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슈트를 입은 모습은 참 멋지다. 이건 1990년대 멋쟁이 여자들이 심어준 이미지 덕분이다. 그 시절 동경하던 케이트 모스나 크리스티 털링턴 같은 쿨한 매력을 지닌 슈퍼모델들이 잠옷 같은 얇은 슬립 드레스를 입고(지금 유행하는 파자마 룩의 시초가 아닐까?), 커다란 핀 스트라이프 재킷 소매를 둘둘 말아 입은 파파라치 컷을 보며 어렴풋이 ‘아 이런 게 멋이구나’ 하며 흠모했다. 파리한 쇄골이 드러나는 슬립 드레스에 남자 친구의 재킷을 잠깐 걸친 것 같은 룩은 애써 멋 부리지 않아도, 충분히 여성스럽고 섹시해 보였다. 또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고현정이 새까만 머리를 단정하게 넘기고 배꼽까지 올려 입은 청바지에 커다란 재킷을 걸친 모습 역시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모습보다 훨씬 여성스럽고 우아해 보였다. 이때부터 남성성이 더해진 룩과 다분히 마이너한 젠더리스에 대한 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편집숍에서도 치마나 블라우스보다 남성복 섹션의 셔츠나 재킷을 만지작거리고, 촬영장에서 우영미나 김서룡의 우아한 남성복 쇼피스를 마주할 때면 남몰래 재킷을 걸쳐보곤 했다. 그렇다고, 치마나 구두는 절대 입거나 신지 않는다거나 까까머리에 낡은 데님 재킷만 입고 다니는 건 아니니 오해 마시길! 나 역시 프라다와 샤넬의 드라마틱한 페미니티에 열광하지만 정반대의 매니시함에도 매혹된다는 이야기다. 

이번 시즌, 나의 이런 애매모호하고 상반된 젠더리스적 취향을 정확하게 정의해주는 강력한 이미지가 나타났다. 견고해 보이는 어깨 장식에 소매통이 넓은 재킷을 코르셋으로 조인 듯 타이트하게 잠근 셀린느의 슈트 룩은 지금껏 내가 동경했던 여성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남성적인 룩에 대한 환상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한복 바지처럼 아래로 갈수록 통이 좁아지는 아방가르드한 팬츠와 앞코가 투박한 가죽 슬립온까지 더해져 지극히 매니시한 동시에 우아한 핏의 슈트가 탄생한 것. 게다가 캠페인 컷에는 얼핏 보아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중성적인 얼굴의 모델 레나 하르트가 등장해 군더더기 없는 젠더리스 이미지를 완성했다. 계절과 계절, 하이 패션과 스트리트 패션, 현실과 가상, 그리고 남성복과 여성복의 경계가 무너진 지금 영민한 디자이너 피비 파일로는 젠더리스를 이토록 클린하게 표현한 것이다. 미우치우 프라다 역시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점점 더 남성과 여성, 두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아이디어로 접근하는 것이 직관적으로 옳다고 느껴져요.” 프라다 역시 지난 리조트 컬렉션에서 남성복과 여성복에 똑같은 패턴을 더해 양성의 경계를 허물었다. 
여성복이 매니시함을 새롭게 차용하는 방법에 몰두해 있다면, 남성복은 해방이라도 맞이한 듯 각양각색의 여성적인 디테일과 컬러를 원 없이 사용하고 있다.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남성을 위해 리본 장식 블라우스를 만들고 꽃무늬 슈트에 코르사주를 달고, 레이스가 달린 시폰 셔츠를 입히며 젠더리스에 열중했다. J.W.앤더슨의 조너선 앤더슨 역시 남성복 컬렉션에서 허벅지를 다 드러낸 미니드레스, 오프숄더 톱, 프릴이 달린 사이하이 부츠 등을 선보인 바 있다. 버버리는 어떤가. 남성복과 여성복 컬렉션을 통합하면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혼합한 우아한 룩을 성의 경계 없이 제안했다. 둥글게 부풀린 실루엣의 트렌치코트와 파스텔컬러 스웨트셔츠, 다채로운 패턴의 파자마 슈트와 프릴과 러플 장식을 남성복과 여성복 경계 없이 스타일링했다. 아크네의 2017 프리폴 컬렉션에서도 주얼 컬러의 실크 원피스와 리본 블라우스를 걸친 우아한 남성 모델을 확인할 수 있다. 디자이너들이 합심해서 여성복과 남성복을 나누는 카테고리를 무너뜨리는 이런 태도는 ‘젠더 플루이드’라 불리며, 젠더리스 트렌드 열풍에 가속을 더하고 있다. 유니섹스 혹은 단순히 여자가 남자처럼 입는 것이 아니라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자유롭게 오가는 유연성이 2017년 젠더 플루이드 트렌드의 포인트다. 

패션계에서 부르짖는 남녀평등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유지하면서 반대의 것도 자연스럽게 더하는 것이다. 우리는 파스텔컬러의 하늘거리는 꽃무늬 드레스를 여성스럽다고 표현하고, 네이비 컬러의 직선적이고 견고한 형태의 슈트를 남자답다고 수식하고 있지만, 적어도 패션 월드에서는 이런 관념적인 정의와 이별을 고할 때다. 몇 년 후에는 셀린느 매장에 자연스럽게 남자가 드나들고, 남자 소비자를 위해 셀린느 플리츠 원피스의 사이즈가 두 치수 더 큰 것까지 나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셔츠와 재킷은 여성복과 남성복 섹션 구분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남성복과 여성복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져도  나의 성은 결코 모호해지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망설임 없이 성과 관념의 경계를 넘나들며 젠더리스 트렌드를 즐기시기를. 낯선 남성성이 당신의 여성성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부각시켜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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