하게 이야기하는 열린 문학이 곧 강담이었다. 일방적으로 완성된 이야기는 ‘상대의 재미’를 빼앗는다. 귀로 들은 이야기를 자신만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 편집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궤와 맞물린 이야기를 창작해 들려주는 강담사는 그래서 말하는 사람인 동시에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쌍방향 소통’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로, 뭔가를 전달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이 갖춰야 할 재능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이든 스토리텔링하는 시대에서 참으로 많은 풍문 속에 산다. 풍문의 지층은 두텁고 무겁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하거나 문화라고 한다. 예리한 관찰력으로 인간의 속을 꿰뚫어보는 자질을 지닌 강담사, 타나베 긴야는 명료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일본도 점점 폐쇄적인, 재미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데, 저는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어도 인생은 즐겁다고 믿거든요. ‘자기 책임’, ‘자신을 좋아하는 것’, ‘인생은 즐거운 것’이라는 메시지를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요.”

 

전통 예능 세계의 특성상 상하관계가 분명한 점이 무척 힘들다는 강담의 세계. “개막 출연을 담당하는 젠자(前座), 마지막에 출연하는 제일 잘하는 만담가보다 앞서서 출연하지만 제자를 거느릴 수는 없는 후타쯔메(二ツ目), 마지막에 출연해 무대를 마무리하는 명인인 신우치(眞打)라는 계급 안에서, 하고 싶은 것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초보인 젠자 시기를 한결같은 인내심으로 견뎌야 하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고 했지만, 운명처럼 입문한 9세 때부터 작년까지는 하루에도 백만 번은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다독이며 자신을 이끌어온 젊은 이야기꾼. 

 

그녀가 강담의 길로 들어선 시작도 이채롭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긴야의 어머니가 어느 날 꿈에서 낯선 남자를 봤는데, 며칠 뒤 신문에서 그 사람을 본 것. 강담사였던 그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담을 가르치겠다고 광고를 낸 것이다. 운명이라 느낀 긴야의 어머니는 그 뒤 그분을 스승으로 받아들이는데 당시 9세였던 긴야도 그 영향을 받아 그분의 문하생이 되었다. 

 

현재 후타쯔메 강담사로 활동하는 그녀는 강담을 전문적으로 진행하는 공간인 ‘소옥(小屋)’을 부활시키는 바람을 갖고 있다. 정기적으로 강담을 여는 전문 공연장이 없기에 여러 장소에서 강담을 해온 그녀에게 “7할의 공연이 처음 가는 회장, 처음 만나는 관객이었다.” 평생에 단 한 번 만남이 생애에 한 번뿐인 일이 되는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인연도 소중하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시간의 흐름 속에 반복되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다. 과거인 ‘어제’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는 ‘오늘’을 살기에 그렇다. 활자의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이야기를 전파하던 매체는 ‘입’이었다. “풍문으로 들었소” 했던 얘기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갖던 시절과 글로벌한 관계망으로 얽혀 있는 SNS로 소통하는 오늘날을 과연 완벽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일에는 투철한 프로 정신을 보이는 그녀지만 평소 시간이 날 때마다 여느 또래 젊은 여성처럼 쇼핑과 영화 관람을 즐긴다. 시끌벅쩍한 신주쿠의 밤거리를 좋아하지만, 신상 아이템보다는 올드하고 낡은 것에서 매력을 느끼는 낭만파. 그래서 그녀는 아사쿠사에 자리한 100년이 훌쩍 넘은 일본 종이(和紙: 와시) 잡화점을 사랑하고, 시부야의 다양한 빈티지 숍을 즐겨 찾는다. 나는 긴야가 추천한 여러 매장을 둘러봤는데, 그중 하이 브랜드 빈티지를 취급하는 셀렉트 숍인 라일라(Laila)가 마음에 들었다. 제품 하나하나에 이야기나 역사가 담겨 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에서 “낭만을 느낀다”고 했던 그녀. 개성적이고 유니크함이 있는 디자인의 옷이나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있으면 “좀 더 즐거워지는 것 같다”는 그 말에 공감한다. 

 

가장 자신다워 보이는 무언가를 찾은 사람들은 안다. 타인과 ‘다르다’는 차이를 발견하는 일에서부터 ‘나의 이야기’가 빚어진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쓴 양지해는 패션 브랜드 메트로시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CEO로서, 영감을 얻기 위해 전 세계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그곳 사람들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